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사비성 서궁 = 무관들의 집무공간과 생활문화마을

백련암 2014. 8. 6. 01:47

 

서궁(西宮)인 선광문(宣光門)

서궁은 정전과 외전인 무덕전(武德殿)은 서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무관(武官)에 관한 집무공간으로서 무덕전((武德殿)의 무(武)는 서쪽을 의미한다.

외전은 인덕전(麟德殿)으로 태평성대 나타난다는 영물(靈物)인 기린(麒麟)의 덕(德)을 의미한다.

 

 

서궁 외전 인덕전(麟德殿)

신하들의 집무공간으로 기린은 고대로부터 봉황 · 용과 함께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영물(靈物)가운데 하나로 기린(麒麟)의 덕을 의미하여

무관도 덕으로서 업무를 펼칠 것을 의미한다.

 

 

서궁 외전 인덕전(麟德殿)

 

 

인덕전(麟德殿) 집무실

 

 

인덕전(麟德殿) 어좌(御座)

 

 

서궁 정전 무덕전(武德殿)

서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공간으로 왕이 평소 무관(武官)에 관한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무덕전의 무(武)는 서쪽을 의미한다.  문(文)과 무(武),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문무를 겸횽하겠다는 백제의 통치정신을 담았다.

 

무덕전(武德殿)은 백제시대 왕궁인 사비궁 중 서쪽에 위치한 서궁전(西宮殿)의 중심건물이다.

무덕전(武德殿)은 왕이 평상시 집무를 보는 곳이며 주로 무관(武官)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앞쪽에 위치한 건물인 인덕전(麟德殿)과 구분된다.

인덕전(麟德殿)은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영물(靈物)인 기린((麒麟))의 덕(德)을 의미하며 무관(武官)도 덕(德)을 행하여야 한다는

의미로서 신하들의 업무공간이다.

이 두 건물은 왕이 있는 공간과 신하들이 있는 공간으로 구분이 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두 건물의 건축양식도 차이가 있는데

왕이 집무를 보는 무덕전(麟德殿)은 인덕전(麟德殿)에 비하여 기단이 높고, 기둥위에 45도로 돌출된 하앙을 두어 처마를 높게하였으나

인덕전()은 기단이낮고 하앙을 두지 않는 등 건물의 격에 맞게 건물의 격에 맞게 건축양식도 차별화 하였다.

 

목조건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인 대목장((大木匠)이, 단청은 중요문화재 제 48호인 단청장(丹靑匠)이,

기와는 중요 무형무화재 제 121호인 번와장(翻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인 각자장(刻字匠)이 참여하여 건축한 백제시대의 궁궐 중 

서쪽에 위치한 건물의 중심이다.

 

 

서궁 주변인 생활문화마을의 모습

 

 

서궁의 모습 생활문화  마을

서궁의 생활문화촌(生活文化村)은 백제 사비시대의 계층별 주거 유형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서궁의 한반도 연못

 

 

 

 

연못의 주인인 오리들...

 

 

온몸 날개짓으로 빛을 내뿜는 오리

 

 

 

 

군관주택(계백장군의 집)=<軍官住宅(階伯將軍의 집)>

백제 말기의 대표적 무관인 계백장군의 집을 재현한 곳이다. 서기 660년 나 · 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해오자 계백은 자신의 처자를 베고,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 명을 맞이하여 다섯 번의 전투에서 네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을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충절과 기상은 후대에도 널리 전해지고 있다.

 

 

계백의 집에 있는 숭의당(崇義堂)

 

 

귀족주택(사택지적댁) =<貴族住宅(砂宅智積宅)>

백제 귀족의 주택으로, 백제 말기에 대좌평을 역임하였던 사택지적의 가옥을 재현한 곳이다.

대좌평은 제 1의 관등인 좌평 중 최고에 해당하여 여덟개의 큰 귀족 가문 가운데에서도 사(택)씨가 최고였다.

최근 발견된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도 사택씨였음이 밝혀졌다.

 

 

 

 

공동우물

 

 

 

 

위례성 생활문화의 마을

위례성은 백제 한성시기(B.C. 18~ A.D. 475년)의 도읍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왕이 터전(한성)을 잡은곳으로 비류의 미추홀을 통합하고 난 후 백제의 수도로 자리한 곳이다.

지리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는데 유리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백제가 성장하는데 큰 기반이 되었다.

