천년능찰 신륵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 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 · 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보물 제180호) · 명부전 · 심검당 · 적묵당 · 노전(爐殿)·칠성각 ·
종각 · 구룡루(九龍樓) · 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일주문(一柱門)
三日 修心은 千載寶요, 百年貪物은 一朝塵이로다. <삼일수심은 천재보요, 백년탐물은 일조진이로다>
즉 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지만, 백년동안 탐한 물건은 하루아침에 티끌이라네 = 초발심자경문
옛 일주문(古 一柱門) 보수중인가 보다.
구용루(九龍樓)
극락보전 맞은 편에 자리하는 구룡루(九龍樓)는 1858년 김병기의 지원으로 중창된 건물이다.
보통의 사찰 누각이 누대 밑으로 출입문이 나 있으므로 공간을 충분히 두는 데 비하여 이 구룡루는 누대 밑의 공간이 아주 낮다.
그것은 신륵사 중심사역으로의 출입이 강가 쪽의 정면이 아니라 범종루와 극락보전 오른쪽이므로 출입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의식 집행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구룡루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석가부처님이 탄생하실 때 성수를 뿜어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아홉 마리 용에 대한 이야기와,
신륵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아홉 마리 용의 승천과 관계있을 것으로 보인다.
누각 앞뒤로 '구룡루(九龍樓)'와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구용루(九龍樓)의 뒷모습 또 다른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란 현판이 걸려있음
누각 앞뒤로 '구룡루(九龍樓)'와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鳳尾山 神勒寺(봉미산 신륵사) 현판
한 건물에 다른 두 얼굴과 현판
관음전(觀音殿)
관음보살(觀音菩薩) = 용왕과 남순동자가 좌우에 있다.
신중단 (신중탱화)
감로탱화
감로탱은 감로(甘露)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중생을 해탈시킨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구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감로탱은 화면을 3단으로 구분하여 상단 중앙에 칠여래(七如來)가 연꽃 위에 서 있고,
그 아래에는 향로ㆍ촛대ㆍ꽃ㆍ과자 등이 성대하게 차려진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여래상의 좌우에는 각각 인로왕보살과 지장ㆍ관음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좌우 보살상의 아래쪽에는 성곽을 배경으로 왕과 군중들의 행차장면과
범패(梵唄)와 작법(作法)을 행하는 의식승의 모습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언덕의 능선과 구름으로 화면 상하단을 경계 짓고 있으며, 하단 중앙에는 구름과 화염에 둘러싸인 거대한 아귀 2구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지옥장면과 사당패의 줄타기장면, 싸움ㆍ전쟁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 불화는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영가천도 때 봉안된 감로도로서 화면의 하단에는 아귀 2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그 위로는 많은 음식과 공양물이 차려진 제단과 칠여래(七如來)가 표현되어 있다.
가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한 채 나란히 서 있으며, 좌측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있고 우측에는 인로왕보살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제단으로 이르는 돌계단 아래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 안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꽂혀있어 화려하게 치장된 당시
제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으며, 제단의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스님들이 나란히 모여 앉아 독경하는 모습과
스님들이 큰북과 바라 등을 두드리며 의식을 집전하는 모습,
승무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거나 들고서 제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화면의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한 쌍의 아귀가 크게 그려져 있다. 화염이 뿜어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얼굴표정 등에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의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거나 싸우는 장면,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거꾸로 서는 묘기를 부리고 초랭이가 부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세속의 다양한 장면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하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장면들은 주로 장례나 영가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화면 우측으로는 뇌신을 표현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등《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더불어 농사짓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병자를 진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갖고 무리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들을 벌하는 모습, 전쟁장면 등을 표현하였다.
채색은 전체적으로 적색과 황색, 흰색, 청록색 등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분홍색과 청회색, 금박, 금니 등도 함께 사용되었다.
금박과 금니는 칠여래의 신광을 비롯하여 화면 부분 부분에 사용되어 화려하면서도 호화로운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구도 표현에 있어서 다소 번잡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화면은 산수와 구름으로 잘 경계
지워져 있고, 풍속화적인 면이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인물들의 형태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필치가 안정되고 다양한 색감에 의한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감로탱화의 다른 각도
좌측 각 부분의 세밀도 우측
좌측 = 화면 속에 한복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거나 싸우는 장면,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거꾸로 묘기를 부리고 초랭이가 부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등《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더불어 농사짓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병자를 진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갖고 무리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들을 벌하는 모습, 전쟁장면 등을 표현하였다.
