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큰 스님들 = 대 선사 이야기 (2)
도선(道詵: 827년~898년)
도선(道詵: 827~898, 전라남도 영암 출생)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이다. 속성(俗姓)은 금씨이다.
도선의 사후 신라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스승을 기념하여
옥룡사(玉龍寺)에 세운 탑은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명명(命名)되었다.
고려 숙종(肅宗: 1095~1105)은 도선을 대선사(大禪寺)로 추증하고 왕사(王師)의 호를 추가하였다. 고려 인종
(仁宗: 재위 1122~1146)은 도선을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으며 고려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은 비를 세웠다.
◈생애
15세에 승려가 되어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 《대경(大經)》을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수도행각(修道行脚)에
나서서 동리산(棟裏山)의 혜철(惠撤) 대사를 찾아 소위 무설설(無說說) · 무법법(無法法)을 배워 크게 깨닫고,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계(具戒: 불교 의식)를 받았다.
도선은 운봉산에다 굴을 파고 불도를 닦고, 태백산 앞에 움막을 치고 여름을 보내면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마침내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鷄山)의 옥룡사(玉龍寺)에 자리 잡고 그곳에서 생을 마칠 목적으로 수양하였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이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궁중으로 모셔가니 도선은 왕에게 여러 가지 정신적
영향을 주었으나 얼마 후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죽을 때 제자들에게 "인연으로 와서 인연이 다하여 떠나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사상
도선의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고려 · 조선을 통하여 크게 영향을 준 학설이다.
도선의 사상은 일찍이 고려 태조 왕건(재위 918~943)의 탄생과 고려의 건설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실제 왕건의 아버지에게 집터를 정해주었다고 전해진다.
도선은 대개 중국에서 기원하여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지리소왕설 · 산천순역설 및 비보설(裨補說)을 주창하였다.
곧 지리(地理)는 곳에 따라 쇠왕이 있고 순역이 있으므로, 왕처(旺處) · 순처(順處)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처(衰處) · 역처(逆處)를
인위적으로 비보(裨補: 도와서 더하는 것)할 것을 말하여, 일종의 비기도참서(秘記圖讖書)를 남겼다.
뒷날 고려시대에 성행한 《도선비기(道詵秘記)》 등은 내용 전체가 도선의 문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사상에 연원(淵源)을 받은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비기라고 칭하는 예언서가 그의 사후로부터
세상에 유전(流轉)되어 인심을 현혹시킨 일이 많았다.
고려 태조와 같은 이도 도선의 설(說)을 고려하여 자손을 경계하는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서 절을 세우는 데
산수의 순역을 점쳐서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 것을 유훈(遺訓)하였다.
용성 큰 스님 <龍城 1864년~1940년>
용성(龍城, 1846년 ~ 1940년)은 조선 말기의 승려이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6세에 출가하여 해인사로 들어가 선종과 교종을 함께 공부하였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
다. 또한 불교를 발전시키려면 농사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함양에 화원과 과수원을 만들었으며, 북간도에도 농장을 만들었다.
저서로는 《수심론》, 《어록》 등이 있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불교 대표는 2인이었다. 용성과 용운이다.
용성은 깨달은 스님으로 한용운의 사형이었고, 용운 스님은 독립운동에 사형인 용성 스님을 끌어들이려고 그렇게 노력하였으며,
님의 침묵의 님은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간청에는 침묵한 채, 참선만 하고 앉아 있는 깨달은
사형에 대해 쓴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불교 개혁과 혁신을 실천했던 용성 스님은 1864년 5월8일(음력) 전북 장수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이 상규인 스님은 어려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 때문인지 여섯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냇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잡힌 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모두 살려주는가 하면,
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에게 고사리가 아프니 그만하자고 호소하는 등 남다른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일곱 살 무렵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해 문학적 재능까지 갖추는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열 네살 어느 밤 꿈에 부처님을 만나 정법 계승의 실천에 대한 계시를 받으면서 불교인연이 깊어졌고, 스스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다 홀로 집을 나서 산사를 찾았다. 그렇게 찾아간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은 부처님을 만난 꿈에서 본 바로 그곳이었고,
그 절 주지 혜월 스님에게 부처님이 계시할 때 범종이 진동하였다 하여
법명을 진종으로, 덕밀암이 속했던 남원의 옛 이름이 용성이라는 이유로 법호를 용성으로 받았다.
