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여주 신륵사 = 탑과 부도들, 강헌루, 수각, 일주문, 황포돗대

백련암 2014. 6. 3. 12:28

懶翁禪師 詩(나옹선사 시)

 

靑山見我無語居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視吾無埃生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貪慾離脫怒抛棄 :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水如風居歸天命 :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 공민왕의 왕사이며.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휘는 혜근(慧勤), 호는 나옹(懶翁), 본 이름은 원혜(元慧)이다.

속성은 아(牙)씨인데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고려말 고승으로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해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선사에게서 득도했다.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의 고려사찰인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선사는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 처림(平山處林)과 천암 원장(千巖元長)에게서 달마(達磨)로부터 내려오는 선(禪)의 요체를 배워 체득했다.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스님의 제자로서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 절터가 있는데 경주의 황룡사 절터보다 규모가 큰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로

중창했고, 조선 태조 왕사로서 한양천도의 주요 인물인 무학대사는 그의 제자였다.

나옹, 지공, 무학, 세분의 부도와 비석이 회암사터의 뒤쪽에 현존하고 있는데, 비석은 조선왕조 유학사상의 지주였던 목은 이색이 찬하여

지금도 비문이 남아있다.

그 출생지 부근에 장륙사라는 조그만 사찰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때 건물과 건물 내벽에 그의 초상화가 남아있습니다.

그가 입적한 남한강변 여주 신륵사에도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비문이 남아 있다.  

◈나옹선사 = 고려말의 명승으로 본명은 혜근(慧勤 1320年~1376年) 나옹선사도 공민왕이 살해된지 2년만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이 57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사실에는 정치적인 음모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후세에  사람들은 유추하고 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 石鍾)  : 보물  제228호   시대 = 고려시대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글>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 보물  제228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 보물  제228호

 

이 석종은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고려 말기의 승려 나옹( 懶翁, 1320年~ 1376年)의 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부도(浮屠)이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승려 나옹이 고려 우왕 2년(1376年) 경기도 양주 회안사에서 경상남도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들이 우왕 5년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절 뒤의 좋은 자리를 택해 부도를 마련하였다.

부도의 기단 위에 돌을 깔고 기단의 앞면과 양쪽 면에 2단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계단에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다.

그 위에 모셔진 이 석종의 모양은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 부분에서 수평이 되었는데 맨 꼭대기에는 보주(寶珠)를 조각하였다.

종모양의 부도는 통도사. 금산사, 용연사, 봉암사 등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 부도는 특히 통도사와  금산사와 같이 일종의 계단 탑 형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 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종 모양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부도 뒷편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의 내용에 의해 이 석종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 우왕 5년(1379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륵사  글>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앞 石燈)  :  보물  제231호   시대 = 고려시대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글>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앞 石燈)  :  보물  제231호 

 

이 석등은 보제존자 나옹(懶翁)의 부도를 밝히기 위해 서 있다.

평면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이 석등은 일반작인 석등과 마찬가지로 화강석을 사용하고 있으나 등불을 앉히는 화사석은 납석(곱돌)을 사용하고 있다.

높다란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놓인 기단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간주석(竿珠石)에는 연주문(連珠紋)으로 구획을 나눈 후 그 안에 亞자형의 안상(眼象)을 베치하고 있다. 상대석에도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연꽃을 새겼다.

납석으로 된 화사석은 높게 만들어졌는데 반용문(蟠龍文)을 새긴 원형기둥과 화창(火窓), 비천(飛天), 창방(唱枋), 평방(平枋)등을 가득 조각하였다.

팔각형인 지붕돌의 추녀 끝은 살짝 들어 올려졌고 지붕돌 위에는 복발(覆鉢)과 보주를 놓아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석등은 나옹이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뒤 부도를 세웠던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무덤 앞에 놓이는 장명등(長明燈)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신륵사의 글>

 

 

석등 세밀도 다양한 모습의 비천(飛天)상이 조각되어져 있다. 석등이 너무 화려하고 아름답다.

 

석등 세밀도 또 다른 모습의 비천(飛天)상이 조각되어져 있다.

