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태봉사(胎峰寺, 태고종) = 백제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는 사찰

백련암 2013. 3. 6. 11:38

백제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는 익산의  태봉사(胎峰寺, 태고종)

 

태봉사는 백제시대의 삼존불상이 있는 사찰이다. 사찰을 찾아가는 길도 쉽고 편안하다.

거의 평지에 위치한 대웅전은 뒤쪽의 야트막한 구릉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과 같다. 그 대웅전 안에 그 유명한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화강암 위에 두꺼운 호분이 칠해져 있어 부처님이 짓고 있는 온아한 백제의 미소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사람의 눈에 백제의 부처님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중생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원응료 안에는 오래된 불상에서 느낄 수 있는 안온함이 배어 있는 불상과 보살상이 여러 구 모셔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 아무도없어 물어볼 수도 불상과 보살상을 볼 수도 없었다.

 

태봉사가 언제 창건되어졌는지 알 수 없단다. 이에 대한 문헌이나 금석문 자료를 통해서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 백제시대 양식의 삼존석불이 발견되었으며, 또한 백제 와당편이 수습되었다고 전하고 있어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판단될 따름이다.

좀더 확실하게 말하면 백제 무왕이 익산에 궁성을 짓고 미륵사를 창건하는 등 무왕이 익산을 경영하던 시기였던 7세기 전반 무렵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 할 수 있단다. 창건 뒤의 사적도 전혀 알 길이 없다.

 

사찰을 중창한 것은 근래에 들어와서 바로 이곳에서 삼존석불이 발견됨에 따라 연유한다.

석불의 발견 및 중창 경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 태봉사의 창건주이며 주지의 어머니인 청송 심씨 묘연화 여인이 전한 바에 의한 것이다.

그녀는 1931년에 익산시 삼기면 연동의 본가에서 삼대 독자인 현 주지의 수명장수를 위해 산신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때 산신님의 현몽으로 안내를 받아 이곳에 오니 뜻밖에 삼존석불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계기로 삼존석불이 있는 지점에

작은 규모의 불당을 짓고 절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석불을 옮기려고 땅을 팠더니, 이 때 서기 6~7세기 무렵의 중국 동경이 출토되었다.

이 동경은 현재 공주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그 뒤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1947년에 요사 4칸을 지었고, 1955년에 묘연화보살의 아들인 박제공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이름을 지금의 태봉사라 부르게 되었다. 1957년에는 지금의 대웅전을 다시 짓고 이곳에 삼존석불을 옮겨 봉안했으며,

1962년에 칠성각을 지었다. 이 칠성각은 1982년에는 대웅전을 지금처럼 5칸으로 늘려 지었으며, 현재는 삼성각이라 부르고 있다.

 

최근에는 1996년에 선방과 요사를 새로 지었으며, 앞으로 현재 대웅전 앞에 있는 객사겸 식당용 임시 건물을 새로 지은 요사 뒤편으로

옮겨 지을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는 박제공 노스님에 이어 1990년부터 혜안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혜안 스님은 현재 무형문화재인 영산회상작법 전승자로 지정되어 있다

 

삼성각과 미륵불입상

 

 

태봉사 대웅전(胎峰寺 大雄殿)

안에는 백제시대 삼존불상과 함께 근래에 만든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좌상, 소불상 2체, 동자상 2체와

석가여래도․지장보살도․관음보살도․신중도 등의 탱화를 봉안했다.

 

 

삼존석불(三尊石佛)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이 석불은 부채꼴의 거대한 한 장의 광배(光背)에 부조기법으로 새긴 삼존불상(三尊佛像)으로,

태봉산 동쪽 기슭에 파손된 채 방치되던 것을 이곳에 태봉사를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세 부처를 새긴『삼존불상은 왼쪽의 정병을 들고 합장한 모습의 보살과 오른쪽의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동자승 형태의 보살이

좌우에 서서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 모습이다.

사각형 대좌(臺座)위에 책상다리(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는 본존불은 왼손을 내려 배에 대고 오른손은 들어 가슴에 댄

특이한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단정한 인상을 준다.

 

 

대웅전 삼존석불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호분이 발라져있어 본래의 모습보다 많이 개변된 상태이다.

20년 전의 조사에 의하면 본존상 가슴 이상은 파손이 심하여 상호의 형태를 알 수 없으며,

목에 삼도가 없음이 특징이라고 하고 있으나 지금은 삼도와 함께 상호의 형태가 뚜렷하다.

그리고 협시상들은 나한상과 보살상으로서 역시 삼도의 목주름이 없음을 밝히고 있으나

지금의 협시상은 모두 보살상으로서 목주름이 뚜렷하다.

 

이 삼존석불은 타원형 광배를 조각한 판석에 석가여래좌상과 좌우에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조각한 것으로서,

여래상은 방형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로서 법의는 통견이며 방형대좌에까지 늘어뜨린 상현좌의 형태를 보인다.

