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사의 벽화들과 유마사
쌍봉사는 정확한 역사를 알기 어렵다. 곡성 태안사에 있는 혜철스님 부도비에 "신라 신무왕 원년(839년)에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구절이 있어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후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철감선사가 절을 맡았다. 철감선사 밑에서 공부한 징효대사가 강원 영월의 사자산에서
법흥사를 짓고 사자산문을 일으켰으니 철갑선사는 사자산문의 개조이고 쌍봉사는 그 모태가 되는 절이다.
쌍봉사의 독특한 양식의 대웅전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과 함께 한반도에 단 두 개 밖에 없는 희귀한 양식이다.
그래서 1936년에 일찌감치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1984년 한 신도의 부주의로 불에 탔다.
지금의 건물은 1986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한 것이다. 기단 돌에 검게 그을린 자국이 있다. 아쉬움을 더한다.
쌍봉사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가장 높은 것은 절 뒤에 있다. 철감선사탑과 탑비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도탑과 탑비로 평가받고 있다.
부도탑은 팔각원당형이다. 사자, 연꽃, 신장, 천인 등 돌에 새겨놓은 각종 조각이 일품이다.
그 옆으로 탑비가 있다. 현재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고 비신을 유실됐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비신을 없애 근처 땅에 묻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탑비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거북의 형상이다. 1,000년을 훨씬 넘은 돌거북이 살아 움직일 듯하다. 돌을 떡주무르듯 한 석공의 예술혼을 짐작할 수 있다.
절 마당 한쪽 언덕으로 대나무숲이 있다. 사람 키의 서너배는 됨직한 굵고 긴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긴 겨울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았다.
나한전 벽화
원효대사이야기
원효대사(617~686)는 신라말기의 고승으로 압량군(押梁郡) 남불지촌(南佛地村) (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명(俗名)은 설 서당(薛 誓幢)대사는 출가한 이후 특별한 스승이 없이도 쉽게 경전에 통달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찍이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어느 날 날이 저물어 산중의 무덤사이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원효는 잠을 자다 몹시 갈증이 나서 일어나 물을 찾던 중 바가지에 물이 있어 단숨에 마시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어젯밤에 마셨던 물을 찾으니 물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사람의 해골이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해골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썩은 빗물이 고여 있었다.
원효는 어제 밤에 달게 마셨던 물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고 말았다.
‘모르고 마실 때에는 달콤했던 물맛이 해골에 고인 빗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럽다고 구역질을 느끼다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구나
’ 이렇게 생각하다 활연 대오하였다.
心生則種種法生 (심생칙종종법생) 心滅則髑髏不二 (심멸칙촉루불이)
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유심만법유식) 心外無法胡用別求 (심외무법호용별구)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의 물과 깨끗한 물이 둘이 아닌 법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임을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하리요.
다음날 “이미 道를 구하였으니 당나라까지 가서 법을 구할 것이 없다”라고 하며 의상대사와 헤어졌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세상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며,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설총을 낳은 이후 환속하여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이르며 대중교화에 나섰다.
불쌍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믿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저자거리를 떠돌며 노래와 춤으로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었는데 이는 중생을 위한 무애(無碍)행이었으며 자비를 실천한 보살행이었다.
대사는 존경받던 고승이요 세계적 저술가로서 80여부 200여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현재 20부 22권이 남아있다.)
또한 불교계의 여러 편견으로 비롯되는 논쟁들을 서로 화합하여 회통시키는 화쟁사상을 주장했던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원효대사!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들이 만나고 싶고, 닮고 싶은 보살의 한분이시다.
달마대사의 면벽
달마대사는 중국에 처음으로 선불교를 전파하여 선종(禪宗)의 시조(始祖)가 된 분이다.
보리달마(菩提達磨)는 범어(梵語) 보디다르마를 음사(音寫)한 것으로, 줄여서 달마라고 불렀다.
그는 본래 남인도 향지국(香脂國)의 셋째 왕자로 이름은 보리다라였으며.