 

 

신륵사에 가시는 분들은 필히 나옹선사의 부도탑과 석등은 자세히 보고 왔으면 좋겠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 石鍾碑) : 보물  제229호   시대 = 고려시대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글>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다.

나옹이 말년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 북쪽 언덕에 종 모양의 부도릉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실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비문은 이색(李穡)과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짓고 썼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인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 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 옆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石)을 얹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새로이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 230호])도 같은 형식이다.

<신륵사의 글>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 부도 (驪州 神勒寺 八角圓堂形 石造 浮屠)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95호

 

 

 

이 부도는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이어받고 있다.

재질은 화강석이고 전체 높이는 225cm이다.

원래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서 196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이 때 사리를 봉안한 사리합이 발견되었지만

어떤 스님의 탑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부도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탑을 의미한다.

이 부도는 팔각의 집모양을 받치는 3단형의 기단부(基壇部)와 팔각 집 모양의 탑신부(塔身部)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하대석(下臺石), 중대석(中臺石), 상대석(上臺石), 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地臺石)과 일조로 구성된 팔각의 하대석에는

8개의 연꽃잎 무늬가 돋을 새김 되어 있고, 매우 낮은 원통형의 중대석은 문양이 없으며, 팔각의 상대석은 위로 향한 연꽃잎 무늬가 돋을 새김 해 놓았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은 팔각 형태로 문을 새기고 범자(梵字)를 돋을 새김하였다.

지붕을 나타내는 옥개석(屋蓋石)은 기와골 끝에 꽃장식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육중하면서도 세련되며 간결한 기풍을  풍기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말 조선초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팔각원당형 석조 부도 (驪州 神勒寺 八角圓堂形 石造 浮屠) 

 

 

여주 신륵사 원구형 석조 부도 (驪州 神勒寺 圓球型 石造 浮屠)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34호  

 

이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탑의 형태가 둥근 공 모양을 하고 있어 원구형부도라 고 불리운다.

현재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의 탑인지 알 수 없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 220cm이고, 공 모양의 탑신은 60cm로, 당시 조성되었던 부도들과 비숫하다. 

이 부도는 크게 위부터 상륜부와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그리고 원형 모양의 탑신이 하나의 돌, 그리고 기단부는 세 개의 돌로 쌓았다.

아래쪽의 기단부는 일반적으로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상대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실되어 있다.

 

연꽃으로 장식된 상대석과 팔각의 돌 위에 각 모서리를 작은 원형의 연주문(連珠紋)으로 장식한 중대석(中臺石), 그리고 사각형의 지대석만 남아 있다.

상륜부 연주문(連珠紋)을 받침으로 한 세층의  보주형으로 장식했으며. 탑신위의 옥개석 부분은 기와골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새기는 등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실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당시의 시밀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중요한 자죠로 형가 할 수 있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  보물  제230호    시대 = 고려시대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  보물  제230호    시대 = 고려시대

 

 

대장각기비 (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  보물  제226호    시대 = 고려시대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문화재청 글>

 

 

   

다층전탑 (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  보물  제226호

 

 

다층전탑 (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  보물  제226호

 

이 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는 9.4m이다. 이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하여 7단의 층단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여러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다.

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에는 이중의 반원 사이에 연주문((連珠紋)과 당초문(唐草文)을 조각하였으나 배치가 일정하지 못하며,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는데 비해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띄워 그 사이에 면토(面土)를 발랐다.

 

상륜부는 전으로 만든 노반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복발, 보개, 보주 등이  얹혀있다. 이 탑의 거립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탑 북쪽에 있는 수리비 내용에 의해 조선 영조 2년(1726년)에 고쳐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신륵사 글>

 

 

여주신륵사삼층석탑 (驪州神勒寺三層石塔)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33호    시대 = 고려시대

 

이 탑은 화강암을 깍아서 만든 3층 탑으로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여주 신륵사 경내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다.

탑을 지행하고 있는 제일 아랫 부분이 기단부(基壇部)는 한 장의 넓적한 돌 위에 사각형의 석재를 올려놓고

그 위에  덮개에 해당하는 상대석(上臺石)을 덮었다.

