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중앙박물관 = 특별전시 "東洋"을 수집하다.& 테마전 개암사 괘불전

백련암 2014. 12. 9. 02:54

 특별전시

 

김치인 72세 초상(金致仁 1716년 ~ 1790년)肖像  : 조선 1787년,  비단에 색(絹本彩色[견본채색])

화가 = 이명기(李命基, 1756년~ 1802년 이후)

 

1787년 왕실화원 화가 이명기가 당시 영의정이였던 김치인(金致仁 1716년 ~ 1790년)을 그린 초상화다.

머리에는 사모(紗帽)를 쓸고, 쌍학문(雙鶴紋) 흉배를 부착한 단령(團領)을 입었으며, 정 1품 이상이 차는 허리띠, 서대(犀帶)를 착용하고

표범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았다.

이명기(李命基)는 정조(正祖) 연간 초상화를 잘 그리는 것으로 손꼽혔던 화가다. 강한 필묘법과 적극적인 음영법을 써서

개성이 뚜렸한 이명기의 대표적인 초상화보다  훨씬 차분하고 부드러운 양상을 보여준다.

화면 상단에 적힌 글을 통해 이명기가 초상화를 그렸고, 정조가 이를 보고 어찬(御贊)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일본 덴리대(天理大) 소장(김치인 초상)을통해 주인공이 김치인임을 알 수 있다.

 

나전 장식 불교 경전 보관함 : 고려 후기(高麗後期)  = 새롭게 선보이는 우리문화재

 

고려 나전칠기는 청자. 불화와 함께 고려 미술을 대표하는 공예품이지만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물은 전 세계에 10여 점 정도이고

국내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나전대모불자(螺鈿玳瑁拂子) 1점 밖에 없다.

이 가운데 나전경함은 8점으로 일본, 미국, 유럽의 박물관과 개인이 갖고 있고 국내에는 한 점도 없었다.

이 경함은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이 장식되어 고려 나전칠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뚜껑 윗부분은 각 모서리를 모죽임한 장방형의 상자 형태로, 자개와 함께 금속선을 사용하는 고려 나전칠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모란당초문을 주무늬로 하여 청 2만 5천여 개의 자개가 사용된 이 경함은 고려 나전칠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전 장식 불교 경전 보관함 : 고려 후기(高麗後期)

 

뚜껑 윗부분은 각 모서리를 모죽임한 장방형의 상자 형태로, 자개와 함께 금속선을 사용하는 고려 나전칠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모란당초문을 주무늬로 하여 청 2만 5천여 개의 자개가 사용된 이 경함은 고려 나전칠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 = 금동불 입상(金銅佛立像)  :  시대 = 통일신라(統一新羅) 8세기 후반 ~ 9세기

 

불상, 광배, 대좌를 모두 갖춘 것으로 보석이 박혀 있는 보기드문 작품이다.

광배에 보석이 장식된 예는 중국 절강성 닝보(寧波 영파)의 천봉탑(天封塔)에서 출토된 불상에서 확인된 바 있다.

 

방형의 얼굴과 평면적으로 표현된 이목구비, 얼굴 비중이 큰 신체 비례, 선으로 새긴 옷 주름,

내의(內衣)를 입고 법의(法衣)를 양 어깨 위에 걸친 옷차림새 등에서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광배 전체에는 넝쿨무늬를 새기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투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조각 기법이 매우 정교하다.

 

    

 

부처 = 금동불 입상(金銅佛立像)  :  시대 = 통일신라(統一新羅) 8세기 후반 ~ 9세기

 

   

광배 전체에는 넝쿨무늬를 새기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투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조각 기법이 매우 정교하다.

 

    부처 = 금동불 입상(金銅佛立像)  :  시대 = 통일신라(統一新羅) 8세기 후반 ~ 9세기

 

동으로 만들고 금으로 도금한 통일신라 후기 불상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주조 후 안에 있는 흙을 제거하기 위한 구멍이 머리와 몸에 뚫려있다.

불상 다리 부분의 옷주름은 음각으로표현하였는데, 1.5mm정도 길이의 작은 삼각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광배의 두광 부분은 마치 꽃잎이 살짝 들려 있는 모양으로 윤각선을 따냈다.

