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경허 선사의 처절한 토굴수행과 깨침의 순간
1846년 8월 24일 전북 전주시 자동리에서 출생한 경허(鏡虛ㆍ1849∼1912) 스님의 속명은 송동욱이다. 54년 관악산 청계사에서 출가했으며 59년부터 공주 동학사에서 경학을 공부해, 68년에 동학사 강사가 되었다. 경허 스님은 20대 후반에 이미, 불교의 경ㆍ율ㆍ론(經律論) 삼장(三藏)에 정통하고 유학과 노장까지 두루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는 당대의 대강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강사로서의 삶은 그의 출가수행의 도입부에 불과했다.
1879년, 옛 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조도를 찾아 삼계를 벗어나리라”고 다짐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오는 길에 경허 스님의 머리 속에 문득 한 가지 의문, 한 마디의 공안이 떠올랐다. 바로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의 화두였다.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니, 이게 무슨 도리일까. 의문은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처럼 자꾸 커졌다. 권상로의 『한국선종약사』에는 경허 스님이 의심에 싸여 ‘가면서도 가는 줄 모르고 앉으면서도 앉는 줄 모르게’ 동학사까지 갔다고 기록했다. 그것은 경허 스님의 출가수행의 결정적인 전기였다.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는 8세기 중국 위앙종의 대선사 영운지근(靈雲志勤ㆍ771~853) 스님에게서 비롯됐다. 영운 선사는 30년간 반야의 검을 찾아 방황하다 대오를 이룬 선의 검객으로 그의 원력은 오늘날까지 심검당(尋劍堂)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선찰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이 화두가 탄생된 장면은 『전등록』에 나온다.
어느 때 한 수좌가 영운 선사에게 물었다.
“불교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나귀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
경허 스님의 제자인 한암 스님은 「경허행장」에서 이 화두를 여년(驢年: 당나귀 해)이라는 선어를 통해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당나귀 해란 돌아오는 기한이 없음을 이른다. 12간지 가운데 여년이라는 이름이 없는 까닭에 만날 기한이 없음에 비유한 것이다.” 즉 당나귀 해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당나귀의 일’은 ‘비실재’를 뜻한다. 이에 반해 ‘말의 일’은 실재하는 현재이며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은 삶과 죽음, 유(有)와 공(空)을 각각 상징한다. 한편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은 나날이 쌓이고 쌓인 가지가지 일상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나귀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말은 ‘이 일 저 일이 뒤를 이어 쌓여 있다’는 뜻도 되고 ‘끝이 없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또 ‘그저 그런 일’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어디까지나 알음알이에 불과한 추측이며, 수행자 자신이 화두의 귀결처를 깨닫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동학사로 돌아 온 경허 스님은 스승 만화 스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신발을 신은 채 조실 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렸다. 다시 일어난 후에는 자신이 가르치던 여러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그리고는 깨닫기 전에는 결코 조실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방으로 들어간 경허 스님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몸을 꼿꼿이 해 앉았다. 조실방 한 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하루 한 끼 공양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만을 내었다. 그리고 안에서 문을 폐쇄하고, 결가부좌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상상을 초월하는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경허 스님은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를 전심전력으로 참구하며, 밤에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이와 같이 3개월동안 처절한 수행을 하였다. 바위처럼 앉아있는 경허 스님의 모습은 송곳과 칼에 찔려 상처두성이 인데다 피까지 흘러내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오직 눈만 별처럼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360 골절과 8만4천 털구멍으로 온몸에 한 개의 의심 덩어리를 일으켜 주야로 화두를 참구해 들어갔다.화두를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 이 물 찾듯이 늙은 과부가 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하듯 간절하게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를 참구했다.
생사 두 글자를 이마에 붙여두고 숙맥같이 바보천치같이 소경같이, 벙어리 같이, 불이 눈썹을 태우듯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밤낮으로 용맹정진하여 3개월쯤 되자 수마가 물러가고 혼침과 산란심이 끊어지고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아니하여 화두를 들지 않아도 화두가 현전하였다. 종일토록 화두가 순일무잡하고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꿈속에서도 또한 화두가 들리게 되었다. 이튿날 눈을 뜨면 어젯밤에 들고 자던 화두가 그대로 들려져 있으면 큰 깨달음이 가까운 것이다. 대혜종고 스님이 『서장』에서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서 겨우 힘을 덜게 됨은 깨달음이 문득 힘을 얻는 곳”이라고 했듯이 꿈속에서도 저절로 화두가 들리는 득력의 경계를 얻은 것이다.
