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한이 서린 연주대, 효령대군 사당이 있는 연주암.
관악산은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며 동으로 과천 청계산에서 서쪽으로 수원의 광교산까지 이어집니다.
높이는 해발 632미터이며 연주대가 있는 연주봉이 관악산의 주봉입니다.
관악산은 풍수지리상으로 불의 기운이 강한 산이라 하고 동서로 길게 자리한 산세 또한 불꽃모양을 하고 있어서 옛날부터 화산(火山)이라 불렸습니다.
500년 동안 서울에 도읍을 두었던 조선왕조는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설을 믿었기 때문에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습니다.
관악산 중턱에 아홉 개의 커다란 물동이를 묻어두고 깊은 샘을 파서 구리로 만든 용을 넣어두었으며 바위투성이인 연주대 주변에
여러 개의 작은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물과 용의 힘을 빌어 불기운을 막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관악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바위가 많아 웅장하고 계곡이 깊지는 않지만 숲이 우거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합니다.
주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들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 기묘한 형상으로 변한 것들도 많은데
동물모습을 닮은 바위가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戀主臺(연주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암의 산내에 있는 절. 677년(신라 문무왕17) 의상(義湘, 652년~702년)이 연좌(宴坐)하였다 하며
1392년(조선 태조1) 중건.
고려의 유신(遺臣) 강득룡(康得龍)ㆍ서견(徐甄)ㆍ남을진(南乙珍) 등이 송경(松京)을 바라보고 통탄하였다 하여 연주대라 개칭.
1411년(태종11) 효령대군이 한 칸을 증축. 철종 때에 완송(完松)이 라한 16존을 봉안. 1918년 주지 경산(慶山) 중건. 1936년 주지 교훈(敎訓) 중건.
1392년(태조 1)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의상대를 중건하고 그의 처남인 강득룡(康得龍)이 연주대라고 불렀다.
강득룡 · 서견(徐甄) · 남을진(南乙珍) 등이 이곳에서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연모하면서 통곡하였기 때문에 연주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주대는 경기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1396년에는 연주암을 신축하였고, 1411년(태종 11)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건하여 중건하였다.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태종의 뜻을 안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령대군은 유랑 길에 올랐다가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원래의 암자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여 추억과 동경의 정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현 위치로 절을 옮겼다고 한다.
그 뒤 두 왕자의 심경을 기리면서 세인들이 이곳을 연주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대웅전 앞에는 높이 4m의 고려시대 양식을 한 삼층석탑이 있는데,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주암(戀主庵)
건립 677년 과천 관악산(冠岳山) 연주봉에 있는 절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677년(문무왕 17)에 의상(義湘)이 창건한절이다.
의상은 관악산 연주봉 절벽 위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 골짜기에 절을 짓고 관악사(冠岳寺)라 하였다.
그 이후부터 고려 말까지는 거의 폐사되다시피 하다가 1392년(태조 1)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의상대와 관악사를 중수하고는
조선왕조의 번창을 기원하는 200일기도를 하였다.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이다.
이 절은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1868년(고종 5)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龍華殿)을 중수하였고,
1883년에 대방을 중수하고 기와불사를 하였다. 1886년에는 행문(幸文)이 법당과 나한전을 중수하였고,
1886년에는 역시 명성황후의 하사금으로 전각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1918년에는 경산(慶山)이, 1929년에는 재운(在芸)이, 1936년에는 교훈(敎訓)이 중수하였다. 1975년송원(松園)이 대웅전을 신축 하였고,
1979년에 연주대와 삼성각을 중수하였으며, 1981년에 요사를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 선불전 등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의 우수한 작품이다.
千手觀音殿 懸板(천수관음전 현판)
千手觀音殿(천수관음전)
千手觀音殿(천수관음전)
천수천안관음전 아래는 공양간으로 쓰이고 있다.
