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 무위사 = 수덕사의 대웅전과 많이 닮은 국보 13호인 극락전
강진 무위사(無爲寺)
『무위사 사적에(無爲寺 事跡)』에 의하면 무위사는 원효스님에 의해 창건되고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무위사의 역사는 선각대사 형미스님(逈微)이 중창한 1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위사는 고려 초에는 선종사찰로 유명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수륙사(水陸社)로서 유명하였다.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수륙재(水陸齋)를 행하였던 사찰이었던 만큼 중심 건물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국보 13호인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전이 있다.
현제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극락보전으로 우리나라 조선시대 불교 건축물 중에서도 초기 형태에 속한다.
눈여겨 볼 것은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진 극락보전의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이다.
특히 극락보전 측면의 기둥과 보가 만나이루는 공간 분할의 절제된 아름다움도 놓쳐선는 안 될 감상 포인트이다.
또한 단정하고 겸소한 극락보전의 겉모습과 달리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묘사한 화려한 건물 내부는 물론 조선초기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불상과 불화도 빼 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월출산 무위사란 글이 걸려있는 일주문 편액
범종각(범종각)
월출산 무위사란 글이 써 있는 범종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보물 제507호 시대 = 고려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의 월출산 동남쪽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의 명승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고, 명종 5년(1550) 태감(太甘)이 4번째로 세우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영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선각대사의 비문에 새겨진 구름속 용의 모습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의 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라 합니다.
무위사는 오래전 수륙사로 지정된 절집이었다 합니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의식으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의식입니다. 이곳은 후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장이었으며, 내내 왜구들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던 땅이기도 하다.
극락보전에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한다는 부처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협시불로 지장보살을 모신 까닭이, 이 벽화에 전하는 전설에서
하필이면 49일이라는 숫자가 등장했는지 이해가 될 듯합니다.
내 식구는 물론 적까지 위로하는포용력에서 새삼 자비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됩니다.
선각대사탑비 (先覺大師塔碑) 탑비의 다양한 모습
선각대사 편광탑비
1969년 6월 16일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2.35m, 너비 1.12m. 무위사 극락보전 서쪽 약 30m에 위치하는데 돌로 쌓은 담장 안에 남향으로 있다.
귀부(龜趺)·비좌(碑座)·비신(碑身)·이수(螭首) 등을 다 갖춘 전통적 양식의 비이다.
귀부의 두부(頭部)는 양 뿔을 뚜렷이 조각한 용머리이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은 투조(透彫)로 되었다. 거북의 등에는 6각갑(六角甲)무늬를 양각하고
비좌의 앞뒤 2면에는 보운(寶雲)무늬, 양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각각 양각·음각으로 새겼다.
이수에는 3단의 층급형(層級形) 받침을 새겨 겹송이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비제(碑題)는 ‘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 幷序’라고 시작하여 지은이 최언휘(崔彦輝)와 쓴이 유훈율(柳勳律)의 성명을 기록하였다.
각부의 조각기법은 당대의 다른 비석에 비하여 사실(寫實)의 경향을 띠어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2cm이고 해서체(楷書體)이다.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형미스님(逈微, 864~917年)은 통일신라 말 고려 초기의 명승으로, 무위사에서 주지로 8년간 머무르며 무위사 중창을 주도 하였다.
탑비는 거북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거북받침돌과 운용문(雲龍文)이 있는 머릿돌에 표현된 조각 수법은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몸돌 앞면에는 형미스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최어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글씨를 썼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 국보 제13호 시대 = 조선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옆면
극락보전 편액과 극락보전 천정의 모양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 (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 보물 제1312호 시대 = 조선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들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앞쪽에 흘러내린 옷주름은 아래 대좌에 표현되어 있어 불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으로 조선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무위사 삼존불 제 모습 찾았다. 보수불사와 개금불사=
이 과정에서 불상이 나무로 만든 목조가 아닌 흙으로 만든 소조(塑造)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康津 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 국보 제313호 시대 = 조선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뒤의 삼존벽화의 관음보살은 무위사에 전하는 전설처럼 여전히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채 입니다.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아미타삼존불벽화이다.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이 2구씩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었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채색은 주로 녹색과 붉은 색을 사용하였다.
