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딱 하나뿐인 한옥 성당, 익산 나바위 성당, 십자가의 길

백련암 2011. 4. 20. 19:54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나바위 성당(화산천주교회)

 

100년이 넘은 나바위성당은 1906년 순수 한옥 목조건물로 지어진 후 1916년까지 증축을 거듭하면서 한·양 절충식 건물로 형태가 바뀌었다.

나바위성당은 이 독특한 건축 양식 때문에 1987년 7월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조선 현종 11년(1845년)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와 함께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성당을 소개하기에 앞서 화산 나바위가 한국천주교회 성지로 자리잡게 된 연유를 살펴보자.*

 

화산 나바위가 한국천주교회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845년<현종 11년> 10월 12일이다.

이날 밤 8시경 전라도 강경 황산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5세의 어린나이로 고국을 떠나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입국, 첫발을 내딛는다.  상해를 출발한지 42일만이었다.

 

김 신부 일행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다블뤼 신부, 그리고 김 신부 사제서품식에 참석했던 조선 신자들이었다.

이들이 타고 온 배는 김 신부가 명명한 '라파엘호'였다. 아마도 라파엘호는 이날 김 신부 일행을 나바위에 무사히 올려놓고 운명을 다했을 것이다.

 

만약 주민들이 낯선 배가 포구도 아닌 곳에 정박해 있는 것을 목격했다면 분명히 관가에 신고를 했을 것이기에 김 신부 일행이 스스로 라파엘호를 침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추리일 뿐 라파엘호의 운명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로부터 1년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했던 김대건신부를 기리기위해1897년 요셉 베르모렐(한국명 장약실) 신부에 의해 이곳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졌다

 
김 신부 일행은 현지 신자 도움으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 상복을 입혀 상주로 변장시킨 후 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지샌 후 곧바로 상경했다.
 
현재 행정구역상 전북 익산시에 속하는 '나바위'는 조선시대 당시에는 은진군 강경현에 속해 있었다. 강경에는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알리던 봉화대가 있었다.  또 뱃길로 실어 나르던 정부미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서 '나암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강경 지방 첫 가톨릭 신자는 이중필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1800년 서울 벽동에 사는 정광수(바르나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세례를 받았다.

강경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한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진 시기는 1839년 기해박해 때다.

 

베르모렐 신부는 화산과 산에 딸린 농경지를 당시 돈 4000원에 매입, 성당 부지로 정했다. 그는 참혹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는 신자들을 보고, 형편이 허락하는 한 많은 대지와 전답을 사들여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농토나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빌려줄 작정이었다. 그때 심정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농토가 없는 사람들은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를 지을 수만 있어도 큰 행복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돈이 있다면 논을 사서 외교인 틈에서 외롭게 사는 신자들을 이주시켜 좋은 신자 부락을 만들고 싶다. 배고픈 조선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그들을 신자로 만들고 싶다."
 
베르모렐 신부의 이러한 태도에 감동한 주민들은 집단으로 개종해 본당이 세워지자마자 어른 87명이 세례를 받았다.
 
베르모렐 신부는 1905년 성당 건축을 계획하고 약현성당(현 서울 중림동성당)과 용산신학교를 설계했던 프와넬 신부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1906년 설계가 완성되자 곧바로 착공에 들어간 베르모렐 신부는 나바위에서 약 30리 떨어진 임천군 가하면 지저동 뒷산을 1000냥 100푼을 주고 매입,

곧게 뻗은 소나무들을 베어 뗏목으로 운반해 건축 목재로 사용했다.

 
성당 공사를 중국인 기술자들이 맡아 했으나 본당 신자들도 한 몸이 되어 터 다지기와 목재 운반 등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신자들은 또 하루 밥 한끼 먹기도 힘든 궁핍한 삶에도 성의껏 성당 건립기금을 내놓았다. 이렇게 나바위성당은 가난한 신자들 헌금과 노력 봉사, 희생 위에 세워졌다.
 
1907년 12월 완공된 나바위성당은 순수 한옥 목조 건물로 지어졌다. 흙벽 기와지붕에 나무로 만든 종탑과 마루바닥이 전부였지만 베르모렐 신부와 신자들의 기쁨과 긍지는 대단했다. 1909년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종을 종탑에 설치했고, 1911년 9월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 주례로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나바위성당은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페랑 신부와 미국 교회 도움으로 1916년 대대적 개수 증축 공사에 착수, 흙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종각을 증축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사제관

 

강당 = 바다의 별

 

=수녀원과 피정의 집=

 

강당화단에 핀 홍매화

 

=십자가의 길, 고행의 길=

순교비가 있는 언덕으로 오르는 길 예수의 고난을 돌에 새긴 열 네개의 부조가 놓여있다

천주교 박해당시 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곳임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다.

 

성모동산에서 순교비가 있는언덕으로 오르는길 에 십자가에 길을 만들어 예수의 고난을 돌에 새긴 14개 중에

첫 번째 부조 ...

 

 

 

 

 

 

 

 

 

 

성당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