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 미륵불, 영산전, 명부전, 벽화, 미륵전, 보우당, 해수관음, 법왕루, 진여문, 일주문
미륵전 앞의 미륵대불은 높이 23m로 국내 최대의 석불상이다. 미륵대불 주변 공간은 야외 공연 및 행사의 장소로도 사용된다.
영산전(靈山殿)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영산전(靈山殿)이 나타난다. 영산전 뒷쪽은 바로 야산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말하자면
이 영산전은 북극보전과 더불어 사역(寺域)을 북쪽으로 마감하는 역할을 한다.
아담한 규모이며 현재의 건물은 1942년에 중건된 것이다.
봉은사 목 삼존불상(석가불, 가섭존자, 아난존자) (奉恩寺 木 三尊佛像(釋迦佛,迦葉尊者, 阿難尊者)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27호 시대 : 조선
영산전 삼존불(靈山殿 三尊佛)
주존불로 석가불이 있고 그 좌우를 가섭과 아난 두 존자가 협시하고 있다.
후불탱의 화기를 보면 석가여래상은 1895년에 개금하였고 나머지 두 협시상은 이 때 새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현재 봉은사 대웅전 뒤편에 소재한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불좌상과 목조가섭존자와 아난존자입상의 좌우 협시상이 삼존을 구성하고 있으며,
삼존상의 좌우에는 십육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본존석가상은 불신 좌우, 앞, 뒤로 양감이 느껴지는 체구로 무릎 폭은 체구에 비해 좁은 편이다.
세부를 살펴보면, 머리와 육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마치 투구를 쓴 것처럼 두부가 둥글게 표현되었고, 그 정상에는 정상계주를, 두부의 전면중앙에는
반원형의 중간계주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위에는 나발이 촘촘하다.
얼굴은 방형에 가까운 둥근 상호에 이마의 선이 수평하고 이목구비는 다소 평면적이며 차분한 인상을 주는데 입의 양끝이 올라간 고졸한 표현이 눈에 띤다. 어깨는 둥글고 대의는 우견편단식으로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를 감싼 대의자락이 허리안으로 들어가는 형태의,
이른바 변형식 우견편단 착의법을 나타내고 있는데, 조선후기에 흔히 보이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가슴에는 군의의 윗부분이 드러나고 양쪽 무릎에는 부채꼴로 옷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매우 도식화되었다.
오른손은 촉지인처럼 아래로 내렸고 별재로 제작하여 손목에 끼워 넣은 왼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가락을 약간 구부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는데, 이 수인은 조각승 무염이 조성한 불갑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의 본존 석가불상(1635년)을 비롯한
조선후기 석가불에서 자주 표현되는 수인이다.
본존상 좌측의 가섭존자는 머리 정상이 솟아오른 수행자의 모습으로 동안의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으며, 원령의 내의 위에 가사를 입고 복부 주변에는
요포 같은 것을 덧입었으며, 그 아래로 신대(紳帶)가 두 발 사이로 내려온다. 두손은 모아서 합장하였다.
우측의 아난존자는 삭발한 승형으로 역시 원령의 내의 위에 가사를 걸치고 군의 중앙으로 신대가 흘러내리고 있다.
삼존상의 조성시기는 영산전 후불탱화의 화기에 1895년에 개금되었다고 하므로 최초의 조성은 이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생각된다.
봉은사 영산전 석가불상은 조선후기의 불상으로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1895년에 개금된 사실이 후불 벽화의 화기에 명시되어 있으며
초성(初成)시기는 이보다 이른 18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되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영산전 후불탱(靈山殿 後佛撑)
영산전 후불탱으로 영산회상탱이 걸려 있다. 화면 가운데에 둥근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을 갖춘 석가불이 금강보좌에 앉아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이 있고, 화면 상단에는 십대제자가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석가불 양 옆에는 여섯 분의 보살이 살아 있으며 화면 맨 아래 좌우에는 설법도량의 수호신으로서의 사천왕이 자리 잡고 있다.
1895년에 조성하였다.
봉은사 십육나한도 (奉恩寺 十六羅漢圖)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38호 시대 : 조선
1895년 영산전을 건립하면서 제작, 봉안한 7폭 불화 가운데 4폭으로 16나한을 4폭으로 나누어 그렸다. 현재 영산전의 후불탱화 좌우로 각 2폭씩 걸려있는데,
16존자를 각각 독립적으로 한 존자씩 그린 후 4존자를 한 폭으로 하여 총4폭으로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중 제 10, 11, 13, 15존자도는 결실되어
1955년에 만봉(萬峰)과 석성(碩成)이 새로 그렸다.