조선 성종 7년(1476)에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후불벽화를 똑 같이 그려 걸어놓았다 그것을 찍어 왔음 실제는 삼존상 뒤에 있는 것이다.
= 아미타삼존불도 =
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 흙벽에 채색. 210 × 270 cm. 1476년 작.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하여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졌다.
구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으로 6명의 나한(羅漢)을 배치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으나
상하로 구분하는 2단구조의 고려 불화나 16세기의 조선 불화와도 다른 것이다.
아미타불의 뒤에 표시된 광배(光背)의 모양은 키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착의법(着衣法)은 고려 후기의 단아양식(端雅樣式)을
계승한 것이며,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裙衣)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끈을 대좌(臺座) 좌우로 길게 드리운 것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다.
내용상에서도 변화가 있다. 곧 고려시대의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것은 고려 후기의 신앙대상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명의 시주로 혜련(海連) 대선사 등이 그렸다 한다.
전설
후불벽화에 관한전설은 극락보전 건립 후 어느 날 노승 한사람이 사찰을 찾아와 벽화를 그리겠다며 100일동안 법당분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99일째 되던 날 궁금증이 많은 한 승려가 창살을 통해 법당안을 들여다보자 한 마리의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날아가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존 후불벽화 중 가장 오래된 무위사 후불벽화는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한 미완성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치성광 여래와 칠원성군 탱화
신중단 신중탱
무위사극락전내벽사면벽화 (無爲寺極樂殿內壁四面壁畵) : 보물 제1315호 시대 = 조선
삼존불화(三尊佛畵)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벽화로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를 포함하여 총 29점이다. 지금은 모두 해체되어 보존각에 보관ㆍ진열되어 있다.
이 벽화는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 1점, 입불도 1점 등으로 극락보전 안쪽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삼존불화는 동쪽벽 중앙에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과 여섯 비구를 배치하였다. 배경으로는 바위산을 그려 넣었다.
본존불의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입고 있는 옷주름은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아미타래영도는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아미타불을 그렸는데 8대 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모습이다.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자연스러우며,
인물의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얼굴 표정, 움직이는 듯한 자세 등 회화성이 돋보인다.
이들 벽화 중 삼존불화와 아미타래영도 2점과 15세기 추정의 관음보살도, 당초문도 2점 등 4점은 특히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무위사극락전내벽사면벽화 (無爲寺極樂殿內壁四面壁畵) : 보물 제1315호 시대 = 조선
아미타래영도
아미타래영도는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아미타불을 그렸는데 8대 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모습이다.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자연스러우며,
인물의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얼굴 표정, 움직이는 듯한 자세 등 회화성이 돋보인다.
무위사 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 1476년 제작. 흙벽에 채색. 아미타불이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도상화(圖像化)한 것으로
원래는 극락전 서측 벽면에 있었던 것을 1976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벽채로 떼어내어 보존각에 보존하였다.
내영도는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사자의례(死者儀禮)와 깊이 관련된 것이며, 한국에 전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로탱화(甘露幀畵)라는 불화에서 내영의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감로탱화의 구도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시켜, 상단에는 극락을, 하단에는 지옥을 묘사한다.
그리고 내영의 모습도 아미타불 단독으로 맞이하는 것,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이 25보살과 함께 와서 맞이해 가는 것,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맞이해 가는 것 등이 있다.
이 내영도는 아미타불이 8보살 및 8비구(比丘)와 함께 와서 맞이하는 극락내영도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듯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둥근 육계(肉)에 중앙의 계주(珠)만 표현한 머리모양, 사각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길게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의 표현은 고려 말 불화(佛畵)의
특징이며, 군의(裙衣)를 묶은 매듭끈을 법의 자락 앞으로 대칭시켜 늘어뜨린 것은 조선 초의 특징이다.
관음보살상은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강조하였으며, 대세지보살은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었고, 무릎 부근을 구슬로 장식하였다.