국왕이 돌아가시고 출가하여 인도 선종의 제27대 조사인 반야다라존자의 제자가 되었다.
“그대는 이미 모든 진리에 통달했다. 이제 그 뜻의 이름으로 보리달마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존자의 인가를 받으며 달마대사는 선종 제28대 조사가 되었다.
반야다라존자는 “전법을 위해 곧바로 멀리 가서는 아니 되며 당분간 남인도에 머무르다,
내가 열반에 들고 나서 예순일곱 해가 지난다음 동쪽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상근기의 사람들을 가르치되 남쪽으로 가서는 아니 되며, 가더라도 오래 머물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스승의 뜻을 받들어 남인도에서 대중을 교화하던 달마대사는, 존자가 입적한지 67년이 지나자 마침내 때가 되었음을 알고 중국으로 갔다.
양(梁)나라의 왕 무제(武帝)는 중국 역대 제왕 가운데서 가장 불교를 외호했으며, 불심천자(佛心天子)로 칭송을 받고 있었다.
광주 금릉에 달마대사의 도착소식을 들은 무제는 대사를 모셔와 물었다.
“짐은 즉위 이래 수많은 불사(佛事)를 했으며, 승려들에게 공양해왔소. 그 공덕이 어떠한가?”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다는 말이오?”
“그것은 단지 인천(人天)의 작은 결과로 얻는, 유루(有漏)의 원인이 될 뿐이니 형상을 따르는 그림자와 같아서 참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참다운 공덕이오?”
“지혜는 오묘하고 원만하여 공적(空寂)한 것이니, 이와 같은 공덕은 세상의 이치로는 구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인가?” “성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짐을 마주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 “모릅니다.”
대사는 양 무제와의 인연이 다함을 알고 그곳에 자신의 불교를 펼칠 때가 아님을 느꼈다.
달마대사는 위나라를 떠나 숭산 소림사에서 아홉 해 동안 면벽좌선을 하며 인연이 성숙하기를 기다렸다.
구품상생도(九品上生圖),구품왕생도(九品往生圖) 관 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극락정토는 수행의 정도에 따라서 등급이 있다고 했다. 부처나 보살(菩薩) 위(位)에 오른 상품상생(上品上生)으로부터 아래로 아직도 육신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최하등위인 하품하인 우리 중생들까지 구품이 있다. 즉 상, 중, 하품의 각 품에서 각각 상생 ‧ 중생 ‧ 하생으로 나누어 구품이 있다. 물론 인간계 이하의 아귀(餓鬼)나 지옥(地獄)은 면한 것이다. 구품연화(九品蓮花)는 아래 하품 하생부터 위로 상품 상생까지 도달하는 세월이 약 십이 겁이 걸리고(일 겁은 약 1,679만8,000년) 하품하생의 왕생 자가 상품상생에 도달하자면 2억 157만 6000년의 시간이 걸린다. 중품상생은 자금대, 중품중생은 칠보연화, 중품하생은 연화, 하품상생은 금련 대, 하품중생은 밝혀져 있지 않으며, 하품하생은 금련 화에 앉아 왕생한다고 합니다. 그 크기가 다르며 이 속에 왕생한자가 자기의 연꽃 내에서 각종 망상을 일으키면 연꽃이 시들고 광채가 없어지며 망상이 없는 자는 연꽃이 문득 찬란한 빛을 내뿜는다고 한다. 그림에서 보듯 구품 왕생 도는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이를 위해 타인의 왕생하는 모습을 보게 하는 관법(觀法)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상품 중생(上品中生) 인과를 깊이 믿고 대승을 비방하지 않으며, 이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세계에 나고자 원하는 이를 말한다. 그의 앞에 나아가 찬탄하신다. "법의 아들아, 너는 대승을 수행하여 가장 뛰어난 도리를 알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너를 맞아들이노라"고 하면서 일천 화신불과 함께 일시에 손을 내민다. 이 붉은 금대는 마치 커다란 보석의 꽃처럼 생겼다. 하루 밤을 지나 꽃이 피면 수행자의 몸은 붉은 금색으로 된다. 전생에 익힌 업력으로 여러 가지 소리를 들으면 곧 미묘한 도리를 설하고 있음을 안다. 