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 대적광전, 대비로전, 범종루, 보경당(부처님), 구광루, 선원, 돛대 탑, 원표, 정료대. 장경각, 독성각, 명부전
법보전(法普殿)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陜川 海印寺 藏經板殿) : 국보 제52호, 시대 = 조선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普眼堂)’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脩多羅藏)’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陜川 海印寺 高麗木板) : 국보 제206호, 시대 = 고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이 목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는 달리, 지방관청이나 절에서 새긴 것이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板殿)에 보관하고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지방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판각하였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이 목판에는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과 신라·고려·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 있는데, 경전류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이다.
고려시대 판화 및 판각기술은 물론이고, 한국 불교사상 및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석가모니불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 좌상및 복장유물은 통일신라 말 혹은 고려초기에 제작된 1m가 넘는 목조불상과 이 불상이 복장한 유물
일체를 보물 제 1777호로 등재되었다. <이 곳에 계시던 비로자나불은 대비로자전으로 옮겨 놓았음>
또한 목조 비로자나불 좌상복장 전적은 법보전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반야바라밀다심경과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16~ 20권을
보물 제 1778호로 등재되었다.
대적광전 뒤편에 장경각올라가는 계단
대비로전
대적광전 = 경남 유형문화재 제 256호 조선시대
해인사 중심법당으로 해인사가 서기 802년(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順應), 이정(利貞)스님의 의해 창건 될 당시에는 비로전이라는 2층 건물이였다고 한다.
조선 1488년(성종 19년)인수대비, 인혜대비의 지원으로 학조(學祖)스님이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여러차례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817년(순조 17년)에 제월 스님이 경상관찰사 김노경(金魯敬)의 후원으로 세웠으며,1971년 지관(智冠)스님이 대폭 중수하였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며 공포는 외이출목(外二出目) 내삼출목(內三出目)의
다포식(多包式)이다. 법당 안에는 여섯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 들어서보면, 왼쪽부터 철조(鐵造)관음보살, 목조(木造)문수보살,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보현보살, 철조법기(法紀)보살이 차례로 봉안되어있다.
◎ 대적광전 목조 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 유물은 대적광전 목조불 좌상과 그 안에 있던 복장 유물을 보물 제 1779호로 지정되었다.
대적광전 목조 바로자나불 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8건 37점의 전적을 보물 제 1780호로 지정되었다<2012년 10월 31일 발표함>
정료대<대적광전 앞에 있음>
각종 행사시에 넓적한 상판 위에 관솔 등으로 불을 피우는 곳입니다.
즉 석등이 의식적인 면이 강하다면 정료대는 실용적인 면이 강하다고 할까요.
옆에 작게보이는 것은 주로 기름을 사용하여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사찰행사시 사용하던 조명은 석등과 정료대로 구분이된다.
독성각
독성님
명부전
범종루. 해인법고
해인도(법성계)
보경당 부처님
구광루 앞 해인도
선원 = 묵언정진
해인사 수미 정상탑 = 높이 약 14미터, 8각7층석탑
장경각 뒤쪽에 있는 이탑은 원래 돛대바위라 불리워지던 거대한 바위가 있었던 곳에 그 무게만큼의 탑을 다시 세운 것이다.
해인사 지형이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 바위의 역할이 중요함을 감안하여 1986년에 다시 세웠다.
= 삼층 비로탑<정중탑>= 경남 무형문화대 제 254호 통일신라시대
대적광전 아랫쪽에 위치한 것으로 탑은 3층 기단<基檀>위에는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니다.
원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시에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
위층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다.
또한 각 지붕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 머리장식받침), 보륜(寶輪, 수레바퀴모양 장식),
보주(寶珠 구슬모양 장식) 등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기둥 조각을 하나만 두는등 각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석등 = 경남 우형문화대 제 255호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앞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석등으로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높직한 4각바닥돌은 한 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그위의 아래받침돌은 6cm 가량 층을 둔 다음 8잎의 연꽃무늬를 두었다.
가운데 기둥은 후대에 와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옛모습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모습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8각 화사석은 4면에 4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기고 나머지 4면에 창을 뚫었다.
지붕돌도 역시 8각으로, 경사면이 움푹하여 처마도 곡선처리 되었다.
꼭대기에는 몇개의 보주(寶珠, 작은 공모양 장식)가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양식이다.
원표
원표는 오늘날의 이정표와 같은 것이다. 현재 전면에는 해인사에서 거창과 진주간의 거리가 나와 있다.
당시에는 장생표라 하여 거리를 표시하던 것이 점차 장승으로 역할이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입구에 세우던 장승이 바로 도로표지에서 시작된것이고 일제시대 현대식 거리 축정법이 나오면서
원표 또는 도로 원표가 도청 소재지 등에설치되어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