千手觀音殿(천수관음전) 뒤로 KBS방송탑이 보인다. 관음전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千手千眼觀音菩薩(천수천안관음보살)
천수천안관자재보살이 모셔져 있다. : 관음보살이 과거세의 모든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변화하여 나타낸 몸
보살 = 깨달음을 구하여 중생을 교화하려는 사람
관음보살이 과거세의 모든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변화하여 나타낸 몸.
천개의 손과 눈이 있어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그 눈으로 보고 그 손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다.
천수천안관음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
원래는 영산전에 모셨던 삼존불과 10대 제자, 16성중, 오백성, 1250나한이다. 영산전 개축공사로 현재 이곳에 잠시 모셔져 있다.
千手觀音殿(천수관음전) 뒷모습
연주암삼층석탑 (戀主菴三層石塔)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4호 시대 = 고려시대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4m의 고려시대 양식을 한 삼층석탑이다.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주암 대웅전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연주암은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 의상대사가 ‘관악사(冠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단장을 거치고, 양녕대군과 효녕대군이 머물면서 연주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탑은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형태이다. 바닥돌에는 연꽃을 둘러 장식하고,
기단 네 모서리와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2·3층은 3단의 받침을 두어 규칙성을 잃고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 위로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 모양의 장식), 보주(寶珠:구슬 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균형 잡힌 안정감을 준다. 조선 태종의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과 둘째 왕자 효령대군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계승할 것을 부탁한 후 궁궐을 나와 이곳에 머무르며 수도할 때, 효령대군이 세운 탑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기단이 1층이고, 탑신의 지붕돌이 두툼하고 받침수가 줄어드는 등 조성수법에 있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의 글>
戀主庵 大雄殿(연주암 대웅전)
誕生佛(탄생불) = 석가탄신일이 초파일에 관욕 할 아기부처님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과 좌우보처 그리고 아난존자가 서 계신다.
석가모니불은 두손을 모으고 선정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神衆檀(신중탱)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은 두손을 모으고 선정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梵鐘閣(범종각)
통일원종각(統一願鐘閣)이란 현판이 붙여있다.
통일원종각 안에 있는 통일원종이라 쓰여있는 범종
통일원종각의 목어
통일원종각의 목어
통일원종각의 운판
金輪寶殿(금륜보전) 즉 삼성각이다.
1979년에 연주대와 삼성각을 중수하였으며, 1981년에 요사를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 선불전 등이 있다.
금륜보전(金輪寶殿 : 삼성각)은 현재의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건물로서 1929년에 신축한 것이다.
金輪寶殿 懸板(금륜보전 현판)
산신단 칠성단 독성단
七聖檀(칠성단) 칠원성군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수명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山神檀(산신단)
산신은 일반적으로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으로서, 불교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 토착화 과정에서 호법신중(護法神衆)으로 불교에 흡수되었습니다.
獨聖檀(독성)
나반존자(那畔尊者)라고도 부르는 독성은 십이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합니다.
금륜보전(삼성각) 옆으로 돌아가면 12지신 탑이 있다. 예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연주대에서 바라본 12지신 탑
戀主庵(연주암) 종무실
종무소와 요사채로 쓰이는 "ㄱ"자형 건물 남향으로 자리한 좋은 위치로 툇마루에는 등산객이나 신도들이 잠시 앉아 쉬는 곳이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 "산 기운은 저녁 노을에 더욱 아름답다."
당나라 시인 도연명의 "음주" 중 한 구절로 저녁 무렵의 아름다운 자연을 표현하고 있다.
※글은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자 뛰어난 명필이신 오세창 선생이 썼다.
1396년에는 연주암을 신축하였고, 1411년(태종 11)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건하여 중건하였다.
동생인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태종의 뜻을 안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령대군은 유랑 길에 올랐다가
이곳에 머물며 관악사를 현 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를 바꾼 이유는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궁이 보이면 추억과 동경의 정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현 위치로 절을 옮겼다고 한다. 그 뒤 두 왕자의 심경을 기리면서
세인들이 이곳을 연주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관악사의 이름이 연주암으로 바뀐 유래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가 있다.
