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원사
전북 완주 모악산 줄기에 있는 대원사는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다.
진묵대사가 20여년간 수행했던 사찰로, 대원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곳에 자리한 진묵대사의 부도나
대웅전에 모셔진 진영에서 스님의 법향을 느낄수있다.
대원사는 증산교의 상제인 강일순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다가 1901년 도를 이루었다고하여
증산교의 성지로도 추앙되고 있다.
대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이번 화전축제 때에 대웅전 왼편에 보이는 적묵당의 현판식이 있었다.
어스푸레한 어둠이 내리는 산사에서 굼불을 지피니
피어오는는 연기가 아련한 추억으 떠올리게 한다.
화전축제에 참가했던 일행들과 묵었던 방이 안쪽으로 첫번째 방 이다.
사사자 오층석탑 사이로 보이는 대웅전
고향이 완주임에도 이제야 들른 모악산의 대원사는
작고 아담한 마당에 절집을 휘~둘러싸고 있는 흐드러진 벗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절로 탄성이 나왔다.
대원사에는 석가여래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진묵스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신통술이 아니라 불도를 깨우치지 못한 대중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스님의 방편이었다.
조선중기의 고승 호는 진묵(震默). 전라도 萬頃懸 佛居村 출신. 태어난 뒤 3년 동안 초목이 말라 시들었고,
비린내가 나는 음식과 마늘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지혜롭고 자비로워서 사람들이 "불거촌에 부처님 났다." 고 하였다.
7세에 출가하여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불경을 읽었는데, 한 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내용을 통달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 또한
봉서사 주지는 어린 진묵에게 아침저녁으로 신중단(神衆檀)에 소향예배(燒香禮拜)하는 소임을 맡겼다. 그런데 어느 날 신중(神衆)들이
그 주지 승에게 현몽하여 이르기를 "우리 소신(小神)들이 어찌 감히 불(佛)의 예를 받겠는가 ! 원컨대, 다시는 아침저녁으로
소향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일생을 통하여 수많은 신이(神異)를 남겼지만, 그 생애는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의 고승 초의(草衣)가 지은
<진묵조사유적고 震默祖師遺蹟攷>에는 18가지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사미 시절 창원의 마상포(馬上浦)를 지나갈 때 한 동녀(童女)가 사랑을 느꼈으나 따를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죽어서 남자가 된 뒤 다시 전주 대원사(大元寺)에서 만나 기춘(奇春)이라는 시동이 되었다.
대사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는데 이것을 대중들이 비난하였다.
대사는 그것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 : 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떠난 삼매행)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 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바루를 펴게 한 뒤 기춘으로 하여금 바늘 한 개 씩을 각자의 바루 속에 넣어 주게 하니,
대사의 바루 속 바늘은 국수로 변하여 바루를 가득 채웠으나, 다른 승려들의 바루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이 있었다.
늙은 어머니를 왜막촌(倭幕村)에서 봉양하고 있을 때, 여름 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 한 뒤로는 이 촌락에 영영 모기가 없어졌으며 어머니가 죽자 제문을 지어 위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