그는 금대에서 내려와 부처님께 예배하고 찬탄한다. 이레를 지나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는 다시 퇴전하는 일이 없게 된다. 부처님 앞에서 수기를 받는다. 이것을 상품 중생자라 한다. 상품 하생(上品下生) 인과를 믿고 대승을 비방하지 않으며 위없는 보리심을 내고 이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세계에 가서 나고 자 하는 이를 말한다. 이 수행자가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여러 보살들과 함께 황금 연꽃을 가지고 오백 화신불을 나투어 맞으러 온다. 오백 화신불은 일시에 손을 내밀고 칭찬한다. "법의 아들아, 너는 이제 청정하여 위없는 보리심을 냈기에 내가 와서 맞이하노라." 하루 낮 하루 밤을 지나 연꽃은 다시 피고 이레 동안 부처님을 불 수 있다. 부처님의 몸을 본다고는 하지만 그 상호가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시방세계를 다니면서 부처님을 공양하고 부처님 앞에서 깊은 뜻을 지닌 교법을 듣고 삼 소겁을 지난 뒤에야 백 가지 진리에 통하는 지혜를 얻어 환희의 경지에 머무는 것이니, 이를 상품 하생자라 한다. 이것이 상배(上輩)에 왕생하는 생각인데, 이를 열네 번째관이라 한다." 마왕 파순이 딸들<열비(悅妃), 희심(喜心), 다미(多媚)>로 하여금 마녀로 변신케 하여 부처님을 유혹하는 모습 ◈화순 유마사◈
유마사는 화순군 남면 유마리 모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승보종찰 송광사의 말사입니다. 광주 벌교간 도로에서 이정표를 따라 약 6키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복읍지』『유마사향각변건상량문』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 무왕 28년(627년)중국 당나라의 고관이었던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하였습니다. 그가 수행하기 위해 지은 암자가 지금의 귀정암의 옛터로서 뒤쪽에 아직도 유마운 탑의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유마운의 딸 보안보살 역시 불법을 깊이 깨달았는데 동복 이서면의 보산 뒤에 보안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유적은 남아 있다고 합니다. 현재 유마사 경내에는 보안보살이 체로 달을 건져 올려 비구승을 공부시켰다는 제월천과 보안보살이 치마폭에 싸 옮겨 놓았다는 보안교(普安橋)가 1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 뒤 유마운을 이은 선사가 잇달아 나타나 부근에 귀정암, 사자암, 금릉암, 은적암, 운성암, 동암, 오미암, 남굴암 등 의 8암이 있었으며 승려들의 수도장으로 이용하였다 합니다. 17세기 무렵 경헌(1542-1632)스님이 절을 중건했고 그로부터 50년 뒤에 가안선사가 나한상을 만들었는데 가안선사가 만든 나한상은 특히 뛰어나 세상에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고 전합니다. 이어서 1889년(고종26년) 전라도 관찰사인 김규홍(1845)이 절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향화가 계속 이어진 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유마사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보안 처녀와 그를 겁탈하려는 젊은승과의 한판 승부에서 제월천에 잠긴 달을 건져 젊은승을 굴복케 한 이야기 그리고 보안 처녀가 치마로 싸다가 놓았다는 보안교의 전설은 지금도 이곳을 들르는 이들에게 옛 사람의 정취를 묻어나게 하고 있다. 이곳에는 보물 제 1116호로 지정된 해련선사의 부도와 모후산에 사는 듯한 산짐승들이 기단을 받치고 있는 부도가 절 입구에 있다. 