우측 = 하단 중앙에는 구름과 화염에 둘러싸인 거대한 아귀 2구
상단의 지장보살과 관음보살 왕생자들을 인도하는 인로왕보살
좌측 우측
좌측 = 아래쪽에는 성곽을 배경으로 왕과 군중들의 행차장면과 범패(梵唄)와 작법(作法)을 행하는 의식승의 모습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우측 = 지옥세계
관음전의 벽화 관세음보살
범종각(梵鐘閣)
범종(梵鐘)
각 방향의 다른 모습들 앞 뒤
범종아래 울림통이 다르곳에 비해 매우 깊다 속이 보이지를 않는다. 용뉴
용뉴 공양을 올리는 여인
법고(法鼓) =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고 있어 좋았다.
왠만하면 새것으로 만 체인지 해 놓는데 세월의 흔적을 함께 놓으니 스쳐지나치던 것도 한 번더 보게 되고 세밀이 살펴보게 되었다.
옛날 법고(古 法鼓)
목어(木魚) =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 그 밑으로 낡은 법고가 놓여 있다.
옛날 목어(古 木魚) = 과거의 자기 생을 다한 목어
운판(雲版)
명부전(冥府殿)
명부(冥府)란 사람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세계를 상징하고, 명부전에는 사후세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시왕전(十王殿)이라 부르기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주불(主佛)로 봉안되어 있어 지장전(地藏殿)이리고 부르기도 한다.
불단의 구성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앙에 두고 좌측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우측에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로 명부에 시왕들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판관(判官), 녹사(綠事), 장군(將軍)등의 존상(尊像)이 갖추어진 전각이다.
시왕은 죽은자들의 사후에 생전에 지은죄와 선행을 심판하는 10명의 판관이며,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시왕 가운데 다섯 번째 판관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 부터 49일안에 다른 세계로 태어나게 되는데 선망조상들과 부모님들이 왕생극락 하도록 천도재 및 기도를 지내고 있으며,
명부전은 살아있는 후손과 조상을 위하여 부처님전에 복을 발원하는 전각이다.
시왕전(十王殿)의 시왕들
중앙에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좌측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우측에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전(十王殿)의 시왕들
봉송각(奉送閣)
이곳 천년고찰 봉미산 신륵사에 조성된 봉송각(奉送閣)과 소대(燒臺)는 신륵사를 찾아주신 많은 분들께서 석탑앞에 놓인 소래에 지극한 정성을
담아 남겨주신 동전을 10여성상(星霜) 모은 것과 배(박)영애, 정영순 보살의 시주로 조성된 불사입니다.
이곳은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시는 영가님들을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殿閣) 입니다.
이 불사에 동참하신 모든 분들의 공덕이 일체의 중생에 널리 퍼져 극락세계에 환생하고 무량수불에 수기를 받고 불도를 닦아 성불하여지이다.
봉송소(奉送疏)
문밖에 나와서 전송하니 오늘 천도 받은 영가시여
아울러 함께 오신 여러 영가시여!
지금까지 시식하고 독경을 하며, 일념으로 염불공덕 갖추었으니,
집착했던 망념들을 여의였는가?
여의였다면 천당, 극락 뜻대로 가소 여의지 못했으면 또 들으시라.
사대를 바라보니 꿈속과 같고 육신이며, 알음알이 본래 공이라
부처와 조사의 뜻 알려하는가?
서산에 해지고 동산에 달이 뜨네.
원왕생 원왕생 연화장세계 태어나서 모두 함께 불도 이루어지이다.
봉송각(奉送閣) 의 지장보살과 그 의 권속들인 시왕들
다층석탑(多層石塔)과 옆 건물은 종무소
심검당(尋劍堂)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이란 독성(獨聖)과 산신(山神)과 칠성(七星)을 함께 모시는 전각(殿閣)을 말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독성(獨聖)은 율장인『십송율』에 내용이 자세히 전하는데 부처님 당시에 빈두로존자가 인간세계에 보이지 않아야 할 신통을 보여준이유로
부처님의 회상에서 추방 되어 동쪽으로 가서 불법을 수행 · 포교하였던 내용을 한국 불교에서 수용하여, 한국에서 나반존자(那畔尊子)라고 일컫는다.
