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금관이야기 = 경주 노서동의 신라 서봉총 금관(新羅 瑞鳳塚 金冠)과 유물들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알려진 고대사회의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며, 그 중 신라금관 6점과 가야 금관 1점을, 그것도 가장 완벽한 것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나올 것으로 예견한다면, 우리나라는 글자 그대로 "금관의 종주국"이라 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학계는 금관과 전혀 상관없는 19세기 시베리아 샤먼의 철제 巫冠(무관)에서 금관이 기원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신라 금관이 시베리아 무관에서 기원했다면,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가 번쩍거리는 5세기의 금제 왕관이든지, 신라 금관이 19세기 이후의
소박한 철제 무관이든지 둘 가운데 하나는 참이어야 하는데도, 어느 것도 참일 수 없는것이 분명한데 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거듭하고 있고,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답니다.
최근에는 금관이 왕관이 아니라 조잡하게 만들어진 부장품으로서 주검의 얼굴을 가리는 데드마스크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금관이 머리에 쓰는 관모인지, 얼굴을 가리는 가면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결국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시베리아 무관을 본받은 것으로 해석하여 민족적 창조력을 부정할 뿐 아니라, 금관을 왕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한갖 조잡한 부장품으로 격하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러한 두 주장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의 견해들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라 금관
1921년 9월 어느 날, 경주 노동리 봉황대 주변에서 자그마한 주막을 운영하던 박씨는 장사가 무척 잘되자 주박을 늘리기로 작정하고
뒤뜰의 나지막한 언덕을 파기 시작하자 고색창연한 황금빛 금관이 나왔는데, 이것이 150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금관총 금관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를 몰라서 그저 金冠塚(금관총)이라 하였으며,
3년 뒤 역시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하다가 두 번째 금관이 발견되었는데 금관에 매달려있는 특이한 한 쌍의 금방울을
보고 무덤 이름을 金鈴塚(금령총)이라 지었으며,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난 어느 날, 역시 봉황대 서편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덤에서 세 번째 금관이 나왔으며, 당시 스웨덴 왕세자의 신분으로
아시아 지역을 탐방하고 있던 고고학자 아돌프 6세가 마침 발굴 현장에 함께하였으며, 그의 이 뜻 깊은 발굴동참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瑞典(서전)의 첫 글자와 鳳凰(봉황)의 첫 글자를 따서 무덤을 瑞鳳塚(서봉총) 이라 이름 하였답니다.
그 후 1973년에 天馬塚(천마총) 및 1년 뒤 皇南大塚(황남대총) 북분에서도 금관이 출토되었으며, 그밖에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경주시 교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금관도 한 점 더 있습니다. 모두가 왕릉 급 무덤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되고 있으며,
학계의 추산으로는 경주 일원에 150여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중 이미 발굴된 것은 약 30기에 불과 하므로,
앞으로 또 어떤 무덤에서 얼마만큼의 금관이 더 쏟아져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답니다.
◈경주 노서동의 新羅 瑞鳳塚 金冠(신라 서봉총 금관)◈
금령총이 발견된 후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난 어느 날, 역시 봉황대 서편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덤에서 세 번째 금관이 나왔으며,
당시 스웨덴 왕세자의 신분으로 아시아 지역을 탐방하고 있던 고고학자 아돌프 6세가 마침 발굴 현장에 함께하였으며,
그의 이 뜻 깊은 발굴동참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瑞典(서전)의 첫 글자와 鳳凰(봉황)의 첫 글자를 따서
무덤을 瑞鳳塚(서봉총) 이라 이름 하였답니다.
과학으로 풀어보는 瑞鳳塚 金冠(서봉총 금관)
경상북도 경주노서리고분군(사적 제39호 지정해제), 경주대릉원일원(사적 제512호 재지정) : 시대 = 신라시대 5세기
일제 강점기인 1926년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고이즈미〔小泉顯夫〕등이 발굴하였다. 이 고분 발굴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참가한 것을 기념하여,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의 ‘서(瑞)’ 자와 이 고분 출토 금관의 봉황(鳳凰)장식에서 ‘봉(鳳)’ 자를 따서 서봉총(瑞鳳塚)이라 이름지었다.
