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궁남지 = 연꽃들의 향연
궁남지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입니다. 무왕이 아들인 의자왕에게 통치권을 넘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 중 하나가
궁의 남쪽에 인공연못과 인공산을 만든 것입니다.
궁남지의 이름은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三國史記[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라하여 사가의 작은 정원을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아직도 당시의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밝혀진 규모를 감안해서 살펴보면 아마도 연못 크기만 1만 평 ~ 3만 평 정도가
됐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이 연못에 대해서는『三國史記[삼국사기]』 武王條(무왕조)의 "3월에 宮城(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병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方丈仙山(방장선산)를 본떴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를 통해 백제가 삼국 중에서도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화
서동요, 바로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노래이다. "마를 태던 소년이 서동요를 불러 신라의 공주를 신부로 맞이했다."는
이야기로 더 잘 알려진 무왕, 서동요는 무왕이 소녀시절에 서동으로서 선화공주를 얻으려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 노래인데,
바로 이곳 궁남지에서 그 이애기를 한 번 더 느낄 수 있다.
武王條(무왕조)의 궁남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다.
무왕의 부왕인 法王(법왕)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 가에서 홀로 살다 龍神(용신)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新羅 眞平王)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善化公主)와 결혼한 薯童(서동)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이곳이 별궁 터 였고 궁남지가 백제 무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별궁의 연못이였음을 추측하게 한다.
궁남지는 백제의 조셩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사적으로『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백제의 상징인 百濟金銅大香爐(백제금동대향로)
百濟金銅大香爐(백제금동대향로)
서동과 선화공주 사랑이야기
포룡정
개구리마차
돗단배
용을 품었다는 抱龍亭(포룡정)
황금련
꽃 가운데 군자
송나라 선비 주돈이는 애련설에서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그것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의 순결하고 고상한 품격의 모습을 칭송하여
꽃 가운데 군자라고 하였다.
정약용 선생은 선비들과 함께 죽란시사라는 모음을 만들어 계절에 따라 정적인 풍류를 즐겼는데 연꽃피는 계절이면
이른 새벽에 연지에 나가 꽃피는 소리를 듣는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이처럼 연꽃은 선비다운 태도나 풍류를 상징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빅토리아 연
물에 떠 있는 거대한 쟁반 같은 빅토리아연은 1801년 남아메리카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는데 현재 아마존강 유역에서 많이 자생하고 있다.
어린이가 올라가도 가라앉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자라며 꽃은 흰색 또는 붉은 색으로 밤에만 개화한다.
빅토리아연은 거대한 잎과 멋있는 테, 아름다운 꽃으로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으나 번식이 어려워 국내에서는 2~3곳에서만 제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