천이백 아라한 가운데 한분이시며 신통력이 매우 뛰어났던 성자(聖子)로 말세중생(末世衆生)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산신(山神)은 한국의 토속神인 산신령이 불교에수용되어 호법신(護法神)이라는 인격성이 부여되었고 호랑이를 산신 자신이나 시자(侍子)로
표현하고 있으며 화엄성중 104위 중 71위 신장으로 복을 비는 중생들에게 작복(作福)의 인연을 맺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유행경』에서 부처님이 혜안(慧眼)으로 살펴보니 산신들의 능력에 따라 좋고 나쁜지역을 서로 나누어 자신이 거주하는영토를 지배하며
존재하고 있다고 전한다.
칠성(七星)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속신앙으로 명(命)줄을 관장한다고 믿어 가족들의 수명장수(壽命長壽)와 자손창성(子孫昌盛)을 구하는
神으로 일반적으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라고 일컫고 있고, 일광(日光) · 월광보살(月光菩薩)을 협시보살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 두보살은 본래는 약사여래부처님의 좌우 협시보살이므로, 옛날에는 질병과 가난에 많은 고통을 겪었으므로 이를 극복하고자
약사여래부처님을 칠성으로 대치하는 신앙으로 발전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삼성신앙은 한국불교의 특색에 맞게 발전 융화된 한국적 불교 신앙이라 볼 수 있다.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가 모셔진 칠성단
토속神인 산신(山神) 호법신(護法神)이라고도 한다.
독성(獨聖)인 나반존자(那畔尊子)
요사채
요사채로 들어가는 문
◈세종의 능침사찰◈
1440년(세종 22) 신륵사를 중수하였다. 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면서 태종의 장인으로서 태종이 왕에 등극하기 전의 사부였던
어은(漁隱)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 1339~1408)의 영정을 신륵사에 두었던 것으로 인해서였다.
당시 신륵사의 어떤 건물을 어느 정도 중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세종은 신륵사를 중수한 지 7년 후인 1447년에,
"여흥 신륵사에는 문도공(文度公)의 영정을 모셨는데 의지 없는 잡된 승려들이 잘 수호하지 못하여 형편없이 되었다기에
이제 전라도 장성 백양사의 승려 학몽(學夢)을 들어가 살게 하였으니 잘 접대하여 주어라." 는 명을 내렸다(세종실록 권117 세종29년 7월 9일).
여흥부원군 민제는 시호가 문도(文度)로 그의 집안은 고려후기 권문세족으로 태종대에 이르러서는 민제의 두 아들인 민무휼(閔無恤) · 민무회(閔無悔)의
형제가 외척 제거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기고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대사찰로 일신하게 된다.
영릉은 본래 광주 대모산(大母山)에 있었는데 예종(1468∼1469)이 즉위하면서 풍수지리상으로 지세가 불길하다고 하여 1469년(예종 2)
세종대왕과 그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을 여주 영릉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보은사기(報恩寺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성화(成化) 5년 기축(己丑, 1469)에 세종 재궁(梓宮)을 여주에 옮겨 능사지내는 일이 끝나자 대왕대비 전하께서 분부하시기를,
"선왕께서 부왕을 꿈에 보시고 장차 영릉 밑에 절을 세우려 하시었으나 갑자기 승하 하시어 문득 신민(臣民)을 버리셨으므로
절을 경영할 겨를이 없었더니, 이제 선왕이 하늘에 계시는데 우리들이 빨리 유지(遺志)를 거행하지 않으면 어찌 장차 선왕을 지하에서 뵈올 것인가."
하였다. 곧 한명회(韓明會)와 한계희(韓繼禧) 등에게 명하여 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을 세울 만한 곳을 택하게 하였다.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능의 경내에는 절을 세울 만한 곳이 없습니다. 신륵사는 일명 벽절로 옛 현인들이 놀던 자취가 완연하고,
또 선왕의 능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종과 북소리가 들릴 만하옵니다.