이성계는 의상대를 중건하고 고려충신이었던 이성계의 처남인 강득룡(康得龍)이 연주대 라고 불렀다.
강득룡(康得龍)과 서견(徐甄) · 남을진(南乙珍) 등이 그 자리에서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연모하면서
통곡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 연주대라는 것이다.
戀主臺(연주대)
경기도 기념물 제20호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주봉 중 한 봉우리의 대(臺).
경기도 기념물 제20호. 깎아지른 듯한 바위 벼랑 위에 약간의 석축을 쌓고 30㎡쯤 되는 대가 구축되어 있어 이를 연주대라 하는데
거기에는 응진전(應眞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불당이 꾸며져 있다.
그 뒤에는 우뚝 솟은 말바위[馬巖]가 있어서 이 바위에 올라타면 득남할 수 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왕조 개국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권유를 듣고 태조는 도읍을 한양에 정함에 즈음해서 이 연주대에 친히 올라
국운장구를 빌며 원각(圓覺) · 연주(戀主) 두 절을 짓고 서울을 비치는 화산(火山) 불길을 진정시키고자 꾀하였다고 한다.
그 뒤 임금 자리를 아우인 세종에게 양보한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곳에서 놀았다 한다.
이때 양녕대군이 중에게 준 오언절구
“山霞朝作飯[산하조작반] : 산 노을로 아침밥을 짓고,
蘿月夜舂燈[라월야용등] : 女蘿[여라]의 덩굴에 걸린 달이 불을 밝히네.
※▶舂= 찧을 용, : 찧다. 절구질하다. 해가지다.
獨宿孤巖下[독숙고암하] : 홀로 외로이 바위 아래
惟存塔一層[유존탑일층] : 오로지 탑 한 층만이 남아있네”
이라는 한시가 명시로 전하며 효령대군은 여기에서 오랫동안 수도하였기에 그의 초상화가 보존되어 내려온다.
세조 때에도 태조 때의 예에 따라 여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 한다.
연주대에 다양한 전설들 어느것이 정확한지 = 경기도 기념물 제 20호
관악산의 기암 절벽 위에 석축을 쌓아 터를 마련하고 지은 이 암자는, 원래 신라의 승려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악사를 건립할 때 함께 건립한 것으로 의상대라 불렀다고 한다.
관악사와 의상대는 연주암과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내력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조선 개국 후 고려에 대한 연민을 간직한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개성을 바라보며 고려의 충신 · 열사와
망해버린 왕조를 연모했다고 하여 연주대라 불렀다는 이야기고,
또 하나는 조선 태종의 첫 번째 왕자인 양녕대군과 두 번째 왕자인 효령대군이 왕위 계승에서 멀어진 뒤 방랑하다가
이곳에 올라 왕위에 대한 미련과 동경의 심정을 담아 왕궁을 바라보았다 하여 연주대라 이름지었다는 이야기다.
두 이야기 모두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인데 이것은 연주대의 주변 경관이 워낙 뛰어난 절경인데다
한 눈에 멀리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여서 붙여진 전설로 생각된다.
현재의 건물은 세 평 남짓한 맞배지붕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을 최근에 해체 · 복원한 것이다.
연주대 (戀主臺) : 경기도 기념물 제 20호 시대 = 조선시대
관악산의 봉우리 중에 죽순이 솟아오른 듯한 모양을 한 기암절벽이 있는데, 그 위에 석축을 쌓고 자리잡은 암자를 연주대라 한다.