이 고분에서는 ‘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의 기년명(紀年銘) 은합이 출토되어 신라고분의 편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봉총은 종래 경주 노서리고분군의 일원으로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9호로 지정되어 왔으나 근래 2011년 7월 28일경주 노서리고분군을 비롯한
5개 고분군이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통합되면서 사적 512호로 재지정되었다.
경주 노서동 제129호분이다. 1921년 경주 금관총(金冠塚)이 우연히 발견된 이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는
1924년 금령총(金鈴塚)과 식리총(飾履塚)을 발굴하였으나 모두 봉분이 없어진 폐고분이어서, 신라고분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봉분이 일부 남아 있는 이 고분을 1926년 발굴하였다고 한다.
발굴 전에 이 고분 주위에 들어선 민가들에 의해 봉분은 크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발굴 결과 이 고분의 남쪽 부분 일부는 이 고분보다
뒤에 축조된 다른 고분과 중복되어 있어 두 고분이 표형(瓢形) 쌍분(雙墳)이며, 서봉총은 그 표형분의 북분으로 추정되었다.
남분은 1929년 영국인 데비드(Devid)가 경비를 부담하여 발굴조사하고 데비드총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두 고분의 중복 범위가 좁고 무덤덧널의 방향도 크게 다르며 출토유물의 격도 차이가 있어 원래 표형 쌍분으로 축조된 것인지는 의문점이 많다.
조사 결과 이 고분은 매장부체부인 덧널의 주위와 위에 냇돌을 쌓아 적석부를 구축하고 그 위로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봉분 주위로는 냇돌로 호석을 쌓아 두른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으로 밝혀졌다.
신라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 가운데 대형급에 속한다.
출토유물을 살펴보면, 나무널 안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착장하고 있었던 금관과 관수식(冠垂飾) 금제 태환식(太環式) 귀걸이,
마노 대롱옥 · 수정 다면옥 · 각종 곡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 금 · 은 · 유리구슬을 꿰고 끝에 비취곡옥을 단 가슴장식,
금제과대(金製銙帶)와 요패(腰佩), 금·은 팔찌와 유리팔찌, 금반지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금제 태환식 귀걸이는 이외에도 금관의 동쪽과 과대 아래에서도 요패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나무널 안에서는 이와 같은 장신구 외에는 소형의 금동장 도자가 1점 출토되었을 뿐이며 대형요패가 피장자의 오른쪽 허리 아래에 착장되어 있었다.
이는 관수식과 귀걸이가 태환식인 점과 함께 여자 무덤이 확실한 황남대총(皇南大塚) 북분과 같은 특징이어서 서봉총의 피장자가 여자였음을 말해준다.
피장자가 착장한 장신구 중 금관은 다른 신라 금관과 마찬가지로 테 위에 나무모양 장식과 사슴뿔모양 장식을 세운 것이나,
내부에 속모자 모양의 골격을 설치한 것이 다르다. 이 골격은 금관의 테 안쪽에 금판을 전후좌우로 세워 위에서 ‘십(十)’자 모양으로 교차시키고,
그 교차점에 세 마리의 봉황형 장식이 달린 금판을 부착시킨 것이다. 유리팔찌는 다른 신라고분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며,
요패들과 함께 피장자 허리부분에서 나온 태환식 귀걸이는 태환을 사격자(斜格子)로 투조한 것으로 이례적이다.
이 부장품들 가운데 은제대합(銀製大盒)에서는 뒤에 뚜껑 안쪽 면과 그릇 바닥에서 바늘 같은 것으로 새긴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연수 원년인 신묘년 3월에 대왕(大王)이 이 은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봉총 은합의 이 명문은 경주 호우총(壺杅塚) 출토 청동호우에 새겨진 을묘년명(乙卯年銘)과 함께 지금까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발견된
단 2개의 기년명 가운데 하나로 신라고분의 편년 연구 등에 극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다만 불행히도 연수는 지금은 알 수 없게 된 잃어버린 연호로서, 고구려의 연호였을 것으로 추정될 뿐 그 사용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여기서 신묘년은 서기 391년, 451년, 511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서봉총의 상대연대는 황남대총 남 · 북분보다는 늦고 천마총(天馬塚) · 금령총보다는 이른 시기로서
신라에서 돌무지덧널무덤 축조기의 중기 쯤에 해당된다.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은 6세기 전반경에는 이미 소멸되었으므로, 은제대합의 신묘년은 서기 511년은 너무 늦고
대체로 451년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서봉총은 이 연도에서 멀지 않은 5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분의 규모와 출토유물로 보아 당시 신라의 왕비나 또는 왕비에 버금가는 최고 지배층의 여성묘였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서봉총은 경주 대릉원의 북쪽 노서동 고분군에 위치한 5~6세기대의 신라 무덤이다. 이 고분에서는 보물 제339호인 봉황 장식 금관 이외에도
금 허리띠 장식, 금귀걸이, 금팔찌, 금반지, 금그릇, 은그릇, 유리잔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서봉총 금관의 제작에 사용된 여러 기술들을 중점적으로 조명하였다. 신라 금관의 제작에 어떤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는지,
또 박물관에서는 이를 밝히기 위해 어떤 과학적인 분석법을 사용하였는지, 그리고 그 조사 결과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필 수 있는
뜻 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瑞鳳塚金冠(서봉총금관)은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높이 30.7cm, 지름 18.4cm, 드리개(수식) 길이 24.7cm인 금관이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에 점선으로 물결무늬를 찍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했다.