또한 X-ray 사진을 통해 꽃 모양을 따라 음각선을 새긴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광배에는 수정으로 추정되는 보석이 꽃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광배 하단 양쪽에는 천의(天衣) 자락을 날리며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 천인상(天人像)이 조각되어 있다.

 

 

약사불 = 금동 약사불 입상(金銅藥師佛立像)  :  통일신라(統一新羅) 8세기

 

약사불 = 금동 약사불 입상(金銅藥師佛立像)  :  통일신라(統一新羅) 8세기 뒷모습

 

 

시왕도(제10 오도전륜왕)고려후기=비단에 색  *있는 곳 = 미국 개인 소장

 

오도전륜대왕은 시왕 중 마지막 왕으로, 즉은지 3회기(三回忌)째 되는 날 여러 단계를 거치며 최를 심판받은 죄인들은

마지막으로 이 왕 앞에서 다시 태어날 곳이 결정된다.

육도윤회(六道輪廻) 장면이 오른쪽에 펼쳐져 있고, 하단에 다음생에 짐승으로 태어날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시왕도(제8 평등왕)고려후기=비단에 색  *있는 곳 = 미국 개인 소장

 

평등대왕은 사람이 죽은 지 100일째 되는 날 심판을 맡은 왕으로 공평하게 업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평등왕(平等王) 또는 평정왕(平正王)이라한다.

하단에는  죄가 적힌 두루마리를 매달아 죄의 무게를 측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고려불화에서..

오도전륜대왕과 평등대왕등은  열폭으로 이루어진 시왕도 세트의 일부로서, 각각 제1 진광왕<진광왕>, 제4  오관왕<오관왕>,

제5 염라왕<염라왕>,  제10 오도전륜왕<오도전륜왕>을 그리 그림이다. 

 이 세트는 예전에는 해리 패커드<1914-1991년> 소장본이었다가 흩어져 현재는 미국 하버드 아서새클러 박물관, 개인, 그리고

호놀룰루 예술대학과 덴버미술관으로 분산 소장되었으며 총 9점이 남아 있다.

이처럼 지옥을 관장하는 열 명의 왕을 한 폭에 한 명씩 묘사하는 형식의 시왕도 남송대의 닝보에서 그려진 시왕도와는 달리

10세기 경의 둔황의 수권<手卷> 형식 시왕도의 도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으며 닝보 시왕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자극적인 지옥 장면 등이

적다는 점이 특징이다.

 

고려불화 중에는 비교할 만한 작품이 적어 조심스러우나  이 시왕도의 세트가 고려불화일 가능성은 여러번 제시되어 왔다. 

먼저 도상적으로는, 시왕도의 전거인『예수시왕칠경, 豫修十王七經』에서는 내하<奈河>를 건너는 장면이 본래 제2왕에 속하는데,

이 시왕도의 세트에서는제1왕에서 그려져 있다.

그런데 혼동이 13세기의 고려 해인사본<예수시왕생칠경변상도>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어, 지역적으로 일어난 혼동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또한 양식적으로 공간 구성이나 색채의 구사가 닝보에서 제작된 중국 시왕도와 상당히 다르고,

인물의 옷주름이나 사물의 선에 중첩하여 그린 금니선, 각종 금니 모양 등이  고려불화에 가까운 특징을 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시왕도 세트가 고려불화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점이다.

 

※남송대 중국 닝보<寧波>에서 대규모 공방을 운영한 김처사<金處士>, 육신충<陸信忠>의 작품을 중심으로 일본에 많이 남아 있다.※

 

 

관음보살 밑그림(觀音菩薩圖 草本[관음보살도 초본])  : 시대 = 조선 18~19세기

 

현실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을 그린 불화의 밑그림이다.

수면 위로 올라온 암좌는『화엄경[華嚴經]』에서 관세음보살이 머문다고 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을 상징한다.

그의 좌우편에는 중생의 질병을 치료해준다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淨甁)과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을 주위에는 우주의 광활한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데, 아마타불과 여러 보살, 그리고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천상의 세계가

아름답게 표현된다. 초본(草本)이지만 도상의 이해와 필력을 느끼게 한다.

 

 

개암사영산회괘불탱및초본(開巖寺靈山會掛佛幀및草本) : 보물  제1269호    시대 = 조선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괘불에서 많이 그려지는 영산회상도는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길이 14m, 폭 9m의 이 괘불은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 · 보현보살이 서 있고 뒷쪽에는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있으며,

앉아 있는 2구의 작은 불상도 보인다. 석가는 머리끝에서 다섯 줄기의 빛이 나며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서 있는 모습이다.