원래는 의상대사가 문무왕 17년(677)에 암자를 세우면서 ‘의상대’라 이름했었는데, 고려 멸망 후 조선을 반대하며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유신들이 이곳에 모여, 멀리 개경쪽을 바라보며 고려를 그리워하여 연주대(戀主臺)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이 셋째왕자 충녕대군을 장차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눈치챈 첫째 양녕과 둘째 효령대군이 궁을 나와
관악산에 입산 수도하면서, 이 연주대에 올라 왕궁을 바라보며 왕좌를 그리워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연주대에 얽힌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인데, 이것은 연주대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난 절경인데다
한눈에 멀리까지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의 건물은 3평 남짓한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이다.
이곳에는 석가모니와 나한들을 모시는 불당인 응진전이 있다.
조선 태종(재위 1400∼1418)이 셋째왕자 충녕대군을 장차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눈치챈 첫째 양녕과 둘째 효령대군이 궁을 나와
관악산에 입산 수도하면서, 이 연주대에 올라 왕궁을 바라보며 왕좌를 그리워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연주대에 얽힌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인데,
이것은 연주대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난 절경인데다 한눈에 멀리까지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의상대사가 문무왕 17년(677)에 암자를 세우면서 ‘의상대’라 이름했었는데,
고려 멸망 후 조선을 반대하며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유신들이 이곳에 모여,
멀리 개경쪽을 바라보며 고려를 그리워하여 연주대(戀主臺)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관악산의 봉우리 중에 죽순이 솟아오른 듯한 모양을 한 기암절벽이 있는데, 그 위에 석축을 쌓고 자리잡은 암자를 연주대라 한다.
孝寧閣(효령각)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81호 시대 = 조선시대
효령각은 1996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孝寧閣 懸板(효령각 현판)
효령대군영정 (孝寧大君影幀)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81호 시대 = 조선시대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1396∼1486)의 초상화로, 가로 70㎝, 세로 90㎝의 작은 규모의 작품이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로, 세종대왕의 형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독실한 불교신자로 불경의 간행과 원각사 창건에 참여했다.
그림은 황색의 관모를 머리에 쓰고, 붉은색 홍포를 차려 입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전신좌상이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 다른 부분의 표현보다 중요한데, 여기서는 약간 도식적이고 미숙하게 처리된 감이 있다.
코와 입술은 윤곽을 묘사하는데에는 신경을 썼으나 수염의 표현은 세밀하지 않으며, 또한 무언가를 잡고 있는 오른손의 형태도 불완전하다.
모자와 허리띠, 옷의 무늬 등에는 금칠을 하였는데 무게감을 실으려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화면이 다소 거칠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여러 번 옮겨 그린 탓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몇 번 옮겨 그린 중모본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현 시점에서 소홀히 해서는 안될 작품이다.
현재 그의 초상화는 관악산 연주암에 보존되고 있다.
<문화재청의 글>
효령대군영정 (孝寧大君影幀)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년~1486년)은 태종과 원경황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세종의 형이다.
효성이 지극했으며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하여 늘 태종을 따라 사냥터에 다녔다고 한다.
효령대군의 영정은 정면을 바라보며, 왕이 평상시에 쓰는 관인 익선관(翼善冠)형태의 황색관모(黃色冠帽)를 쓰고
깃과 소매에 녹색의 선을 댄 홍포(紅袍)를 입고서 용과 봉황으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의자와 발을 올려놓는 족좌대(足坐臺)는 흔히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로 비록 여러번 옮겨 그려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기 어려우나
원본의 형태를 전하고 있다. 얼굴은 정면을 보는 관계로 각 세부가 도식적이고 미숙하게 처리되었다.
하지만 오른손으로 물건을 잡고 있는 자세는 조선초기 초상화에서 보기드문 것으로 이 그림이 갖는 특이한 표현이다.
이 작품은 비록 여러번 모사된 그림이지만 조선전기 초상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연주대 안내글>
기상관측대
기상관측대와 뒤에 보이는 KBS 방송탑
연주대쪽에서 바라본 천수천안관음전 뒤의 장독대 모습
연주암 종무소
과천에서 관악산 연주암으로 올라가는 초입 길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