관 테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山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다.
이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금판이 휘지 않도록 했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을 달았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 곳에도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판대를 전후 · 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세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을 하나씩 붙였다. 관 테 좌 · 우에 길게 굵은 고리(太環飾[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서봉총 금관과 관대 : 보물 제 339호 서봉총 = 진평왕릉으로 比定[비정]
金冠(금관, 보물 제 339호)과 1. 금허리띠와 장식 = 金製銙帶裝飾[금제과대장식]
그리고 금관 양 옆으로 금 귀걸이 = 金製太環瓔珞附耳飾[금제태환영락부이식]
중간. 유리팔찌 = 琉璃製釧[유리제천], 금팔찌 = 金釧[금천], 하단. 금반지 = 金製指環[금제지환]
금관의 정면모습
서봉총 금관의 좌우모습
瑞鳳塚 金冠(서봉총 금관) 가운데 부분에 梁帶(양대)가 보인다.
금관 좌우 드리개
금관 안쪽 =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금관의 속
금장식 관대
서봉총 출토 유물
서봉총에 묻힌 사람은 봉황 장식 금관을 쓰고 금장식을 한 허리띠를 찬 모습이다.
또 굵은 고리 귀걸이와 유리 목걸이, 금제 팔찌, 은제 팔찌 유리 팔찌, 금반지 금동 신발들을 착용한 상태였다.
하지만 남성을 상징하는 큰칼(大刀)은 출토되지않았는데, 이 때문에 성봉총에 묻힌 사람을 여성으로 보기도 한다.
묻힌 사람 주변에서는 금제 그릇, 은제그릇, 액체를 데우는 청동그릇(靑銅鐎斗[청동초두]) 과 여러 말갖춤 등도 출토되었다.
특히 은제 그릇에는 "연수(延壽) 원년(元年)" 이라 새겨져 있어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 "연수(延壽)"라는 연호(年號)는 동아시아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鐎 = 초두 초. = 다리가 셋에 자루가 달린 작은 냄비를 말함, 군중(軍中)에서 사용함
금 허리띠 장식들
바라보는 자리에서 우측에 따로 있는 조각은
허리띠(혁대)의 두 끝을 마주 걸어 잠그는 장치가 떨어져서 옆에 따로 놓여있다.