각 상들의 얼굴 형태와 어깨는 각지게 표현하여 경직되어 보이며, 눈썹은 처지게 처리했고 선은 매우 정밀하고 세련되어 강한 인상을 준다.

채색은 주로 붉은색과 녹색에 금색을 사용하였고 군청색을 넣어 색채 대비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영조 25년(1749) 승려화가 의겸이 참여한 그림으로 화면을 꽉 채운 구도와 경직된 형태, 강렬한 색채 등으로 18세기 중엽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며, 제작연대도 확실하여 우리나라 불교회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암사 괘불탱의 밑그림도 남아 있는데, 현재 밝혀진 유일한 것으로 당시 괘불화의 제작과정과 필치 등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문화재청의 글>

 

 

본존불대의 끝단의 꽃무늬 부분도

 

보현보살의 태극무늬 장식 부분도

 

 

테마전<개암사 괘불[開巖寺 掛佛]>은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풍광속에 자리한 부안 개암사에 봉안되었던 큰 괘불을 공개하는 전시이다.

1749년에 조성된 이 괘불은 높이가 1,317m에 이르는 큰 불화로, 18세기 최고의 화사(畵師) 의겸(義謙)이 수화승(首畵僧)으로서 제작을 주도하였고

12명의 화승이 동참하여 완성하였다.

개암사 괘불은 석가모니불과 문수 · 보현보살, 다보여래 · 아미타여래, 관음 ·  세지보살을 그린 영산괘불(靈山掛佛)이다.

조선 후기에는 법당 밖깥에 괘불을 걸고 영산재(靈山齋) · 수륙재(水陸齋)등의 의식을 베풀어 죽은 자의 영혼이 극락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였다.

개암사 괘불 역시 야외에서 의식이 행해질 때 주존불(主尊佛)로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거대한 화면 속에 웅대한 불 · 보살이 부각된 도상은 17~18세기 불교의식 집에 나오는 존상으로, 영취산  설법모임에서

설법하는 부처와 여러 불보살을 상징한다.

 

개암사에는 괘불의 제작에 사용되었던 같은 크기의 초본이 함께 전해진다.

초본은 불화의 밑그림으로서 제작과정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것으로, 개암사 괘불은 초본이 함께 전하는 거의 유일한 괘불로서도 주목된다.  

 

 

1. 중앙 = 영산교주 석가모니불      2.부처님 쪽에서 볼 때 좌측 문수대보살     3.우측 보현대보살

4. 좌측에서 첫번째 합장하신분 증청묘법 다보여래     5. 우측에서 첫번째 합장하시고 계신분  극락도사아미타불  

6. 4번 옆에 계신분 관음대보살     7. 5번 옆에 계신분 세지대보살

 

 

개암사영산회괘불탱 (開巖寺靈山會掛佛幀및草本) : 보물  제1269호    시대 = 조선

의겸(義謙)등 조선 1749년  삼베에 채색 개암사 소장  = 석가모니불과 보현대보살

 

화면 중앙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 · 보현보살이 찬란한 화염광배를 등지며 작은 연화좌대를 밟고 있다.

부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 당당함을 표현하였고, 오른손을 길게 내리고 왼손은 가슴 쪽으로 들어 엄지와 약지를 모으고 있다.

부처의 옆에는 여의(如意)를 든 문수보살과 연꽃 봉우리를 든 보현보살이 좌우로 협시하고 있다.

삼존(三尊) 위쪽에는 다보여래와 아미타불,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부처의 얼굴을 보며 비스듬히 서 있다.

상단의 존상(尊像)을 작게 표현하여 앞에 선 삼존을 부각시켰다.

17세기 불교의식집에 수록된 "거불(擧佛)"이라는 절차에 나오는 칠존(七尊)의 도상을 표현한 괘불이다. 

부처의 광배 옆면에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과 보신(報身) 노사나불을 작게그려 중앙의 석가모니불과 함께 삼신불(三身佛)을 상징적으로 표현 하였다.