기단부 바로 위에 놓여 있는 탑신(塔身 )에 해당하는 돌의 네 모퉁이에는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그 위에 목조건축물의 지붕과 같은 형태로 옥개석(屋蓋石)을 덮었다. 옥개석(屋蓋石)은 기울기가 바교적 완만한 편이고,

옥개석 아릿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 내지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형태로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쌓여 있으나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고려 후기 나옹화상(懶翁和尙)을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신륵사 삼층석탑 (驪州 神勒寺 三層石 塔) 

고려 후기 나옹화상(懶翁和尙)을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월헌과 삼층석탑(江月軒 三層石塔)

 

 

 

 

강월헌(江月軒)

전탑 가까이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본래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화장터의 석탑 가까이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1972년의 대홍수로 떠내려가고 이후 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다.

강월헌이라는 이름은 나옹의 당호(堂號)로 그를 추모하여 누각을 세운 것이라 생각된다.

이색은 나옹의 비문에서, '보제의 몸은 이미 화장을 하였건만 강물과 달은 지난날과 다름이 없구나. 이제 신륵이 장강에 임하여 있고

석종이 거기에 우뚝 솟아 있어 달이 뜨면 그림자가 강에 거꾸로 걸려있고 물빛은 등불빛 같고, 무럭무럭 타오르는 향기만 그 속에 엉겼으니

이른바 강월헌이로다. 비록 한없는 세월이 흐른다 해도 마치 보제가 살아있는 것만 같구나'하고 읊었다.

 

 

 

 

 

 

수각

예전에는 정말 물이 많았는데 지금 이 수각은 센서로 작동한다 사람이 닥아가면 물이나오는데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인지

내가 생각할 때 그 다지 많은 사람도 아닌데 물이 딸려 지금 아무리 가까이 가도 물은 나오지를 않는다.

 

 

   

수각에는 두 점의 현판이 걸려있다. 세심정과 청자정

 

 

예전의 수각(甘露水槽 淨心 감로수조, 정심)이였다.

 

한 10년전에 왔다가 오늘 와 보니 너무 많이 변했다 주변이 정리된것은 좋은데 뭔가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다.

4대강 이후로 이 지역이 물이 부족현상이 일어났다고 어느 분이 말을 한다.

 

 

사적비와 기원비

 

 

공적비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나옹대화상) 令傳寺 普濟尊者 舍利塔, 江原道 原州 令傳寺 터. : 高麗 1388年. 보물(寶物) 358호

보제존자는 나옹화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승탑은 일반적인 승려의 묘탑과 달리 석탑모양의 쌍탑을 이루고 있는데

 이처럼 고려시대 말기에는 승탑도 석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제존자 즉 나옹화상은 신륵사에도 석종형 승탑(보물 228호)이 있는데, 제자들이 나옹화상의 사리를 나누어

영전사와 신륵사에 각기 묘탑을 세워 봉안한 것이다.

 

제 1탑

 

제 2탑 =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 令傳寺 普濟尊者 舍利塔, 江原道 原州 令傳寺 터. : 高麗 1388年. 보물(寶物) 358호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강원도 원주 영전사 터. 고려 1388년.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 1320 - 1376년>의 사리를 모시기우해 고려 우왕<禑王> 14년<1388年>에 세운 승탑이다.

보통승탑이 팔각 집<八角 堂>모양이거나 종 모양을 띠는 것에 비해 이 승탑은 특이하게 불탑과 같이 네모난 형태의 두탑으로 이루어져 매우 이채롭다.

나옹의 사리를 모신 승탑은 이 탑 외에도 그가 입적<入寂>한 여주<麗州> 신륵사<神勒寺>와 그가 주지로 있던 양주<楊州> 회암사<會巖寺> 터에도 남아 있다.

 

이 승탑은 고려시대 말기에 활동한 고승 보제존자의 묘탑으로 우왕 14년(1388)에 세워진 것이다.