금허리띠 장식과 잠금고리 = 金製銙帶裝飾[금제과대장식]
금제 허리띠 장식
허리띠 고리 = 따로 떨어져 있는 조각을 위의 고리에 끼워 넣는 곳
※▶ 금관의 제작 방법↓
재현된 복제품
관 속의 양대와 맨 위 봉황의 모습
드리개
재현한 금관
봉황장식(鳳凰裝飾[봉황장식])
봉황장식(鳳凰裝飾[봉황장식])
사슴뿔각모양이라고 함 出(출)자형이라고도 하고 3단 山자형이라고도 함
부분별 명칭 설명
4. 금못(金釘[금정]) 5. 달개(瓔珞[영락]) 6. 금실(金絲[금사]) 7. 곱은옥(曲玉[곡옥]) 8. 볼록 무늬(半球文[반구문])
9. 점렬무늬(點列文[점열문])
산자모양의 맨위 = 1. 맞가지 세움장식(對生枝形立飾[대생지형입식]) 사슴뿔모양의 맨위 = 2. 엇가지 세움장식(互生枝形立飾[호생지형입식])
하단 점선무늬를 뜻함 = 10. 삼각 점렬문(三角點列文[삼각점렬문])
梁帶(양대)
금 드리개의 부분별 명칭
1. 굵은 고리(主環[주환]) 2. 노는 고리(遊環[유환]) 3.연결금구 · 달개(連結金具 · 瓔珞 [연결금구 · 영락])
4. 버들잎 모양(柳葉形裝飾[유엽형장식]) 5. 볼록 모양 장식(半球體裝飾[반구체장식]) 6. 버들잎 모양 장식(柳葉形裝飾[유엽형장식])
7. 사슬 장식(鎖形裝飾[쇄형장식])
관테(帶輪 혹은 臺輪[대륜, 대륜])
♣♧♣
금관의 세움장식을 하고 있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나뭇잎을 상징하는 영락(瓔珞)이 달려있을 뿐 아니라 가지 끝 마다 생명을 상징하는
♤모양의 "움(새순)"이 봉긋하게 돋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금관은 신라 김씨 왕조의 신성성과 계림국의 정체성을 왕관으로 형상화한 시각적 도구로써, 계림을 상징하는 신성한 나무들과 나뭇잎,
금궤 안의 아기 즉 새 생명체를 상징하는 곡옥(교동 및 금령총 금관 제외 - 소아용), 천계의 등장을 나타내는 수닭(서봉총 금관)등이
일목요연하게 형상화되어 있는 알지 신화의 조형적 상징물이라 해석되어 집니다.
『신라 금관의 기원과 김알지 신화의 상징』이란 제목으로 신라문화원 강당(2008. 8. 20.) 및 경주문화원 강당(2010. 6. 24.)에서
있은 임재해 교수의 강연 초록 중에서 주로 일부 내용을 빌췌, 편집, 자료 보완을 시행한 내용입니다.
<스크랩에서 사진 퍼옴>
※▶서봉총 금관◀※
보물 339호인 서봉총 금관의 가장 큰 특징은 2매의 양대(양대, 봉황장식을 고정한 긴 금판) 끝부분을 관테(대륜, 대륜)에 금못으로 고정한 점이다.
또 대륜에는 6개의 곱은 옥을 매달았는데 1926년의 출토 사진과 1934년도에 촬영한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34년도의 사진 1과 지금의 사진 2, 3을 비교해 보면 양대가 다른 위치에 고정되었고 곱은 옥도 6개 중 4개가 떨어져 있다.
떨어져 있는 곱은옥의 모양은 1926년 출토 사진과 일치하며, 떨어진 곱은옥에 남은 금실의 순도와 제작 기법 역시 금관에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금관은 사진 4 처럼 수정하여 복원해야 한다.
서봉총 금관 분석에 사용된 비파괴 분석
1. X-ray
파장 0.01mm - 1mm 정도의 전자파로 나무, 천, 종이처럼 밀도가 낮은 물질은 쉽게 통과하지만 밀도가 높은 물질은 통과하지 못한다.
X-ray 로 금관을 촬영하여 맨눈으로 보이지 않는 제작 방법이나 특징을 알아 낸다.
2.XRF
X선 형광분석을 이르는 말로 금관분석 지점의 성분 구성을 알 수 있다.
◈ 복원 내용◈
서봉총 금관의 가장 큰 특징은 2매의 양대(梁帶, 봉황 장식을 고정한 긴 금판) 끝부분을 관테에 금못으로 고정한 점이다.
또 관테에는 6개의 곱은옥을 매달았는데 1926년도와 1934년도에 촬영한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양대가 다른 위치에 고정되었고 곱은옥도 떨어져 있다. 떨어져 있는 곱은옥의 모양은
1926년 출토 사진과 일치하며, 떨어진 곱은옥에 남은 금실의 순도와 제작기법 역시 금관에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이를 근거로 금관을 만들었던 당시의 모습을 추정해서 복원할 수 있다.
사진 1 = 1934년 촬영 사진
사진 2 = 2015년 촬영 사진 ↑↑ 위 1934년 촬영 사진
사진 3 = 2015년 펼쳐진 사진 ↓↓ 아래 복원된 사진
사진 4 = 수정 복원된 사진
묻힌 사람 주변에서는 금제 그릇, 은제그릇, 액체를 데우는 청동그릇(靑銅鐎斗[청동초두]) 과 여러 말갖춤 등도 출토되었다.