유마사는 627년(백제 무왕 28)에 당나라에서 온 유마운 스님이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해련 스님의 부도와 고려청자편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그 법통이 꾸준히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마사와 관련된 기록은 1915년의 『동복읍지』와 금명보정 스님의 문집 『다송문고』에 수록된 「유마사향각창건상량문)」 「모후산유마사신창염불당천일기도결사]에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이들 자료를 중심으로 조선중기 이후의 연혁을 살펴보면, 1656년(효종 7)과 1670년(현종 11)에 각각 중건하였으며, 1879년(고종 16)에는 김경담과 김규홍이 향당을 신축하고 당우들을 중수하였다. 극락전ㆍ명부안ㆍ염왕전ㆍ응진당 등의 법당명이 언급되고 있으나 이때 이미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0년 이전까지만 해도 귀정암ㆍ금릉암ㆍ운성암ㆍ사자암ㆍ오미암ㆍ은적암ㆍ남굴암ㆍ동암의 암자가 있었던 점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유마사는 화순군 남면 유마리 321번지 모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승보종찰 송광사의 말사입니다. 광주 벌교간 도로에서 이정표를 따라 약 6키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복읍지』『유마사향각변건상량문』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 무왕 28년(627년)중국 당나라의 고관이었던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하였습니다. 현재 유마사 경내에는 보안보살이 체로 달을 건져 올려 비구승을 공부시켰다는 제월천과 보안보살이 치마폭에 싸 옮겨 놓았다는 보안교(普安橋)가 1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현존하고 있습니다. 승려들의 수도장으로 이용하였다 합니다. 17세기 무렵 경헌(1542-1632)스님이 절을 중건했고 그로부터 50년 뒤에 가안선사가 나한상을 만들었는데 가안선사가 만든 나한상은 특히 뛰어나 세상에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고 전합니다.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퍼온 글입니다> 유마사로 들어가는 옛 일주문의 모습이 정겹다. 보안교 :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 30호 시대 = 조선 19세기 후반(1919년 이전) 보안교는 절에 들어가는 입구 계곡 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그 옆에 일주문이 지어져 있다. 다리는 좁지 않은 계곡을 하나의 큰 돌로 가로질러 놓아 계곡의 동서 양편을 연결하고 있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크기는 가로가 가장 좁은 동쪽은 200cm이고, 넓은 서쪽은 315cm에 이른다. 세로는 약 510cm이고 두께는 55cm로 윗면을 잘 다듬어져 있다. 다리 위에는 두개의 명문이 있는데 계곡 아래쪽에 "維摩洞 天普安橋(유마동 천보안교)"가 계곡의 북쪽에 "觀世音菩薩 梁蓮浩(관세음보살 양연호)" 라고 쓰여있다. 글씨의 크기는 17- 24cm이다. 관세음보살의 옆에는 한글로 "관세음보살"이라고 쓰였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白雲居士書(백운거사서)"라고 쓰여 있다. 보안교는 형태는 널다리 양식이지만 여러개의 돌을 결구하지 않고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다리와는 다르다. 따라서 건립시기를 추정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보안교에는 유마사의 창건주 유마운의 딸인 보안이 놓았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보안교가 유마사 기록중에 나타난 것은 1919년에 쓴「동북군 유마사 봉향각 창건 상량문」에서이다. 따라서 보안교는 1919년 이전에는 놓여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에 김영운 주지가 원래 다리에 서쪽에 있던 좁은 절터에서 더 넓은 편펑한 땅(현재 유마사 위치)으로 건물터를 옮긴 것은 다리를 건너기 용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순 유마사 해련탑 (和順 維摩寺 海蓮塔) : 보물 제1116호 시대 = 고려시대 탑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유마사로 오르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탑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해련스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윗면에는 활짝 핀 꽃조각이 있다. 