스님은 당시 출가 심경을
“전세사를 잊지 아니하고/ 꿈 가운데 부처가 수기하였도다/ 덕밀암에 출가하니/ 그 부처가 꿈에 친견한 부처로다”라고
읊기도 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을 만나 가슴에 새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부친에게 이끌려 다시 집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1879년 열여섯에 재출가를 단행,
해인사 극락암에서 정식으로 출가득도한 후 수개월간 기본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고운사에서 9개월 동안 수월 스님에게 전해 받은 주력수행을 시작했고, 3년여 동안 주력수행에 몰두하던 어느 날
문득 우주의 근원에 대한 자문자답이 홀연히 일어나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경험을 했다.
이때가 열아홉이었고 이후 본격적으로 선 수행에 입문해 4차에 걸친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확철대오할 수 있었다.
스님은 이처럼 선사였음에도 오늘날엔 ‘불경 번역의 창시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 인연은 1905년 철원 보개산의 관음전이 낡아 증축할 때 틈틈이 ‘선문요지’를 저술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
이미 확철대오한 스님이 선의 요지와 선에 이르는 내용을 가르치면서 정리한 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초의 저술임에도 기록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뿐,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스님은 1909년 어느날 또다시 꿈속에서 다시 만난 부처님께 ‘어찌하여 너는 전날의 정녕한 부촉을 잊었는가’라는
질책을 받고 꿈에서 깬 후 그 부촉의 뜻이 역경(譯經)임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지리산 칠불선원에 있었던 스님은 이때부터 역경 준비를 시작했고, 이듬해 5월부터 7월까지 두 달에 걸쳐
기념비적인 저술 ‘귀원정종’을 집필했다. 그리고 그 인연은 1919년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정열적으로
역경사업과 저술활동을 전개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스님은 이때 1년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불교의 대중화를 이루기 위해 불교사상이 담긴
경전을 민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경전으로 번역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결과제임을 절감했다.
스님은 훗날 “감옥에서 각각 자기들의 신앙하는 종교서적을 청구하여 공부하며 기도하더라.
그때에 내가 열람하여 보니 모두 조선글로 번역된 것이더라.
그것을 보고 즉시 통탄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야 이렇게 크고 큰 원력을 세운 것이다”라고 했다.
용성스님은 끝내 조선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음력 2월 24일에 대각사에서 열반하시었다.
다비식은 일본경찰의 철저한 방해와 수색 검열 등으로 제자 몇분만이 스님의 다비식을 조촐하게 치렀으며
스님의 사리탑은 경남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 산록에 세워졌다.
◎서울 대각사는 용성조사님 전법과 열반의 땅이며 3.1독립운동의 성지이다.
고암스님 (古庵 1899년 ~ 1988년)<용성스님의 제자>
1917년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제산을 은사로, 한암을 계사로 득도하였다.
1938년 내원사 천성선원에서 깨달음을 얻어 용성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으며, 고암이란 당호를 얻었다.
1967년 조계종 3대 종정에 추대된 뒤 4대·6대 종정으로 재추대되었다.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해외에 나가 포교하는 등
대중포교에 힘쓰다가 1988년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90세, 법랍 71세였다.
“좋은 책들이 굉장히 많네요.” “자네가 볼 만한 책 있거든 몇 권이건 가지고 가시게.”
열아홉에 출가한 이래 돈은 물론 책, 기타 물건 등에 이처럼 초탈했던 고암은 무소유, 무집착, 자비보살의 화현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그 덕화로 세 번이나 조계종 종정에 추대될 정도로 그 수행과 삶이 일여(一如)했던 선지식이다.
1899년 10월5일 경기 파주 적성면 식현리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열두 살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열여섯까지는 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공부해서 세간에 나가 명리를 떨치길 바라던 부모 마음과 달리
어려서부터 먼발치로 절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삶을 동경했다.
열일곱에 삼각산 도선사, 화계사를 비롯해 도봉산 망월사 등지를 찾아 자발적 행자생활을 하던 그는
18세에 용성을 만나면서 생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
종로 대각사에서 법문하던 용성의 모습을 보고 몇 달에 한 번씩 찾아 법문을 듣던 고암은 열아홉이 되면서
그 법문에 흠뻑 빠져 매일 용성의 법문을 듣기 시작했다. ‘금강경’ 법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대중들 앞에서 겁 없이 질문을 던졌다. “‘금강경’ 말씀이 모두 비어 공했다고 하는데
모든 형상이 꿈과 같다 하니 이는 어찌 함입니까?”