<전시중의 글>

 

 

개암사 영산회괘불 탱화 초본 =  출처 문화재청

 

영산회상괘불도 밑그림(본존과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 출처 문화재청

 

 

칠성병풍도(七星圖) 치성광여래와 북두칠성 :  시대 = 조선 1850년

 

칠성도의 여러 도상(圖像) 여섯 폭 화면에 배치한 드문형식의 불화이다. 각 화면 안에 여러 존상의 존명을 적어 놓아 명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화폭의 가장 끝 쪽 두 면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 성중을 14명씩 나누어 배치하였으며,

중간 네면의 폭에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여래(七如來)와 칠원성군(七元星君)등을 배치하였다.

 

은진(恩津) 쌍계사(雙溪寺)에 봉안되었던 불화이다.

 

 

이십팔수제성군중(二十八宿諸星君衆)

 

칠원성군(七元星君)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좌우보처 월광보살(月光菩薩) 일광보살(日光菩薩)

 

 

칠여래(七如來)

 

 

 

 

이십팔수제성군중(二十八宿諸星君衆)

화폭의 가장 끝 쪽 두 면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 성중을 14명씩 나누어 배치하였으며,

 

 

치성광여래와 북두칠성 칠성도(七星圖)  :   시대 = 대한제국 1924년

 

칠성도는 밤하늘의 여러 별들을 부처의 모습으로 그린 불화이다.

화면 중앙에는 북극성(北極성)의 상징인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가 금륜(金輪)을 들고 앉아 있고,

좌우에는 각각 붉은 해를 든 일광보살(日光菩薩), 흰달을  든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시립(侍立)해 있다.

각 보살의 뒤편에는 북두칠星을 의인화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이 묘사되어 있다.

 

 

산신과 호랑이 산신도(山神圖)  :  시대 = 조선 19~20세기

 

산신도(山神圖)는 산왕(山王)으로 신앙되던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그린 불화이다.

불교가 민간 신앙과 결합하고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예로부터 산의 신령으로 믿어져 온 호랑이와 주산신이 결합하여 산신이 되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산신과는 대조적으로 호랑이는 익살스럽게 표현되었고 소나무의 표현이 장식적이다.

 

 

독성존자(獨聖圖)  :  시대 = 조선 19~20세기

 

독성도는 석가모니의 제자로 십육나한 중 첫 번째 존자인 독성존자(獨聖尊者[나반존자])를 단독으로 그린 그림이다.

석가모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天台山)에서 수도하다가 부처가 열반한 뒤 중생들의 복덕(福德)을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였다.

편안히 앉아 머리를 긁적거리는 듯 자유로운 독성의 자세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에 있는 신신도와 함께 조성되었다.

 

 

지옥의 네 번째 왕, 오관대왕(第 四 五官大王圖)  :  시대 = 조선 19세기

 

시왕 중 제 4대왕인 오관대왕(五官大王)은 죽은 사람의 네 번째 칠일(28일)을 맡아보는 왕으로 다섯 가지 형벌을 주관한다고 한다.

도산(刀山) 지옥에서 중생들이  입으로 지은죄를 다스리는데, 업(業)의 경중을 다는 저울인 업칭(業稱)에 사람들의 죄업을 다고

그 무게에 따라 벌을 내린다. 그림에는 지상으로 부터 칼날이 솟아나 있는 지옥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저승사자 중 감재사자(監齋使者圖)  :     시대 = 조선  19세기

 

말고삐를 잡은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사자는 저승사자 중 감재사자(監齋使者圖)이다.

감재사자는 망자(亡者)의 영혼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사자 위쪽에는 시왕의 재판을 보좌하는 판관(判官)과 명부전(冥府殿)을 수호하는 장군(將軍)이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다.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靈山會相圖)  :  시대 = 조선 1742년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 열렸던 석가모니불의 설법회(靈山會)를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일상의 미혹에서 벗어나 바른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이 있고

영산회에 모인 이들은 그 가르침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

7년간의 사찰 재건을 마친 영취사에 봉안하였던 불화로, 가야산에서 초청해온 혜식(慧式)을 비롯하여 7명의 화사(畵師)가 그렸다.

상단에는 천인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는 땅위를 덮고 있다.

 

 

극락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 =  아미타불회도(阿彌陀佛會圖) :   시대 = 조선 1828년

 

서방극락세계에서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이다.

아미타불이 위치한 불단의 아래로 흰 천의를 걸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자리를 잡았다.