그 밖의 보살들도 제각기 특징있는 물건을 들고 있으며, 지장보살의 경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두건을 쓰고 있는 점 등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점은 이들 일련의 작품이 동일 작가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보살들 위로 상체만 묘사된 8비구들은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여 전체 화면이 활기를 띤다. 화면 전체적으로 풍기는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은
고려 불화의 양식을 보여주며, 나한(羅漢)의 등장과 세부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 (無爲寺 極樂殿 白衣觀音圖) : 보물 제1314호 시대 = 조선
<문화재청의 글>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 성종 7년(1476)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수월관음벽화<무위사의 글>
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벽화. 아미타삼존 후불벽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두광(頭光)과 신광(神光)을 지고 선
수월관음이 관음보살을 예배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에는 아미타불이 묘사된 보관(寶冠)을 썼으며,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잡고 있다. 얼굴은 넓으며, 목은 굵고, 넓은 어깨가 강건함을 느끼게 한다.
주위에 물결을 묘사하여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천의(天衣) 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화면 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긴장감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보통 선재동자의 모습은 작은 동자의 모습이지만 여기에서는 승복을 입은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이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자세에서 구도자의 모습, 간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극락보전 앞 배례석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당간지주
극락보전앞 느티나무 세 그루가 웅장하다. 마치 극락보전을 수호라도 하듯이
대웅전앞에는 수령이 좀 되었을 법한 나무 세그루가 있습니다. 마치 부처님을 기다리듯 아님 극락보전을 수호라도 하듯
법당을 향해 서 있습니다.
나한상들(羅漢像) = 좌측에 있는 나한상들
약사여래불 같다. 나한 상들과 함께 생뚱맞게 이방인처럼 앉아계신다.
아마도 마땅하게 모실 전각이 없어 여기에 함께 모신것 같다.
나한전 삼존상(羅漢殿 三尊像)
나한상들(羅漢像) 우측에 있는 나한상들
나한전(羅漢殿)
월출산 산신각(月出山 山神閣)
산신탱화(山神撑畵)
미륵전(彌勒殿) 안에는 미륵불입상이 모셔져 있다.
미륵불입 상(彌勒佛立 像)
미륵불입 상(彌勒佛立 像)
명부전(冥府殿)
무독귀왕과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시왕들
천불전(千佛殿)
천불전(千佛殿)의 삼존상(三尊像)과 천불(千佛)
무위사삼층석탑 (無爲寺三層石塔)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76호
무위사 극락전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은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위층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특히 아래층에는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안상(眼象)을 세밀하게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고 평평해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쪽가에서 가볍게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세 개의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가 적당히 줄어들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비록 1층과 3층의 지붕돌이 약간 깨져 있긴 하나
대체로 원래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만든 시기는 뒤에 서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945년에 만들어짐)와 같은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고려시대 전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 글>
삼층석탑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무위사의 선각대사 편광탑비(946년) 바로 앞에 있다.
조성연대는 탑비와 같은 시대인 고려 초기로 추측된다. 전형적인 2층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제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였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의 중석이 연결되어 있다. 각구를 2구로 나누어 중앙에는 탱주 1주와,
양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다. 모서리 기둥과 탱주 사이에는 안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하대 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어 있다. 하면에 엷은 1단의 부연(附椽)을 각출하고, 상면도 역시 1단 각형 괴임대를 조각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상층 기단중석은 4매 판석으로 각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정연하다. 동서면에 벽판석이고, 남북면에는 2매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각면에 새겨진 면상은 그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볍게 반전되었다.
처마의 하면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각층 4단이다. 지붕돌 상면의 중앙에서는 1단의 각형 괴임을 각출하여 상층의 몸체를 받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 · 복발 · 구륜 · 보주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되었다.
3층 지붕돌과 1층 지붕돌 일부에서 약간의 파손을 입었을 뿐이다. 그 외의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무위사삼층석탑 (無爲寺三層石塔) 과 극락보전(極樂寶殿)
강진 무위사 성보박물관 (康津 無爲寺 聖寶博物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