이때 용성은 “금강반야다”라는 한 마디를 던졌고, 어린 고암은 그 한마디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나뭇짐을 팔아 모친을 봉양하며 살던 혜능이 ‘금강경’ 읽는 소리에 심안이 열렸고 이후 수행에 매진해
중국 선종의 육조가 되었다고 하니, 고암 또한 그 근기가 보통을 넘어선 것임에 분명했다.
고암은 용성의 말에 따라 그해 해인사에서 제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동안 행자생활을 하며 익힌 덕분에 사미과를 바로
마친 고암은 이후 금강산 표훈사, 설악산 신흥사, 내원암, 의성 고운사, 통도사 보광전, 서울 정동 포교당까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공부한 끝에 마침내 22세에 사집(서장, 도서, 선요, 절요) 과정을 다 이수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향리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던 덕분에 바쁘게 다니는 고달픔 속에서도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이후 용성에게 사집을 배우는 등 끊임없이 제방 선원과 사찰을 다니면서도 경학과 좌선을 쉬지 않았다. 그 덕분에 23세에 사교,
25세에 대교과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글을 적당히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보고 또 봤다. 때문에 훗날 대중이 모르는 부분을 물으면 언제나 자상하게 일러줄 정도로
학문에도 밝을 수 있었다.
고암은 그래서 후학들에게도 언제나 좌선 수행은 물론 경전공부도 함께 할 것을 당부했다.
법륜사 선원에서 대중과 함께 살 때는 입선시간 외에 경전을 배우고자 하는 학인들에게 ‘금강경오가해’, ‘치문’, ‘초발심자경문’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참선공부만 하겠다고 우기는 스님들에게는 “선을 하더라도 선서를 볼 수 있는 기초 공부는 해야 한다”면서
책 읽기를 강조했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 제자들은 항상 네 가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불교의 교주는 석가모니불이고, 경전은 ‘금강경’이며,
신도들이 지켜야 할 계율은 십중대계이며, 일상 해야 할 일은 참선”임을 강조할 정도로 ‘금강경’ 만큼은 반드시 읽고 익히도록 했다.
또한 통일을 간절히 발원했던 고암은 ‘금강경’을 독송하는 공덕으로 금강산을 되찾을 수 있다며
독송을 위한 ‘금강경’을 새롭게 출간하기도 했다.
대의선사
만공스님(1871년 ~ 1946년)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이며,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이다.
속세의 성은 송씨로, 송만공으로도 부른다.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춘성은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1871년 3월 7일 - 전라북도 태인군 출생, 속명은 송(宋). 1895년 - 충청남도 아산 봉곡사에서 크게 깨달음
1904년 - 경허스님에게서 전법게를 받음
만공스님의 제자로는 보월, 전강, 고봉, 혜암, 춘성, 벽초, 금봉, 춘성 등이 있다. 처음으로 전법게를 전한 제자는 보월이다.
그러나 보월은 40세로 요절했다.
만해 한용운의 제자였던 춘성은 만해가 심우장에서 입적하자 그를 찾아와 그의 제자가 되어 수행한 바 있다.
1946년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고 난 스님은 거울 앞에 앉아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수고했네"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운봉성수 스님(雲峰性粹,1889~1946)
"목마를 때 샘 파려면 힘드니 지금 노력하라"
한국불교 중흥조인 경허-혜월스님의 법맥을 계승한 운봉성수(雲峰性粹,1889~1946)스님은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이
이 땅에 활짝 꽃 피도록 했다. 금강산,오대산,묘향산,지리산,백암산 등 명산명찰(名山名刹)에서 정진하며,
깨달음의 향기로 후학들에게 환희심을 안겨준 운봉스님 행장을 손(孫) 법제자 진제스님(원로의원.동화사 조실)의 증언과
<운봉선사법어집>및 비문을 참고해 정리했다.
지혜의 눈이 밝고 빈틈이 없어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했던 운봉스님에게 다른 스님들이 지어준 별명이 ‘조리운봉(調理雲峰)’이다.