 

 

위례성남문

 

 

안에서 본 위례성남

 

 

위례성안 망루(전망대)모습

 

 

 

개국공신 마려의 집(開國功臣 마려의 집)

온조왕을 따라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신하인 마려의 집을 재현한 곳이다.『삼국사기(三國事記)』에 의하면 마려 외에도 오간 등

열 명의 신하가 동행하였다 한다. 본 가옥은 당시 귀족이 사용하던 주옥과 노비들이 거처하던 부옥으로 구성하였으며,

백제 지배층의 권위와 취향을 나타낼 수 있는 집기와 장신구들로 재현하였다.

 

 

산위에 보이는 제향루

 

 

 

 

 

하늘에 올리는 염원 =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삼국시대의 문화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호연하고, 신라 문화는 토착적이고 소박하지만, 백제 문화는 귀족적이며 우아한

고급문화가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백제는 초기에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웅진시대부터 정치적인 관계가 끊어지면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중국의 남조 문화가 백제의 문화와 예술의 발달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백제에는 탑 · 불상 · 절과 같이 불교 중심의 문화재가 많고 무령왕릉, 공산성, 송산리 고분 등에서 나온 벽화나 정림사지 석탑,

금동 대향로 등을 볼 때 섬세하고 우아한 멋을 발견할 수 있다.

 

흔히들 백제 문화를 이를 때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라고 표현한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않다."

는 뜻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백제본기 온조왕 15년조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배게를 보기 위하여 세번째 부여를 방문한 지난 2013년 가을

나는 부여박물관에서 백제 문화의 진수라 할 수 있는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를 만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그때 박물관에서는 "하늘에 올리는 염원, 백제금동대향로"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시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국보 제 287호로서 전체 높ㅍ이 64cm, 지름 20cm이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의 회랑 부근에 위치한 건물터 바닥 구덩이에서 진흙 속에 묻힌 채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대형 향로(香爐)이다.

부여에서 논산쪽으로 가다보면 사적 14호로 지정된 능산리 고분군이 보인다.

왕릉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구려와 교류를 보여주는 사신도도 그려져 있어 찾는 사람이 많게되자 고분군 서쪽에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당시 어느 뜻있는 분이 발굴 조사를 간곡히게 요청하였다.

어럽사리 이루어진 발굴 조사에서 금동대향로는 완벽한 상태로 1400여년 만에 우리에게 돌아왔다. 1993년 12월 22일의 일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

금동대향로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

연화화생이란 연꽃에 의하여 만물(萬物)이 신비롭게 탄생되는 생명 관을 말한다.  이 향로는 신산(神山)인 박산을 표현한 것이지만

향로에 표현된 용 · 봉황 · 연꽃 · 산 그리고 수많은 물상(物像) 모두가 이 연화화생과 직 · 간접적으로 관련된다.

연화화생의 중심을 이루는 연꽃은 이 향로의 경우 동체(胴體)인 연꽃봉오리이다.

그런데 연꽃은 물속에 뿌리를 박고 물 위로 꽃을 피우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향로에서의 연꽃은 용을 통하여 물속과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이 향로의 연꽃은 용의 입과 연결되고 있다. 이 연화는 단순히 용의 입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바로 동아시아의 신수(神獸)인

용의 입에서 피어나는 기(氣)이다. 결국 용과 연꽃이 상호 동격인 것이다.

용의 입에서 화생된 이 향로의 연꽃은 노신(爐身)에서 보듯 만개한 연꽃이다. 그런데 이 만개한 연꽃은

뚜껑 부위에서는 산(山)으로 화생(化生)하고 있다.

 

이 산은 신선세계의 중심인 산(山),  박산(博山)이다.  결국 박산이 연꽃에 의하여 화생된 것이다.

신선사상에는 음양오행설도 포함되고 있다. 이 향로에서 음양관은 맨 정상에 봉황을 배치하여 양을 상징하고,

맨 아래에 용을 배치하여 수중세계이자 음을 상징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오행관은 뚜껑의 산이 5방위로 또 5단으로 솟았으며 또 각 단은 5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5곳의 박산문(博山文)을 남긴 것,

원앙 5마리, 악사(樂士) 5인, 5개의 구멍을 2겹으로 뚫은 향연구멍(香煙穴) 등으로 반영되었다.

신선세계 또는 신선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도교(道敎)에서는 의례히 향을 피우며 음악이나 춤이 동반함을 본다.

이 향로의 악사도 같은 차원에서 즉 신선세계의 음악의 연주자로서 등장한 것이라고 본다.

또 악사는 예로부터 음악을 동반하며 나타내던 봉황 즉 이 향로 정상의 새와 관련된다.