특히 은제 그릇에는 "연수(延壽) 원년(元年)" 이라 새겨져 있어서 주목된다.
그런데 이 "연수(延壽)"라는 연호(年號)는 동아시아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鐎 = 초두 초. = 다리가 셋에 자루가 달린 작은 냄비를 말함, 군중(軍中)에서 사용함
금귀걸이(金製太環透彫耳飾[금제태환투조이식]) *透 = 통할 투, 금귀걸이(金製太環耳飾[금제태환이식])
은귀걸이(銀製太環耳飾[은제태환이식]) 금귀걸이(金製太環耳飾[금제태환이식])
은팔찌 = (銀製釧[은제천])
금귀걸이(金製太環耳飾[금제태환이식])
우리 목걸이(琉璃頸飾[유리경식])
유리잔(琉璃 杯)
각각의 유리잔(琉璃 杯)
玉製 裝身具(옥제장신구)
우리 목걸이(琉璃頸飾[유리경식])
상단 : 금덩어리 (金塊[금괴]) 도가니에 얻어있는 것. 하단 : 도가니 (坩堝[감과]) : 출토 = 扶餘 官北里(부여 관북리)
金板(금판)
金薄(금박) : 출토 = 慶州 金鈴塚(경주 금령총)
금동 뿔모양 잔 (金銅角杯[금동각배]) : 출토지 = 慶州 金鈴塚(경주 서봉총)
금동 뿔모양 잔 (金銅角杯[금동각배]) : 출토지 = 慶州 金鈴塚(경주 서봉총)
금그릇 = 金製盌(금제완) = 慶州 金鈴塚(경주 서봉총)
구부려서 만드는 금팔찌는 높은 순도(22K)의 금을 사용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야 하는 그릇은 낮은 순도(16.5K)의 금을 사용하였다.
각각의 금그릇 = 金製盌(금제완) = 慶州 金鈴塚(경주 서봉총)
미늘쇠(有刺利器[유자이기]) : 고대/삼국/신라 / 혹은 가야까지
미늘쇠는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주로 출토된다. 양쪽 가장자리를 오려서 삐쳐내어 가시가 돋친 것처럼 하고 아래는 장대,
혹은 나무자루에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4세기 전반의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에는 덩이쇠를 이용하여 하단부는 양쪽에서 오려서 공부(銎部 : 자루에 끼우는 부분)를 만들고
측면을 양쪽에서 오리고 길게 늘여서 소용돌이 무늬로 말아놓은 것이 최초의 형식이다.
*刺(자)는 刺(척) = 찌를 척 이라고 합니다. 뜻은 같음, 銎 = 도끼 구멍 공, 창 자루를 박는 창 아래쪽 구멍
네 발 달린 철기 四脚附鐵器[사각부철기]
청동그릇(靑銅鐎斗[청동초두])
*鐎 = 초두 초. = 다리가 셋에 자루가 달린 작은 냄비를 말함, 군중(軍中)에서 사용함
청동그릇(靑銅鐎斗[청동초두]) 의 뚜껑(새 손잡이과 주둥이 부분 세밀)
청동그릇(靑銅鐎斗[청동초두])
서봉총의 연대 : "연수 원년 태왕의 치세 신묘년 삼월중에, 태왕이 교시하여 세 근 여섯량을 사용하여 합우를 만들었다."
신묘년은 451년 또는 511년이다.
延壽 元年 太歲在卯三月中(연수원년태세재묘3월중) …壽元年太歲在辛(…수원년태세재신)
太王敎(敬?)造合杅用三斤六兩(태왕교(경?)조합우용삼근육량) 三…太王敎(敬?)造合杅… 三斤(삼…태왕교(경?)조합우…삼근)
그릇바닥에 "연수[延壽]..."라고 새겨있는 은그릇
延壽 元年 太歲在卯三月中(연수원년태세재묘3월중) …壽元年太歲在辛(…수원년태세재신)
太王敎(敬?)造合杅用三斤六兩(태왕교(경?)조합우용삼근육량) 三…太王敎(敬?)造合杅… 三斤(삼…태왕교(경?)조합우…삼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