 

수인의 형태는 왼손은 들어 가슴에 대였으며, 오른손은 아랫배에 대고 있다. 머리에는 두광이 표현되었는데 이중 원권 안에 연화문을 새겼다.

이 광배 위부분에는 1체의 화불이 조각되었다.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화불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형태로서 두광과 신광을 모두 갖추었다.

 

여래상 오른쪽에는 연화 가지를 두 손으로 쥔 문수보살입상이 조각되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머리는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다.

법의는 통견인데 옷자락은 U자형을 보이면서  밖으로 매듭이 드러나 보인다.

왼쪽에는 역시 두손으로 정병을 받들고 있는 관음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보관이나 머리 삼도 옷자락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이 상에서는 매듭은 보이지 않는다. 각 상 모두 머리에 둥근 두광을 갖추고 있다.

 

 

삼존석불 옆으로 모셔진 삼존불

 

 

지장보살좌상 과 시왕, 도명존자입상

 

 

신중탱

 

 

 

 

  

 

 

삼성각(三聖閣)

안에는 불단 가운데에 봉안된 치성광여래상을 비롯해서 독성상․산신상과 칠성탱화․산신탱화․독성탱화 및

창건주 청송 심씨 묘연화보살의 영정이 있다.

제작년대는 1958년이며, 삼성각 건물도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독성탱화는 1958년, 나머지 탱화는 최근에 봉안되었다.

 

 

칠성탱화과 치성광여래상

 

 

 

  

치성광여래좌상                                                                     독성상

 

 

   독성탱화와 독성상

 

 

산신탱화와 산신좌상(山神撑畵, 山神坐像)

 

 

원응료(圓應療)

원응료는 요사채와 공양간으로 사용되며 앞면 5칸, 옆면 3칸이고 팔작지붕을 한 목조건물이다.

들어가서 왼쪽에는 목조로 감실을 차려 놓았는데, 주존불로는 금동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단다.

 

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주존불의 뒤쪽으로는 아미타후불탱이 모셔져 있다.

원응료의 벽에는 관경변상도 액자가 하나 걸려 있고,

바닥에는 작은 북이 놓여 있으며 별다른 장엄이 되어 있지 않아 그다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스님이 나오셔서 벽감의 안쪽을 열었는데, 그 내부에는 시대가 올라가는 작은 금동 불보살상 여러 점이 모셔져 있다.

소형 금동불입상은 광배와 대좌까지 갖추고 있으며 조각 상태도 매우 뛰어나며,

소형 금동보살입상은 상호와 관 등은 고식을 보이고 있지만 영락장식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작은 유리 장 속에 모셔져 있는 금동불좌상은 금동관을 썼으며 손에는 작은 정병을 올려 놓고 있다.

 

☆ 지인의 이야기로는 위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었다 그래서 찾아가게 된곳이고 하지만 볼 수가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면서 돌아서야만 했다.

 

 

수각(石物)

 

범종각(梵鐘閣)

범종각 안에는 커다란 범종과 함께 법고․목어․운판 등 사물을 걸고 있다.

 

 

사리탑과 청신녀 청송심씨 묘연화 공덕비 <사리탑의 한문이 자세히 보이지를 않아 못씀>

 

고조선 준왕의 아들 태를 모신 곳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위만에게 쫓겨 이곳에 찾아 들었다. 이윽고 터전을 잡고 마한의 왕이 된 영험한 곳을 찾아 다니면서

득남을 위한 기도를 했다. 그래도 아들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왕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봉황 한마리가 갑자기 높이 솟아 올랐다. 왕은 눈이 부셔 봉황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솟아오른 봉황이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다시 훨훨날아 미륵산 넘어 어느 작은 산에 사뿐히 내려앉으며 꿈이 깼다.

상서로운 꿈이라는 것을 금새 알아 챈 왕은 봉황이 앉은 곳을 찾아 그 곳에 석불(石佛)을 정성껏 모시고 기도에 정진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백일이 지나자 왕비는 임신을 했다.

이후 왕은 세 아들을 얻었고  아들들의 태(胎)를 묻은 후 산의 이름을 태봉(胎峯)이라고 불렀다.

 

백제의 무왕이야기

태봉산과 관련된 일화는 백제의 무왕에게도 이어진다. 준왕때부터 이산이 영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무왕은 이곳에 움집(幕)을 짓고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기도했는데 어느 날 삼존불상이 들판에서 비바람을 맞고 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무왕은 즉시 사람을 시켜 이곳에 절을 짓게 하고는 태봉사라고 했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위의 전설들은 모두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는 것이니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른다.

 

 

◈찾아가는 길

*주소 =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147번지 죽청마을 태봉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사찰이다.

*조카의 차로 가서 어찌가야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석불사에서 얼마 안 걸리고 갔다. 도로변에 이정표가 있어 금방 알 수가 있었고

  작은 절집이었다 . 높은 산도아니요 그렇다고 낮게나마 느끼게 하는 것도 아니다 도로변에 그냥 평범하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