보제존자는 나옹화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이 승탑은 강원도 원주시 영전사 절터에 있다가 1915년에 서울로 옮겨왔다.
이 승탑은 일반적인 승려의 묘탑과 달리 석탑모양의 쌍탑을 이루고 있는데 이처럼 고려시대 말기에는 승탑도 석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탑의 조형에서는 짜임새 있고 안정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국립 중앙박물관=

 

 

일주문 안쪽에서

 

 

일주문

 

◈고려시대의 신륵사

 

신륵사의 창건 사실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 후기인 1726년에 작성된 『신륵사동대탑중수비(神勒寺東臺塔重修碑)』에 보면,

"문헌에 이르기를 신륵사의 창건이 어느 때에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현릉(玄陵, 공민왕)의 왕사(王師) 나옹(懶翁)이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과 함께 놀았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유명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위의 기록으로 왕사 나옹과 목은 이색이 신륵사에서 함께 머물렀으며 이로 인하여 신륵사가 유명 사찰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색 자신이 지은 『보제사리석종기(普濟舍利石鐘記)』에서 강월헌(江月軒, 나옹의 호)은 보제(普濟)가 거처한 곳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나옹과 함께 신륵사에서 노닐었다는 이색인데, 다음과 같은 그의 시를 통해서도 이색이 신륵사에 머물렀던 것을 알 수 있다.

 

먼 산은 긴 강이요
성긴 소나무는 푸른 돌 곁이로세
절은 복된 땅에 열렸고
보제(普濟)는 진당(眞堂)이 열렸네
현령은 자주 허리에 홀(笏)을 꽂고 예배하는데
산 승(僧)은 홀로 벽을 향하고 있네
어쩌면 들 배를 불러서 맑은 휘파람으로
넓고 아득한 물에 띄울꼬

 

이색과 나옹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둘이 서로 교류했었던 것이 아니라, 이색이 1377년 왕명으로 나옹의 탑비명을 쓰게 되면서부터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신륵사 나옹 선사의 제자 학주(學珠)가 나옹의 석종기문을 부탁했을 때 이색이 흔연히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들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반드시 거절하지 못할 것이며 보제의 몸이 이미 화장을 했음에도 보제가 살아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보제께서 크게 도를 펴던 곳으로 장차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이상에서 나옹 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함으로써 비로서 절이 대찰을 이루었다는데 대한 다른 견해를 제시하여 보았다.

곧, 나옹이 입적하기 이전부터 신륵사와 관련을  맺음으로써 더욱 사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 공민왕 이후 태고 보우(普愚)와 더불어 고려 선불교를 중흥시켰던 나옹 혜근(慧勤, 1320∼1376)은 1371년(공민왕 20)에 왕사가 되었다.

 『고려사』 권133 「열전」 1 <신우(臣禑)>조를 보면 나옹은 잠시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있다가 다시 양주 회암사(檜巖寺) 주지가 되어

회암사를 중수하여 1376년에 낙성회인 문수회(文殊會)를 열었으나 전국의 무녀(巫女)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혼잡을 빚은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받아 밀양의 영원사(塋源寺)로 추방되어 가는 길에 여흥(驪興) 신륵사에 이르러 입적하였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나옹의 탑비에는 병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색이 지은 『회암사선각왕사나옹부도비』와 『신륵사보제존자시선각탑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전략)…이리하여 명을 내려 영원사에 이주하게 되어 급히 길에 올랐다. 선사는 이 때 마침 병이 있었다.

수레를 타고 삼문(三門)을 지나서 못가에 이르니 인도하는 자가 열반문으로 해서 가라고 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의심스럽게 여기고 소리쳐 울었다.

선사는 뒤를 돌아보면서, "힘 쓰라! 힘 쓰라! 나로 인해서 중단하지 말라. 내가 가는 길은 마땅히 여흥에서 그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卓簽)에게 이르기를, "내 병이 심하니 배를 타고 가도록 해 다오." 했다.

이에 강을 거슬러 7일 동안을 올라가 바야흐로 여흥에 다다랐다.

이 때 또 탁첨에게 이르기를, "조금 머물렀다가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서 가도록 하자." 하니 탁첨도 마지못해 이에 따랐다.

이래서 여흥 신륵사에 우거했다. 5월 15일에 탁첨은 다시 길을 떠나자고 재촉했다.

선사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의당 갈 것이다." 하고 이날 진시(辰時)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보제존자사리석종기』에 의하면 나옹이 입적한 후에 영이(靈異)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신륵사에서는 제자들이 나옹선사가 입적한 지 3개월이 지나 신륵사 북쪽에 사리석종부도를 세웠다.

