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스님의 참회
=염화미소=
심지스님의 참회
진표율사의 참회불교 전통을 이은 분은 영심(永深) 스님입니다.
영심스님은 속리산에서 수도하고 있다가 미륵보살로부터 수기(授記)를 받은 진표율사가 계법
(戒法)을 선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융종(融宗) * 불타(佛 陀) 등과 함께 진표율사를 찾아가서
계법을 전수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진표율사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영심 등은 복숭아나무 위로 올라가서 거꾸로 땅에 떨어지며 참회했습니다.
곧 망신참(亡身懺)을 행한 것입니다.
이에 진표율사는 그들에게 법을 전하고 관정(灌頂)을 베풀었으며, 영심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미륵진성(彌勒眞性) 제9간자(簡子)와 제8간자,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주면서 속리산으로 돌아가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절을 세울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영심스님은 가르침대로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에 길상사(吉祥寺:법주사)를 세우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습니다.
한편 어릴 때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으며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던 심지(心地)는
15세에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부지런히 불도를 닦았습니다.
그뒤 중악(中岳:八公山)에 머무르고 있을 때 속리산의 영심스님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이어받아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지만,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여를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마당에서 참회하고 예배를 올렸습니다.
7일째 되던 날 큰 눈이 내렸는데, 스님의 주위 10자 가량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승려들이 심지스님께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예배할 것을 청하였으나,
병이라 핑계한 뒤 머물던 방으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예배를 계속했습니다.
이때 스님의 팔뚝과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지만, 스님은 예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장보살이 매일 스님을 찾아와서 위문하였다고 합니다.
법회가 끝나자 스님은 다시 중악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보니 옷섶 사이에 미륵보살의 두 간자가 끼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법주사로 되돌아가 이 사실을 밝혔으나, 영심스님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간자는 함 속에 있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함을 조사해 본 영심스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함은 봉한 그대로 있었으나 열어 보니
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심스님은 매우 기이하게 여기면서 이번에는 간자를 첩첩이 싸서 간직했습니다.
심지스님은 또 가다가 보니 먼저와 같이 간자가 있었으므로 다시 되돌아가 돌려주었습니다.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그 뜻을 받들어라."
이렇게 말하고 영심스님은 심지스님에게 간자를 주면서
스님이 간자를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가자 중악의 산신이 두 선자(仙子)를 데리고 마중을 나왔고,
심지스님께 삼가 정계(正戒)를 줄 것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계를 주고 말했습니다.
"이제 땅을 택하여 신성한 간자를 봉안하려 하노라.
그러나 우리가 터를 지정할 수는 없으니,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간자를 던져 점지를 받도록 하자."
그들이 산꼭대기로 올라가 서쪽을 향해 간자를 던지자, 간자는 바람을 타고 날아갔고
산신은 이를 뒤쫓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바위가 멀리 물러가니 평탄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땅이 깨끗하도다
불골간자를 찾아
정결한 곳에 봉안하고 치성할지어다
애巖遠退砥平兮 (애: 막을/그칠)
落葉飛散生明兮
覓得佛骨簡子兮
邀於淨處投誠兮
이 노래를 부르고 산신은 간자를 임천(林泉) 속에서 찾아내었습니다.
스님은 그곳에 법당을 짓고 간자를 안치한 다음 몸을 잊고 참회하는 망신참(亡身懺)의 불교와
점찰법을 널리 퍼뜨렸던 것입니다.
스님이 간자를 보관한 곳은 지금의 대구 동화사(桐華寺) 참당이라고 하며,
그 연대는 흥덕왕 7년인 832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불사(佛事).
그 중생을 부처되는 길로 인도하는 참회불교를 유포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여 큰 개달음을 얻은 참회불교를 통하여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