원래 16나한도는 향우측에 홀수 존자, 향좌측에 짝수 존자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새롭게 결실된 부분을 그려 넣으면서 순서가 교란되어,
현재는 향우측 중앙에서 입구 쪽으로 제16ㆍ1ㆍ12ㆍ14존자도, 제9존자 및 새로 조성한 3존자도, 향좌측 중앙에서 입구 쪽으로 제2ㆍ4ㆍ6ㆍ8존자도,
제7ㆍ5ㆍ3존자 및 새로 그린 존자도가 배치되어 있다. 즉 향좌측 한폭 만이 원래대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존자도가 서로 뒤바뀌어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각 존자도의 왼쪽 상단에는 주지묵서(朱地墨書)로 존자명이 적혀있어 각 존자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제3존자와 4존자, 16존자 아래, 그리고 5존자와
7존자 사이 등 4군데에 화기가 남아있어 1895년에 상규(尙奎), 경선 응석(慶船 應釋), 종선(宗禪), 창민(昌玟), 성전(性㻇), 경협(景冾), 재겸(在謙),
금곡 영환(金谷 永煥), 영명 천기(永明 天機), 漢峯 瑲燁(한봉 창엽), 德月 應崙(덕월 응륜), 허곡 긍순(虛谷 亘巡), 금하 기형(錦荷 機炯),
금성 성전(錦城 性詮), 범화 윤익(梵華 潤益), 선명(善明) 등 많은 화승들이 참여하여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한들은 모두 심산유곡을 배경으로 가사 위에 장삼을 걸치거나 옷을 풀어헤친 모습으로 시자와 시동을 거느리고 앉아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선정에 들거나(제1존자) 염주를 돌리며 수행정진하고(제2존자) 웃옷을 풀어헤치고 나무에 편안히 기대어 경전을 읽기도 하며
(제4존자), 때로는 재주를 뽐내는 시동을 보며 파안대소하거나(제8존자)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기도 하며(제14존자) 무릎 사이에 지팡이를 끼고
시자의 말을 경청하는 등(제12존자)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한의 모습은 젊은 사미승 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이 대부분인데, 제3존자인 가락가발리타도존자(迦諾迦跋釐墮闍尊者)는 깡마른 체구에
두 손을 다소곳이 배 앞에 모으고 있는 모습에서 오랫동안 수행한 나한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젊은 수도승으로 표현된 나한의 얼굴에는 약하게 음영을 표현하였으며, 제8존자와 16존자처럼 노인형 나한은 주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비교적 강하게
음영을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 산속의 바위나 돗자리, 짚방석 등에 앉아 있지만, 제5존자와 제6, 제16존자처럼 병풍과 장막 등을 치고 있어 마치 실내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배경이 되는 산수는 청록산수로 조선말기 민화의 배경을 떠올리게 하는데,
산 위에 분리대처럼 일렬로 세워진 나무는 19세기 서울, 경기지역의 감로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나한도의 화승들이 감로도의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어 동일한 모티프를 사용한 듯하다.
이 불화는 심산유곡을 배경으로 시자와 시동을 거느리고 앉아있는 16명의 나한을 모두 4폭에 나누어 그린 16나한도로서 현재는 제 10, 11, 13, 15존자도가
결실되어 12폭만이 남아있다. 비록 4폭이 결실되기는 하였지만 19세기 서울·경기지역의 대표적인 화승들이 대거 참여하여 제작한 나한도이고
서울·경기지역 불화의 지역적 화풍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그리고 새로 조성된 4폭은 지정에서 제외한다. 또한 현재 이 나한도는 4폭이 결실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순서가 모두 교란이 되어 있어 원래의 순서에 맞게
재표구하여 봉안하여야 한다.
영산전 나한과 나한탱(靈山殿 羅漢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16나한을 한 폭에 세 분 또는 네 분씩 봉안하여 모두 4쪽을 그려 넣었다. 앞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봉은사 목 십육나한상 (奉恩寺 木 十六羅漢像)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28호 시대 : 조선
영산전 나한과 나한탱(靈山殿 羅漢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16나한을 한 폭에 세 분 또는 네 분씩 봉안하여 모두 4쪽을 그려 넣었다.
각 그림은 나한이 단독으로 있거나 혹은 동자가 그려지기도 하며 역시 전부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 그 앞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전체 4폭 가운데 3폭은 나한상과 마찬가지로 1895년에 그려진 것이고,
오른쪽 벽면 신중탱 옆에 걸린 한 폭은 1955년 만봉(萬峰), 석성(碩成) 스님이 그린 것이다.
봉은사 목 십육나한상 (奉恩寺 木 十六羅漢像)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28호 시대 : 조선
봉은사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십육나한상은 석가불 좌상과 가섭·아난존자 삼존상의 좌우에 8구씩 배치되어 있다.