가운데받침돌에도 큼직한 안상을 새겨 두었으며, 탑신을 직접 받치는 윗받침돌에는 커다란 연꽃잎조각을 둘러놓았다. 탑신의 몸돌에는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겨 두었는데, 앞면에 새긴 문에는 문고리까지 장식되어 있고 그 윗부분에 '해련지탑(海蓮之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넓직한 3단의 받침이 있으며, 8각의 모서리는 두툼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단부의 모습이나, 탑신에 새긴 여러 조각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의 글> 화순 유마사 해련탑 (和順 維摩寺 海蓮塔) : 보물 제1116호 시대 = 고려시대 유마사는 중국 당나라 사람 유마운이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해련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때 모두 불 타버려 다시 지은 것이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신앙대상물이된다. 이 부도는 팔각지대석 위에 안치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로 팔각의 기단부 위에 팔각의 탑신석(몸체돌)과 지붕돌(옥개석)을 차례로 놓았다. 원래 절 입구 서쪽 기슭에 있었으나 1981년 현 위치로 옮겼다. 부도는 해련스님의 탑으로 건립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유마사의 글> 입석(立石) 1861년(철종 12년)에 조성된 현감 정원필의 영세불망비 이다. 경헌선사탑(敬軒禪師塔) 경헌선사 부도 : 석종형으로 방형 지대석과 하대석은 단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에는 복련이 조식되어 있으며, 네 모서리의 서쪽에는 멧돼지, 남쪽과 북쪽은 사자, 동쪽에는 호랑이가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종형으로 상륜부와 탑신이 한돌이며, 팁신의 곡선은 완만하다. 표면에는 2개 유곽, 그안에 9개 유두를 돌출하였다. 탑신부의 중앙에는 "敬軒丈老之塔(경헌장로지탑)"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탑신 상단에는 어개띠를 두었다. 가안선자지탑(可安禪子之 塔)부도 가안선자(可安禪子)부도, 석탑부재와 섞여 있어 본래의 모습을 아닐 것이다. 지대석은 3단층급의 석탑 옥개석을 뒤집어 놓았다. 그 위에는 11엽 앙련을 양각한 탑신 괴임을 두었다. 옥개석도 지대석처럼 층급받침이 3단인 탑 옥개석을 올리고, 그 위에 석탑 삼층 옥개석으로 보이는 부재를 꺼꾸로 올렸다. 탑신은 세장하고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며, 중앙에 가안선자지탑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탑신받침은 연꽃잎 안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겼다. 가안선사의 행적은 전하지 않으나 부도 부재로상용된 석탑옥개석으로 미루어 유마사에는 3층 석탑이 유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설= 관세음보살을 사랑한 스님, ‘부전’ 그의 딸 보안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큰 절이었다. 고려 때는 귀정암과 금릉암 등 8개의 암자를 거느린 호남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이었다. 규모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못 되고, 지금 절의 규모가 작아졌다고 심상해 할 건 없다. 마음을 잡는 것은 미세한 결이며 스민 감정이다. 핵심만 옮기면 이렇다. 