만일 이것을 수리하면 옛것을 새롭게 만드는데 일은 반절이고 공은 갑절이나 될 것이니 이보다 편리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세종의 능인 영릉 옆에 원찰로서 절을 짓고자 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서 신륵사를 중수하고 원찰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명회와 한계희를 제조(提調)로 삼고 여주목사 이신효(李愼孝), 원주목사 김춘경(金春卿), 내시부상선(內侍府尙膳) 이지효(李智孝)를
감역관(監役官)으로 삼아 1472년(성종 3) 2월부터 10월까지 200여 칸의 건물을 신축하였고 그밖에
종루의 북에서 일용품까지 모두 새로 만드는 대불사가 이루어졌다.
이 때의 중창으로 우리 국가는 억만년의 가히 없는 기업을 열었으며 이에 부(府)가 승격하여 주(州)가 되고 절도 일신되었다고 한다.
신륵사를 중수한 이듬해인 1473년(성종 4)에 정희왕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 고치고 호조에게 명을 내려
보련사(寶連寺) 토지 140결과 삼각산 장의사(藏義寺) 토지 100결을 신륵사에 보시하였다.
이것은 1424년(세종 6) 4월 전국의 사찰을 36개 선 · 교종사찰로 삼았을 때, 비록 신륵사가 36개의 사찰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1개의 사찰이 받은 토지는 평균 220결이고, 선?교종의 중심사찰이 각기 250결의 토지를 받은 것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음을 알게 해준다.
조선 중종 때에는 청계사. 용문사와 더불어 신륵사의 승려들을 장인(匠人)에 종사시키는 것을 혁파하자는 간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륵사를 보은사로 개명한 정희왕후(貞喜王后, 1418∼1483)는 세조의 왕비로 예종(1468∼1469)이 어린 나이인 14세에 왕위에 오르자
7년 동안 섭정을 하였다. 정희왕후는 신륵사를 짓는데 백성의 노고와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불경간행을 위해 두었던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없애고
여기서 사용하던 전곡으로 충당하게 하였다.
노는 사람에게 역사시켜 보수를 주게 하고 혹시라도 폐가 없도록 명을 내렸다.
조선 중후기의 신륵사
중종 때도 절의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때마침 황해도 지방에 가뭄과 흉년이 해마다 들어 공사의 중지를 요청하는 상소가 있었다.이 때의 일을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신륵사를 중수한다는데 요새 가뭄이라 흉년이 해마다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득이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륵사는 서울에서 가까운 곳인데도 승려의 횡포가 저렇게 심한데 더구나 먼 지방의 주, 군에 있어서야 금령에도 해이한 판에
무엇을 꺼려 난동을 부리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을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앞으로 대낮에 대도시 중심가에서 강탈 · 살인하는 변란이 일어난다 해도 끝내 막지 못할 것입니다.
(중종실록 권88 중종 33년 9월 19일조)
이러한 형세는 호남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전국적인 승려들의 저항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배불의 상황에서 신륵사는 유생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많이 남아있는 신륵사와 여강을 찬미한 시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적이 여주에 이르자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가
신륵사에 군사를 주둔시켜 뱃길을 끊고 적이 건너가지 못하게 했던 사실(연려실기술(練藜 室記述) 권15 ?선조조고사본말?조) 등은
신륵사의 지리적위치때문이었다.
또한 서울에서 가깝기 때문에 신륵사는 유생들이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니,
성현(成俔, 1439~1504)의 수필집인 용재총화(?齋叢話) 권9에는 젊은이들이
여흥 신륵사에서 글을 읽고 학업에 게을리 하지 않다가 서울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1671년(현종 12)에 계헌(戒軒) 대사가 중수하였는데,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서 1702년(숙종 28)에 오대산 승려 위학(偉學)이 천심(天心)?우안(宇眼) 등과 시주하여 중수하였다.
1725년(영조 1)에는 법밀(法密)·영순(英淳) 등이 동대탑(東臺塔)을 중수하였다.
1796년(정조 20)에는 공명승첩(空名僧帖) 250장으로 금강산 표훈사와 신륵사를 보수하도록 했다.
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에 의하면 이때 주지 도간(道侃) 등이 범중루(泛中樓) 12칸과 좌우 식간(食間)을 신축하였다고 한다.
그 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발원에 의하여 호조판서 김병기(金炳驥)에게 명하여 장불전(藏佛殿), 선료(禪寮), 종루(鍾樓),
향주(香廚)를 중수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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