그만큼 스님의 말과 행동이 여법했고, 지혜를 갖추고 있어 참선 공부를 하는 이판(理判)뿐 아니라
절집 살림을 맡아보는 사판(事判)들도 존경심을 가졌다고 한다.
운봉스님 수행일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 원적에 들 무렵 이야기다.
스님은 언제 사바와 인연을 놓을지 미리 예고했다. 오고 감이 자유로운 수좌로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생사에 자재(自在)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묘관음사에 주석하며 미질(微疾, 가벼운 질환)을 보일 때 법제자 향곡스님이 법은사와 법담을 나누었다.
“스님께서는 돌아가신 다음 어느 곳으로 나가시렵니까” “동쪽 마을 시주네 집에 물소가 되어 가리라” “그러면 소라고 불러야 합니까?
스님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풀을 먹고 싶으면 풀을 먹고 물을 먹고 싶으면 물을 먹느니라.” 법은사와 법제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스님께서 입적하시는 날은 언제 입니까” “토끼 꼬리가 빠지는 날이다.” 그렇게 법제자에게 원적에 드는 날을 전한 운봉스님은 과연
‘토끼 달 묘월(卯月)’인 2월 그믐 세연(世緣)을 다했다.
마지막 순간 제자들이 “저희는 누구를 의지합니까”라고 하자 스님은 육자배기 한곡을 부른 다음 편안히 누웠다고 한다.
또한 향곡스님이 다급하게 “스님”이라고 부르자, 운봉스님은 “나를 불러 뭣 하려는가”라며 온화한 표정으로 시적(示寂)했다.
1943년에 부산 기장의 묘관음사로 주석처를 옮긴 운봉스님은 법제자 향곡(香谷)스님에게 법을 전한 후,
1946년 4월14일(양력) 원적에 들었다. 세수 58세, 좌납(座臘) 45세였다. 상수제자 향곡스님을 비롯해 20여명의 제자를 두어,
한국불교 선맥의 새로운 중흥을 이룩했다. 운봉스님의 비는 1977년 부산 기장 묘관음사에 모셔졌다.
혜암 큰 스님 (1920년 ~ 2001년)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혜암(慧菴)스님. 혜암은 법호이고 법명은 성관(性觀)이다. 혜암스님은 1920년 3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1933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평소 한학(漢學)을 비롯해 불교경전 탐독에 남다른 정진을 보였다.
일본에서 10년간 동서양 종교와 동양철학을 공부하던 스님은 26세 되던 1945년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읽다가 발심해 출가한다.
이듬해 해인사로 출가한 혜암스님은 인곡(麟谷)스님을 은사로, 효봉(曉峰)스님을 계사로 수행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스님이 평소 강조하던 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불법(佛法)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합니다. 문이 없는 것으로 법문을 삼아라 이 말입니다. 일체 모든 법이 나지 않고
일체 모든 법이 없어지지 않으니 모든 부처님이 항상 어느 곳에든 나타납니다. 그래서 불법을 대도무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 없는 문을 타파하기 위해 모든 수행자나 재가불자는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용성(龍城)문도회장을 지낸 혜암스님은 1987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된 후 원로회의 부의장과 의장을 지냈으며
1999년에는 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됐다.
스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의 가르침을 강조했다. 청정수행자로서 살아가는데 기초가 되는 가르침으로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많이 먹지 말라”, “남을 도와라”, “감투를 맡지 말라”, “일의일발(一依一鉢)로 살아라.”
스님은 그렇게 평생을 올곧은 수좌의 모습으로 정진하다가 2001년 12월31일 오전 10시23분 세납 82세, 법랍 56세로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후학들에게 “인과가 역연하니 참선 잘하라”고 당부한 후
“아신본비유(我身本非有) 심역무소주(心亦無所住) 철우함월주(鐵牛含月走) 석사대효후(石獅大哮吼).” 즉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혜암 스님이 입적한 후 미소굴에는 스님의 유물로 주장자, 안경, 회중시계, 돋보기, 그리고 ‘금강경’ 한 권이 있을 뿐이었다.
성철(性徹: 1912년 음력 2월 19일(양력 4월 6일)~1993년 11월 4일)
생평기광 남녀군 - 일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미천과업 과수미 -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구나!
활염아비 한만단 -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구나!