대체로 십육나한상의 배치는 좌측에 1, 3, 5, 7, 9, 11, 13, 15상이 봉안되고, 우측에 2, 4, 6, 8, 10, 12, 16상이 봉안되는 것이 통례이나,
현재 봉은사 영산전의 십육나한상은 그 순서가 교란되어 원 위치와 다르며, 16구 가운데 4구는 신작(新作)이다.
향 우측의 제1상은 승형의 머리에 두 손으로 합장한 젊은 모습의 나한상으로서 얼굴의 형태와 이목구비의 표현은 본존석가상이나 아난존자와 매우 유사하며
원령의 내의에 가사를 입었는데, 암좌의 정면에는 괴수면이 새겨져 있다.
그 옆의 나한상은 착의형식은 앞의 나한상과 같은데, 오른쪽 무릎을 세운 윤왕좌의 자세이며 무릎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향 우측 제3상은 신작(新作)으로 왼손에는 보주를 쥐고 유희좌의 좌세로 앉아 있다. 제4상은 무릎위에 올려놓은 왼손에 긴 염주를 들었고 오른손은 오른 무릎
위에 놓았는데, 손가락을 구부린 표현이 재미있다.
제5상은 두 손을 마주 포개어 배위에 올려놓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으며, 제6상은 같은 형태의 승형 나한상으로 왼 무릎을 세운 윤왕좌로 앉아 오른손에
경권을 쥐고 있다. 제7상은 신작으로 유희좌로 앉아 등을 긁고 있다. 제8상은 두 손위에 경책을 펼쳐들고 있다.
다음으로 향 좌측의 나한상은 제1상은 가사의 앞섶을 풀어헤쳐서 상체의 나신이 드러나며 의자에 앉은 의상인데 오른손으로 동자를 안고 있다.
제2상은 가사위에 두건을 덮어쓰고 두 손을 옷속에 가린 나한상이며, 그 옆의 제3상은 신작(新作)으로 오른손에는 석장, 왼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다.
제4상은 두 손위에 경책을 펼쳐 든 모습이 향 우측 제8상과 유사하다. 제5상은 오른 무릎을 세워서 몸쪽에 붙이고 두손으로 무릎을 감싼 자세로 앉았는데,
이와 같은 유형은 오대와 송대의 나한상에서 보이며 원래는 세운 무릎위에 얼굴을 기대고 앉아있는 경우도 있다.
제6상은 신작으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위에 왼손을 올려놓았다. 제7상은 제4상과 마찬가지로 두 손위에 경책을 펼쳐든 나한상이며
제8상은 손의 모습으로 보아서 원래는 지물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십육나한상은 전체적으로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 획일화된 얼굴과 경직된 신체의 표현에서 조선말기 나한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이 상들이 봉안되어있는 영산전 후불탱화 화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1895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조선 말기의 기년작으로서 중요한 예라고
생각된다. 함께 섞여있는 신작(新作)의 나한상들은, 향 우측의 나한상들 가운데 세 번째와 일곱 번째 상, 향 좌측의 나한상 가운데
세 번째와 여섯 번째 상으로, 원래의 나한상들보다 체구와 두부가 크며 얼굴의 표현도 다르다.
봉은사 영산전 십육나한상은 현재 4구를 잃어 원상(原象)은 12구만 전하고 있으나 조각적으로 우수하고 1895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조선시대 십육나한상으로서 매우 중요한 예이므로 신작을 제외한 12구만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명부전(冥府殿)
지금의 건물은 1942년에 중창된 것이다. 불단에는 지장보살을 주존불로 하여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하고 있고,
다시 그 좌우에는 시왕상과 시왕탱화가 배치되어 있다.
명부전 지장보살상(冥府殿 地藏菩薩像)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전각이다. 불단에는 지장보살을 주존불로해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다.
명부전 지장탱(冥府殿 地藏撑) 옆으로 비스듬한 모습 <지장탱화 위주>
지장탱은 시왕탱과 더불어 명부전에 봉안되는 탱화다.
화면의 구성은 가운데에 지장보살이 앉아 있고 그 좌우로 명부시왕과 동자 및 장군, 그리고 사천왕이 배치된 구도를 하고 있다.
명부전 현왕탱(冥府殿 現王幀)
현왕(現王)이란 사람이 죽어서 3일 후에 받는 심판을 주재하는 신으로서 '현왕여래'라고 하기도 한다.
현왕탱은 머리에 관을 쓴 현왕이 의자에 앉아 있고, 좌우에 4명의 동자·동녀가 현왕을 시위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현황의 좌우보처인 대륜성왕(大輪聖王)과
전륜성왕(輾輪聖王)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화면 하단에는 판관과 녹사들이 책을 들고 있거나 문서를 펼쳐 보이며 서로 의논을 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1844년 송암당(松岩堂) 대원(大園) 스님이 그렸다.
명부전 벽화 들
명부전 벽화 끝
감로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