보안의 아버지 유마운은 요동의 태수였다. 많이 죽여 재물을 얻었고, 보안의 청에 의해 그것을 뉘우친다. 전부 가난한 백성들에게 내놓고 길을 떠난다. 걷고 걸어 국경의 강을 넘었고, 모후산 아래까지 왔다. 거기 절을 지어 법당을 지킬 스님 하나를 들였는데 그가 부전 스님이다. ‘발원을 등지고 윤회(輪廻)의 강에 탐닉하는 것은 짐짓 불자의 바른 행위가 아닌 줄 아오나, 스님께서 정히 그렇게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아까워 드리지 못할 것이 없사오니, 내일 저녁 열두시에 아랫마을 하천(河川)으로 나와 주십시오.’ 그 밤 부전은 나왔고, 보안은 채 하나를 건넸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스님, 저 물 속에 둥근 달이 보이지요? 저 달을 이 채로 건져내는 것입니다. 스님이 달을 건지고 제가 그 달을 건져도 좋고, 둘이 다 건지지 못하여도 또한 좋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건지지 못하고 제가 건지게 된다면 우리들의 약속은 멀어지는 것입니다.” 상심한 부전은 사랑의 병이 깊어 많이 아팠다. 그 병을 낮게 해줄 수 있는 건 보안뿐이었다. 어느 날 보안이 아파 누워있는 부전을 찾았다. 보안은 법당 안에 모셔진 탱화를 뚝 떼어 마룻바닥에 깔고 옷을 벗었다. 그러나 부전은 옷을 벗지 못했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스님이 탱화를 깔고 누울 수는 없었던 탓이다. 보안이 노하며 말했다. “너는 만들어 놓는 그림에 불과한 부처는 무섭고,
진짜 살아있는 부처는 무섭지 않느냐?” 그리고는 백의관세음보살로 변해 하늘로 날아갔다. (2) 달 대신 물 위에 뜬 애기단풍 바위는 모후산에서 옮겨왔다 전한다. 거기에도 전설 한 토막이 깃들어 있는데, 바위를 옮기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해 보안이 치마폭에 싸서 거기 옮겨 놓았다 한다. 보안의 아버지 유마운의 것으로 전해지는데 상륜부는 세월 아래로 사라지고 없다. 바로 곁에 경헌대로사리탑(敬軒大老舍利塔)이 있다. 부도의 모양이 조금 독특하다. 지대석과 단일석으로 이루어진 하대석 네 귀퉁이에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서쪽은 멧돼지, 남쪽과 북쪽은 사자, 동쪽은 호랑이다. 무등산 원효사 동부도의 조각과 비슷한 형식이다. ▶※유마사 주변에는 알 수 없는 정리되지 않은 부도가 좀 흩어져 있다.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세월이 느껴지지 않고 정신이 없어 실망하고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찾아가는 길 ▶자가용 = 광주에서 너릿재 터널 지나 화순읍 너머 능주 방면에서 이양으로 간 후, 이양면 금륭리 삼거리에서보성 복내 방면으로 가는 지방도로 818호선을 따라 좌회전하면 쌍봉사를 만날 수 있다. 또 다른 방향 = 다른 길로는 이양면 소재를 경유 보성 방면으로 가다보면 매정 1구 삼거리 방면에서 좌회전 후 직진하는 방법이 있다. 광주⇛(12km)⇛ 화순⇛(10km) 능주⇛(4.1km)⇛ 춘양⇛(11.5km)⇛ 이양 ⇛(4.2km)⇛ 매정 삼거리⇛(5km)⇛ 쌍봉사 = 총46.8km ▶대중교통 = 전남 광주역에서 화순 군내버스(218번)가 쌍봉사까지 운행하고 있다. 불회사 또는 운주사까지도 가는것이 있으니 꼭 물어보고탈 것 그래야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소요시간 1시간 이상 걸림 광주에서 = 광주광천동 터미널 앞 ⇛ 광주상공회의소 ⇛ 백운동로타리 ⇛ 남광주로타리 ⇛ 학동정유소 ⇛ 화순읍군내버스터미털 ⇛ 능주 ⇛ 춘양 ⇛ 이양 ⇛ 매정리 ⇛ 쌍봉리 ⇛ 쌍봉사 ▶2차 = 기차(KTX)= 용산역 ⇛ (소요시간 3시간 10분) ⇛ 광주역도착 ⇛ 시내버스 151번을 타고 사평까지 와서 유마사 입구까지 택시를 탄다. 혹은 광주역하차 후에 광천터미널에서 유마사 입구까지 오는 버스가 하루에 4번 운행한다. 시간표 = 광천터미널 ⇛ 유마사(217번) 시간 : *오전 6시 25분, 10시 10분, *오후 12시 55분, 4시 5분 유마사(217번)에서 ⇛ 광주 광천터미널 시간 : *오전 8시 10분, 11시 45분, *오후 2시 35분, 6시 20분
하품 하생 자 (下品下生者)는 사바세계에 있을 때 정토(淨土)에 태어나기를 원하여 일심(一心)으로 염불하였기에 업(業)을 지녔지만 왕생한 중생이다.