즉 봉황이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을 추자 이에 동반하여 악사가 선계(仙界)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악기를 정면에서 왼쪽으로 살펴보면 커다란 둥근 몸체에 기둥이 꽂혀 있는 현악기는 우리나라의 ‘월금(月琴)’이나  중국의 "완함(阮咸)"

흡사하다. 세로로 불고 있는 관악기는 ‘종적(縱笛)’이다가늘고 길이가 다른 관(管)을 여러 개 묶은 관악기는 ‘배소(排簫)’이다.

배가 불룩하고 양쪽이 좁아지는 몸통 위에 두 손을 얹고 있는 현악기는 ‘琴(금)’으로 보인다.

한 손으로 윗 판을 들고 있는 타악기는 ‘동발(銅鉢)’로 보여 진다.

 

동체를 연꽃봉오리 형으로 뚜껑을 산 모양(山形)으로 만든, 그리고 유달리 봉황(鳳凰)과 용(龍)을 돋보이게 배치한 이 박산향로를

일명 용봉봉래산향로(龍鳳蓬萊山香爐)라고도 부르고 있다.

여기서 종래 흔히 불리던 박산이라는 명칭보다 봉래산(蓬萊山)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은 향로의 박산이 일찍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 쪽에

있다는 상상의 신산(神山)인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키고, 또 그 삼신산 가운데서도 봉래산을 가장 많이 언급함에서이다.

결과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이상향으로 알려진 봉래산이란 이름을 이 향로에 부여한 것이다.

이 향로는 같은 박산을 표현한 6세기 전반(前半)에 제작된 백제 무령왕릉 출토 동탁은잔이나 7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부여 외리 출토 백제문양전과 비교하여 볼 때 더욱 다양하면서도 세련되고 발전된 모습이다.

따라서 이들보다 이 향로는 약간 시대가 내려가는 7세기 전반(前半)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세부사항

능산리사지 공방지에서 출토된 박산향로이다. 중첩된 산위에 봉황(鳳凰)이 앉아있는 형태의 뚜껑과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체(爐身),

용(龍) 모양의 받침(器臺[기대])으로 구성된 백제향로는 이 세 부분을 따로 정밀 주조하여 용이 문 간주(竿柱)를 몸체 하부

가운데 구멍에 끼워 넣은 후 그 바깥에 짧은 관을 덧씌워 받침과 몸체를 연결시켰다.

향로의 뚜껑에는 다섯 방향으로 쌓아올린 봉우리에 다양한 자세의 인물들과 상상의 동물, 그리고 호랑이, 멧돼지 등의

맹수를 나무와 바위, 시냇물과 산길을 배경으로 묘사하였다.

 

 

발견당시의 모습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의 회랑 부근에 위치한 건물터 바닥 구덩이에서 진흙 속에 묻힌 채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대형 향로(香爐)이다.

 

 

뚜껑

 

몸통

 

몸통

 

용 받침 = 연꽃에 장식된 노산과 이를 물고 있는 용받침이다.

 

 

玄琴(현금)

백제금동대향로는(위에 사진) 네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맨 위의 봉황과 뚜껑의 산악도, 그리고 연꽃에 장식된 노산과 이를 물고 있는 용받침이다.

그리고 맨 위의 봉황과 뚜껑의 산악도는 하나의 주물로 만들어져 있고, 따라서 향로는 본래 세 부분으로 분리되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는 가운데 태두리의 "흐르는 구름문양"을 경계로, 위쪽의 삼산형 산악도와 아래쪽 연지의 수상생태계로 나뉘어 있는데,

산악도에는 삼산형 산들을 배경으로 기미수렵 인물들을 포함한 신선풍이 인물들과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곳곳에 장식된 폭포, 나무들, 불꽃문양, 귀면상 등은 산악도의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으며,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산에는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춤을 추고 있고, 봉황의 바로 아래에는 5악사가 완함 등

서역 악기를 연주하며 둘러앉아 있으며 다시 그 주위에는 다섯 봉우리에 다섯 마리의 새가 봉황과 함께 너울너울 춤추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 초에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 금속공예품예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백제금동향로를 만난 날, 나는 전시된 향로를 얼마나 들여다 보았는지 모른다.  이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향로에서

그 당시 백제인들이 가졌던 수준 높은 종교적인 신앙심과 사상을 생각하며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백제인들을 비로소 만나게 된 것이었다.

글 = 普願 宋源(보원 송원) 서산 부석사 월간지 6월호에서

 

 

◈찾아오는 길 = 기차, 버스

   서울→논산→시내ㆍ외버스→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