이 그림은 19세기 전반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한 신겸(信謙)을 비롯해 7인의 화승이 제작하였다.

영산회상도, 약사불회도와 함께 세 폭의 불화가 동시에 조성되었다.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신중도[神衆圖])  :  시대 =  조선  1855년

 

상단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의 세계를, 그 아래에는 위태천(韋駄天)이 이끄는 천룡팔부중(天龍八部衆)의 세계를 그린 신중도이다.

제석천과 범천은 거의 같은 모습이지만, 제석천이 풍성한 모란꽃 가지를 들고 있는 반면 범천은 손을 맞잡고 있으며 이마에는 제 3의 눈이 그려져 있다.

위태천은 화면 하단 중심을 차지하고 일렁이는 불꽃을 광배로 삼고 있다.

손에 풀포기와 영지버섯을 든 산신과 오색 목편을 든 조왕신(竈王神)의 도상은 우리나라 토착신앙의 영향을 받아 조선후기 신중도에 등장하였다.

 

 

무경당 관주 진영(無鏡堂 關周 眞影)  :  시대 = 조선 19세기

 

무경당(無鏡堂) 관주(關周)는 19세기 중엽 경기도 양주와 충청도에서 활약한 불화승(佛畵僧)이다.

19세기 불화는 음영법 등 서양화법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 많은데 관주 또한 전통적인 불화에 음영법을 적용하였다.

승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의 진영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유존 예가 적은 불화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화악대사 진영(華岳堂 眞影)   :  시대 = 조선 1838년

 

화악당(華岳堂)이라는 당호를 가진 승려로는 화악(華岳) 문신(文信, 1629년~ 1707년)과

화악(華岳) 지탁(知濯, 1750년~1839년) 두 분이 있는데, 이 진영의 주인공은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

화악 지탁은 청허(淸虛)  휴정(休靜, 1520년~1604년)에서  편양(鞭羊) 언기(彦機, 1581년~1644년)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불교계의

가장 유력한 문파(門派)에 속한 승려였다.

화악 지탁 문중(門中)의 승려로는 화담(華潭)  경화(敬和)가 이름이 높았고, 인원(仁源)  체정(體定)과 무경(無鏡)  관주(觀周) 등이 있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시대 = 조선 19세기

 

진리의 법문(法文)을 듣고자 여러 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던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는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을 방문하여

설법을  듣는 모습을 그린 수월관음도이다.

파도치는 물결 위에 솟아오른 편평한 암반으로 관음보살이 거처하는 곳을 표현하고 그 위에 편안히 앉아 법을 설하는 관음보살을 그렸다.

화면 왼쪽 아래에는 용왕이 관음보살에게 예배하고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선재동자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관음보살의 법문을 듣고 있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시대 = 조선 19세기

 

 

염라대왕 현왕도(現王圖)  :  시대 = 조선 19세기

 

현왕도는 사람이 죽어서 3일만에 만나게 되는 염라대왕을 여래화한 보현왕여래(普賢王如來)와 그의 권속들을 그린 불화이다.

현왕의 양쪽 옆에 시립한 인물들은 전륜성왕(轉輪聖王)과 대륜성왕(大輪聖王)으로 보인다.

염라대왕은 원래 시왕 중 다섯 번째 왕이었는데, 현왕 신앙이 인기를 얻으면서 독립된 불화로 그려재게 되었다.

 

 

황룡사 구층석탑(皇龍寺 九層石塔),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 사적  제6호   시대 = 신라시대

 

신라 진흥왕(眞興王) 14년(553년)에 월성(月城)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17년 만에 완성하고,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

진흥왕 35년(574년)에 5m가 넘는 주존불(主尊佛)인 금동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년)에는 자장(慈藏)의 권유로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켰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4대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다.

 

그러나 고려 고종(高宗) 25년(1238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은 옛 터만 남아 있다.

1976년부터 8년간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4만여 점에 달하는 우수한 작품이 출토되었으며,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사찰은 중문과 목탑, 금당(金堂), 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일탑식(一塔式) 배치를 하였으나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었다.

 

<황룡사지 터의 글>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 · 목탑 · 금당 · 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 · 풍탁 · 금동귀걸이 · 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황룡사지 → 경주 황룡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문화재청의 글>

 

 

사리함과 사리병

 

 

국립중앙박물관 단풍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