그러나 우리 사바세계에서 결정 심을 지니고 수련하면 35년 안에 문득 중품 혹은 상품 혹은 성도(成道)에 도달할 수 있다 한다.
구품왕생아미타경에 의하면 연화 화생하는 9품의 연대를 나누어 놓았는데, 상품상생은 금강 대, 상품중생은 연화대, 상품하생은 보련 화,
극락세계는 오직 낙(樂)만 있고 고(苦)는 없다. 하품하생의 연꽃은 우리 인간의 연꽃과 같지 않고 일리(一里)에서 삼리(三里)가지 굵기에 따라
"상품 중생자(上品中生者)"란 반드시 대승경전을 배우거나 독송하지 않더라도 그 뜻을 잘 알고, 최고의 진리를 들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며,
이 수행자가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에 아미타불은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한량는 대중과 함께 권속들에게 둘러싸여 붉은 금대를 가지고
수행자가 자기 몸을 돌아보자 붉은 금대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합장하고 부처님을 찬탄하면 순식간에 저 불국토의 칠보 연못 속에 태어난다.
발밑에 또 칠보 연꽃이 있고, 부처님과 보살이 동시에 광명을 놓아 그의 몸을 비추면 눈이 띄어 둘레가 환해진다.
수행자는 마음대로 시방세계를 날아 다니면서 부처님을 섬기고 그곳에서 삼매를 닦아 한 소겁(小劫)을 거친 뒤 무생법인을 얻고,
"상품 하생자(上品下生者)란",
이 때 자기 몸을 돌아보면 벌써 황금 연꽃에 앉아 있고, 앉자마자 꽃은 오므라들고 부처님을 따라 철보 연못 속에 태어나 있다.
세 이레<3일>가 지난 다음에야 분명하게 불 수 있고 여러 가지 음성이 모두 뛰어난 법을 설하고 있다는 것도 듣게 된다.
그가 수행하기 위해 지은 암자가 지금의 귀정암의 옛터로서 뒤쪽에 아직도 유마운 탑의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유마운의 딸 보안보살 역시 불법을 깊이 깨달았는데 동복 이서면의 보산뒤에 보안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유적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뒤 유마운을 이은 선사가 잇달아 나타나 부근에 귀정암, 사자암, 금릉암, 은적암, 운성암, 동암, 오미암, 남굴암 등의 8암이 있었으며
이어서 1889년(고종26년) 전라도 관찰사인 김규홍(1845)이 절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향화가 계속 이어진 것을
전형적인 8각 사리탑으로,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은 옆면에 안상(眼象)이 얕게 새겨져 있고,
도굴범들에 의해 훼손되어 구조물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81년 화순군에서 복원하였다고 한다.
말끔한 새것의 건물이지만 유마사는 백제 무왕의 시절인 627년에 지어진 절이다. 전설인지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국에서 건너온 유마운(維摩雲)과
보안의 전설을 시작할 차례다. 그것이 유마사를 이해하는 가장 적확한 코드다. 시간은 전설의 덩치를 불려 놓았고, 전부를 가져올 수는 없다.
몇 해가 지나고 유마운은 죽었다. 보안과 부전만 절에 남았다. 보안은 부전의 사랑을 알았다. 어느 밤 보안은 부전에게 편지를 썼다.
모두의 짐작대로 부전 스님은 채로 달을 건져내지 못했고, 보안은 아주 쉽게 건져냈다. 같은 채인데 보안이 들었을 때 채는 물이 새지 않았다.
유마사에 가면 보안부터 만나게 된다. 그녀가 세웠다는 다리 ‘보안교’가 절의 문이다. 거대한 바위 하나가 하천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고 있는데
유마사에서 오래된 것은 부도뿐이다. 두 개의 부도가 있는데, 선이 아름답다. 하나는 보물 제1116호로 지정된 유마사해련부도(維摩寺海蓮浮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