경허 스님이 조실방에서 꼼짝도 않고 용맹정진한지 석 달이 지났다. 동짓달 보름께였다. 그때 동은(東隱)이라는 사미승이 스님의 시봉을 들고 있었다. 동학사 밑에사는 동은 사미승의 부친은 여러 해 동안 좌선하여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이 처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만화 스님의 제자이자 경허 스님의 사형인 학명(學明) 스님이 이 처사를 찾아갔다. 찾아간 학명 스님을 보고 이 처사가 말했다.
“요새 동욱(경허 스님) 대사는 뭘하나?”
“그저 방안에서 소처럼 앉아 있습니다.”
“중노릇 잘못하면 소되는 이치를 아는가?”
“그거야 공부를 하지 않고 공양만 받아 먹으면 소밖에 될 게 있습니까?”
“거 대답 한번 잘못했네. 중노릇을 그만큼 하고 겨우 대답을 그렇게 밖에 못한단 말인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선리(禪理)는 모릅니다.”
학명 스님은 당시 참선 보다는 총무 소임을 보며 사무를 보기에 바빴었다.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으면 되는 게지.”
동학사로 돌아 온 학명 스님은 그 이야기를 이 처사의 아들인 동은 사미승에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셨는데, 너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그 이야기를 들은 동은 사미승은 경허 스님이 참선하는 바로 옆방에서 다른 사미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물었다.
“너네들, 중노릇 잘못하면 소가 되는 이치를 아니?”
“소가 되는 이치가 뭔데?”
“글쎄, 그게 뭘까?”
“야, 소가 돼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으면 된단 말야.”
동은 사미승은 커다랗게 말했다. 그런데 어린 사미승의 그 말이 참선중인 경허 스님의 뒤통수를 ‘꽝’하고 때렸다. 눈앞의 땅이 쫙 갈라졌다. 가슴과 마음이 활짝 트이고 ‘1백20근의 짐짝을 내려놓는 것처럼’ 어깨가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경허집』에는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말 한 마디에 스님은 대지가 그냥 내려앉았으며, 만물과 나를 함께 잊고 온갖 법문의 끝없는 오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풀렸는데, 때는 기묘년(1879) 겨울 11월 보름께였다”고 했다.
토굴의 꽉막힌 벽처럼 그를 가두었던 미망의 그물이 산산조각 나면서 경허 스님은 이제 당나귀와 말의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이 없는 ‘콧구멍 없는 소’가 된 것이다. 고삐를 꾈 콧구멍이 없는 소는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일이 없다. 그 자신이 바로 바로 자유와 해탈 자체가 된 것이다. 경허 스님이 절집의 관례를 깨고 스스로 법명을 깨달은 소, 즉 ‘성우(惺牛)’라고 지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님은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당시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忽聞人語無鼻孔]
온 우주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頓覺三千是我家]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六月燕岩山下路]
일없는 시골사람들이 태평가를 부르네[野人無事太平歌].
1880년 봄, 경허 스님은 천장암으로 수행처를 옮겨, 깨달은 뒤에 닦음 없이 닦는 보임(保任)공부에 들어간다. 지고 온 바랑에서 옷 한 벌을 내오 솜을 넣어 두툼한 누더기 한 벌을 손수 지어 입고, 곧바로 쪽방으로 들어가 이듬해 6월까지 1년여 동안 상상조차 어려운 보임을 시작한 것이다. 1년여 기간을 단 한번도 눕지 않고 장좌불와 했으며, 공양을 들거나 대소변을 보는 일 외에는 바위처럼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1년이 넘도록 세수도 하지 않고 몸도 씻지 않고 오직 솜으로 누빈 누더기 한 벌만 입은 채 보냈기에 누더기 옷과 온 몸에는 싸락눈이 내린 것처럼 이가 들끓었다.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마치 두부를 찐 비지를 온몸에 문질러 놓은 듯이 허옇게 들끓었다. 이들의 놀라운 번식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건만 경허 스님은 한 번도 긁는다거나 가렵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한암 스님은 『한암일발록』에서 스승의 처절한 오후보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장암에 주석하실 때에 누더기 한 벌로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바꾸어 입지 않으니, 모기가 물고 이가 옷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물려 피부가 헐어도 적연히 움직이지 않음이 산악과 같으며, (중략) 도가 응집된 경지가 아니면 누가 이와 같겠는가.”
경허 스님은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 이처럼 한결같이 용맹정진을 했다. 실로 천고(千古)의 모범이요 만대(萬代)의 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허 스님은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그 당시 일반인들이 보기에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마을의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관습과 온갖 고정관념의 틀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독특한 기행(奇行)과 함께 경허 스님은 활발한 선문답과 법문, 행동으로 선(禪)의 생활화,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간화선의 중흥조로 평가받고 있다. 스님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문하에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 처럼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들 중 대부분은 경허 스님의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스님이 끼친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선승들이 선을 어록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오던 시대에 선을 일상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명목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조선시대의 선풍을 다시 진작시켰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스님은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 강계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