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운문암(白羊寺 雲門庵)
백양사 운문암(白羊寺 雲門庵)
산사를 여기저기 둘러볼 생각도 없다. 그렇게 절을다녔지만 마음이 이렇게 차분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하고 마음이 푸근해보기는 처음이다.
전생에 많은 복덕을 짓고, 이생에 인연이 있어야만 한 번쯤 가서 앉아 볼 수 있다는 백양사 운문암을 찾아 간다니 마음이 설렌다.
그도 그럴 것이 북에는 마하연, 남에는 운문선원을 꼽을 정도로 알려진 유명한 선원이 있으며, 남에서도 태고사, 월명암등과 함께
운문선원의 氣는 알아준다고 한다. 또한 속가 사람들은 특별한 인연이 아니고는 이곳 선원 출입은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운문암은 전라남도 장성군 백암산 상왕봉 아래에 있는 암자이다.
전남 장성 백양사 운문암(雲門庵)
운문암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43번지에 위치한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운문암은 백양사가 창건될 즈음에 함께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백암산 꼭대기인 상왕봉 아래에 자리한 운문함은 서옹스님 등 많은 큰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선방스님들이 앞을 다퉈 찾아드는
곳이다.
여름, 겨울 정진 때 선객이라면 한 철 공부하고 싶어하는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금 선원장스님으로 일수스님이 계신다.
백양사 운문암은 옛부터 많은 선지식이 정진하신 곳이다.
고려시대 때 부터 있었으며 전설로는 진묵대사님도 정진하시였고 1910년 경에는 용성스님도 정진하시였다고 한다.
6.25사변으로 모두 불타고 현재는 1980년대의 불사라고 한다. 6.25사변때 국군이 올라와서 불 질렀는데 불지르려고 올라온 군인 하나가
반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운문암을 불지르고 내려가던 국군은 인민군을 만나 몰살당했는데 불지르는것을 반대한 한 사람만 살았다고
한다. 그 생존자가 80년대 까지 일년에 서너번 올라와서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운문암(雲門庵) = 운문암은 고불총림 백양사의 선원으로 운문선원이 있다.
백양사가 창건될 즈음에 함께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백암산 꼭대기인 상왕봉에 자리한 운문암은 조선시대의 벽송, 정관, 백파스님으로부터 근대의 학명, 용성, 인곡, 석전, 만암, 고암,
그리고 서옹스님에 이르기 까지 많은 큰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 나라 선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큰스님들이 주석하여 수행과
교화를 하였던 참선도량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지금도 선방스님들이 여름, 겨울 안거 정진 때 최고의 선도량인 운문암을 앞 다투어 찾아들고 있다.
선객이라면 한 철 공부하고 싶어하는 참선수행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운문암 앞에서 멀리 보이는 많은 능선은 200봉의 군신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고 맑은 날에는 광주 무등산이 잘 보인다.
아침에 구름이 끼면 저 산 밑에서 구름이 머물러 운문암이라 한다.(구름이 문을 만들다.)
「운문암은 고려 시대 각진국사가 머문 이래 수도 도량으로 알려진 곳이며, 서산 진묵 스님이 머물렀고, 백파 한영 스님과 그 제자들이
선풍을 일으킨 곳이다. 1923년 용성 스님이 운문 선원을 열고 주석하면서 고암, 석암, 금포 스님 등이 정진했고, 남전, 인곡, 운봉, 법전
스님도 이곳을 거쳐 갔다. 근대에 들어서도 교정과 정종 7명을 배출했다.
한국 전쟁 때 소실된 운문암을 되살린 것은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서옹스님(1912-2004)이다. 1985년에 선원을 다시 열면서 예전의
명성을 다시 되찾았다.
◈운문암(雲門庵)은 백양사가 창건될 즈음에 함께 세워졌다 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백암산 꼭대기인 상왕봉에 자리한 운문암은 많은 큰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선방스님들이 앞 다투어 찾아드는 곳이다.
여름, 겨울 정진 때 선객이라면 한 철 공부하고 싶어하는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사찰터중 3대 명당의 하나로 꼽히는 운문암은 고려 충정왕때 각진국사가 개창한 이래 많은 고승들의 수도장으로 한때
백파선사의 설법으로 유명했으며 또한 진묵대사의 전설이 담긴 흙부처로도 이름나 있다.
진묵대사와 진흙부처
이 암자에는 금을 입지 못한 부처가 있었는데 선조 초기에 진묵대사가 암자에 있으면서 불상을 만들다가 완성되기 전에 어디론가
가면서 다시 와서 완성하기 전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한채 영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는 금을 입지 못한채 미완으로 남아있게
되었고 그 후 암자는 6·25사변 때 불타버리고 유적만 남아 있다가 최근 복원됬다.
진묵대사(진묵 일옥 : 1562~1633)라 하면 승속간에 잘 알려진 큰스님으로 조선 조중기의 스님이다. 스님께서 운문암 불사 때에 오셔서 다각(차를 끓이는 소임) 책임을 맡고 계셨다. 하루는 신장단에 차를 올렸는데, 그날밤 대중스님들의 꿈에 신장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우리는 호법신장으로서 불보살을 보호해야 하는데, 도리어 예를 받게 되니 마음에 황송스러움을 금키 어려우니 차 소임을 바꿔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스님들이 의아심을 갖고 있는데 그날 동네 나무꾼이 와서 하는 말이 우리가 비자를 딸 때 어떤 남여 두 사람이 희희낙낙한 얼굴로 운문암을 향하여 올라가더니 얼마 안되서 대성 통곡을 하며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사유를 물으니 하는 말이 "우리가 영원한 안식처를 삼기 위하여 운문암에 갔더니 일옥이란 스님이 뜨거운 불로 우리가 범접치 못하게 하므로 화독을 못이겨 쫓겨온다"고 하는 말을 스님들에게 전했다.
대중들은 어제밤 꿈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진묵 일옥대사가 화관 삼매에 든 법력이 높은 스님임을 깨달아 부처님처럼 예우하고 불사의 중명법사로 모시고 산중의 조실스님으로 추앙하였다.
불사가 회향됨에 조실스님은 대중에게 이르시길 "내가 다시 와서 불사를 하기 전에는 불신(부처님)에 손을 대지 말라" 하였다. 그리하여 운문암 불상은 개금(부처님몸에 금을 입히는것)을 하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6·25 전쟁때 운문암이 불에 타고 있을때 상주하던 스님이 부처님을 업고 밖의 바위에다 모셨는데 잠시 후 부처님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부처님을 볼 수가 없으며, 진묵대사가 다시 오면 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
법당(소림굴) = 서옹스님 글
소림굴(운문암의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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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에 모셔져있는 부처님
소림굴 툇마루에 모셔져있는 신중단(신중탱화)
운문암현판이 걸려있는 운문선원 = 서옹스님의 글
운문암현판이 걸려있는 운문선원
선원장스님이 기거하시는 곳
선방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