여기 에는 나옹선사의 제자였던 각주(覺珠) · 각성(覺惺) 등이 중심이 되어 100여 명의 시주자가 참여하였다.

각주 스님이 이색에게 청하여 『보제존자사리석종기』를 짓게 하고 각산 스님이 비를 세울 좋은 돌을 구해서 석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석종기 뒷면의 중창연화문생명목(重創緣化門生名目)에 따르면 이 무렵 대중창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대전(大殿), 조당(祖堂), 승당(僧堂), 종루(鐘樓), 동익당(東翼堂), 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廊), 향적당(香積堂) 등이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화상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이 건립되었다.

 

이색이 지은 『신륵사선각진당시(神勒寺禪覺眞堂詩)』에는 신륵사의나옹선사의 제자 지선(志先)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이 오탁(五濁)의 악한 세상에 태어나서 일하셨으니 이런 까닭에 회암사(檜岩寺)는 옛날의 기림(祇林)과 같고

신륵사는 옛날의 쌍림(雙林)과 같습니다." 라고 하면서 진당에 걸 시를 이색에게 청하였다.

나옹선사의 제자였던 지선은 이색에게 나옹화상석종기문을 짓도록 부탁한 바 있다.

나옹선사의 선각진당을 짓고 선사의 진영을 모셔 아래와 같은 시를 걸어 놓았다.

 

도(道)의 현묘한 것은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닐세
아!  아! 저 화상은 딴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늠연(凜然)한 그 모습 하늘이 만든 것처럼 빼어났네
여기에 와서 절하는 자 있으면 마치 그 목소리 듣는 것 같으리

 

나옹선사의 입적을 전후하여 신륵사에는 건물이 새로 지어지는 등 사세(寺勢)가 확장되어갔는데

나옹선사가 입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을 건립하고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황포돗대란다.

 

 

 

 

 

 

 

조선시대의 신륵사

조선시대에 시행된 배불정책으로 인하여 신륵사도 크게 위축이 되었을 듯하다.

조선시대 신륵사에 관한 첫 기록은 신륵사에서 대장경을 인출하였던 이색이 신륵사에서 죽은 일이다.  이색은 1392년 5월 병으로 신륵사에서 죽었다.

이색이 신륵사에 나옹선사의 탑비를 지은 것이나 대장경 인출 불사는 당시 배불숭유의 유가로부터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배척상황은 신륵사에서도 있게 되는데 그것은 태종이 신륵사의 대장경 전부를 일본국왕에게 보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1401년(태종 1)에 일본 국왕이 대장경판을 구하러 사람을 보내와 우리 조정에서 논의가 되었던 것이다.

「태종실록」에는, 대장경을 일본국에 보내고 「대반야경(大盤若經)」 을 규주(圭籌)에게 내려준 기록이 상세히 보인다.

 

처음에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일본이 대장경을 구하니 경판을 보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 경판이 적지 않으니 보내준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경외 경판의 숫자를 헤아려서 알리도록 하라" 고 논의를 하였다. (태종실록」권28 태종 14년 7월 11일)

 

또한 일본에서 대장경을 청하자 경판을 보낸다면 다시 오지 않을까 두려워 경을 주지 않고 종을 폐사하여 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곧 신륵사와 충청도 천안군 풍세 광덕사(廣德寺)에 봉안된 대장경을 일본 사신인 승려 규주 등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태종실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규주는, "우리(일본) 왕이 선군의 뜻을 이어 대장경과 대반야경을 열람하고자 합니다. 신이 받아서 우리 왕에게 바치기를 원합니다" 하고,

이어서 대반야경을 청하였다. 태종이, "이 경은 우리나라에도 또한 희소하다. 널리 구해야 내려줄 수 있다." 하고는

예조에 명하여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전부를 일본국왕에게 보내고 광덕사에 소장된 대반야경 전부를 규주에게 내려주게 하였다.

규주 등은 대반야경을 구하여 이미 받았는데 오히려 만족하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광덕사는 현재 천안시 광덕면 공덕리 화산에 있는 사찰인데 이 절의 대반야경과 신륵사에 소장된 대장경 전부를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