일륜토홍 괘벽산 - 한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 열반송
성철(性徹: 1912년 음력 2월 19일(양력 4월 6일)~1993년 11월 4일)은 대한민국의 승려이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고 아호는 퇴옹(退翁)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선불교 전통을 대표하는 수행승이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했다.
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東山) 대종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화상을 계사(戒師)로 보살계· 비구계를 받았고, 그 뒤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 등과 함께 수행하며 부처답게 살 것을 결사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리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
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 · 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성철에 따르면, 앎과 행동이 일치된 단계의 앎만이 진정한 앎이며,
지눌의 돈오점수는 이론적 앎일 뿐 참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인생의 가르침을 폈으며, 성철은 수행승을 대상으로 했다.
《육조단경(六組檀經)》, 《전등록(傳燈錄)》 등 선문의 조사 어록을 중심으로 많은 법어를 이루었는데, 관념의 도그마에 빠지지 말 것과
견성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1993년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 《돈오입도요문강설》(1986) 등이 있다.
성철의 유명한 법어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수행하는 사람이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로 보이는 혼돈을 겪게 되지만, 깨달음의 수준이 자라면서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는
즉, 만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지혜(반야 · 보리)를 갖게 된다는 법어이다.
경봉선사(1892∼1982)
경봉(1892∼1982) 김용국으로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님은 근세에 가장 존경받는 선승 가운데 한 분이셨다.
스님은 시·서·화 삼절에, 선과 차까지 두루 갖춰 오절(五絶)로 불렸다.
사찰에서 화장실을 지칭하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1982년 7월 17일 시자가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라고 여쭈니 스님은 웃으시며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세수 91세, 법랍 75세로 열반에 들었다.
올해는 바로 스님 열반 30주기,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경봉 선사 열반 30주기 특별전-삼소굴(三笑窟)'을 열었다. 열다섯 살에 출가한 스님은
1935년과 1949년 두 차례 통도사 주지를 지낸 바 있다.
극락암 '삼소굴'은 경봉 스님이 50여 년간 거처한 방문 앞에 내건 현판 이름이다.
탄성스님(1928년 ~ 2000년)
산빛도 인아의 모습이요
流水是非聲
흐르는 물도 시비의 소리로다
山色水聲離
산빛도 물소리도 떠난 곳에
聾啞居平生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평생을 살리라
탄허선사1913년 1월 15일(전북 김제시) ~ 1983년 6월 5일 (향년 70세)
탄허(呑虛 1913년 음력 1월 15일 ~ 1983년)는 한국의 승려이다.
본관은 경주, 법명은 택성(宅成:鐸聲), 법호는 탄허(呑虛) 탄허 공식웹사이트, 속명은 김금택(金金鐸). 고전과 역경에 능통하였다.
같이 보기 율재(栗齋) 김홍규 주석 바깥 고리 탄허 ..
법문
종교를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인데 그것을 부정하면 결국 자기 부정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동양사상(東洋思想)의 견지에서 볼 때 종교는 종교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주체성(主體性)인 다시 말하면 우주와 인생의 핵심인 그 밑바탕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본지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기타의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문제는
“유치원 학생을 지도하는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우주의 주체가 무엇인지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우주의 주체는 우주가 아닙니다.
우주의 주체는 우주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시공(時空)이 끊어진 자리이지요.
왜 시공(時空)이 끊어졌느냐?
과거의 생각은 이미 멸(滅)했고, 미래의 생각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의 생각은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공(時空)이 끊어진 이 정신(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간밤 꿈에 일점(一點)도 안 되는 공간 위에 누워 있는 육신(肉身)이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수 만리를 거닐면서 70~80년을 삽니다.
꿈속에서 보는 우주가 현실과 다른 것이겠습니까?
여전히 산은 높고 물은 깊습니다. 불은 뜨겁고 물은 찹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보는 우주가 진(眞)이라면 꿈속에서 보는 우주도 진(眞)일 것이고,
꿈속에서 보는 우주가 헛것이라면 현실에서 보는 우주도 헛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보는 우주는 헛것이고 현실에서 보는 우주만을 진(眞)으로 여기기 때문에,
1백년도 못사는 몸으로 한없는 망상(妄想)을 좇아 내일 공동묘지에 갈지라도
오늘 부귀공명(富貴功名)을 누렸으면 합니다.
이렇게 집착하고 매달리는 것이 범부(凡夫)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