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우탑
대웅전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는 공우탑이라는 자그마한 탑 하나가 조성되어 있다.
절에서 짐을 져 주면 혼자서 암자로 짐을 나르던 영리한 소가 있었는데,
그 소가 늙어 죽으니 승려들이 은공을 기려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은혜 갚은 소 / <계룡산·갑사의 공우탑>
지금으로부터 약 4백 년 전. 이 땅에 침입한 왜구들은 많은 절에 불을 지르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노략질해 갔다.
왜구의 불길은 의상대사가 화엄대학지소를 열었던 계룡산의 천년 고찰 갑사에까지 옮겨져 천여칸의 화엄대찰이 일시에 잿더미로
화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이 평정된 후 뿔뿔이 흩어졌던 스님들은 폐허가 된 절을 찾아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보게, 학인들이 이렇게 찾아드니 아무래도 중창불사를 시작해야 할 것 같네.』
『시중 살림도 살림이지만 마을 신도들도 난리에 시달려 모두 생활이 어려운데 불사가 여의할까?』
난을 피해 피난을 가지 않고 절을 지킨 인호, 경순, 성안, 병윤 네 스님은 갑사를 다시 중창하여 지난날처럼 많은 학인 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는 도량을 이루기로 의견을 모으고 모두 탁발에 나섰다.
어느 날 해질 무렵, 동쪽으로 길을 떠난 인호 스님은 어디선가 절박한 듯 울어대는 소 울음소리를 들었다.
『저 울음소리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군.』
인호 스님은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까이 가보니 고삐가 소나무에 칭칭 감긴 어미소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고 옆에는 송가지 한 마리가 어미소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는 듯 「음메에∼」 거리며 소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스님은 소의 고삐를 잘라서 소를 구해 주었다.
『자 이제 시원하지? 마음 놓고 풀을 뜯어 먹어라.』
소를 구해준 후 스님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스님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탁발하기 어느덧 7년. 인호 스님을 비롯한 네 명의 스님들은 고픈 배를 주리며 비바람 풍랑 속에서 구한
시주금을 한데 모아 대웅전 건립 불사를 시작했다.
목수의 손길이 바빠지면서 법당이 제법 그 모양새를 드러내게 되자 스님들은 흐뭇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일시적이었다.
서까래를 얹어야 하고 아직도 법당이 완성되려면 돈이 더 필요한데 계획한 공사금이 예산보다 훨씬 부족했다.
스님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불사를 중단하고 다시 시주에 나선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인호 스님은 소 한 마리가 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인부들이 못 들어오게 내몰았으나 소는 막무가내로 들어와 인호 스님 앞에 멈췄다.
『스님,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저는 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이렇게 왔사옵니다. 법당 건립 불사를 제가 도와드릴 것입니다.』
소는 이렇게 말하고는 느릿느릿 절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잠을 깬 인호 스님은 꿈이 하도 생생해서 다시 꿈 속의 소를 되살려 보았다. 『아, 바로 그 소였구나!』
인호 스님은 몇 년 전 시줏길에 구해준 소 생각이 떠올랐다.
스님이 문밖으로 나서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꿈에 본 소가 스님을 기다리기나 한 듯 문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소는 스님을 쳐다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3일 후 서까래를 한 마차 싣고 왔다. 다시 3일 후, 이번에는 기와를 가득 싣고 왔다. 소의 도움으로 대웅전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제 마지막으로 법당 마루만 깔면 불사는 완공을 볼 수 있었다.
『마루는 단단한 향나무가 좋은데…』
『향나무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번번이 소한테 신세만 질 수 없으니 이번엔 우리들이 직접 탁발에 나서도록 하세.』
옛부터 울릉도 향나무와 백두산 향나무가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스님들은 2명씩 짝을 지어 한편은 백두산으로 다른 한편은 울릉도로
떠났다. 백두산에 도착한 스님들은 향나무를 구하긴 했으나 운반할 일이 걱정이었다.
인호 스님과 경순 스님이 서로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미풍이 일더니 그 바람을 타고 온 듯 갑자기 소가 나타났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운반해 드릴 것입니다. 어서 이 나무를 제 등에 앉으세요.』
소는 마치 무쇠로 된 듯 그 무거운 나무를 지고도 끄떡없이 훌쩍 가버렸다.
절에 와 보니 소는 어느새 향나무를 절에 실어다놓고 또 나가는 것이었다.
소는 다시 울릉도에 나타났다. 향나무를 등에 진 소는 바다를 헤엄쳐 건너갔다.
무쇠 같던 소도 여러 차례 걸쳐 바다를 오가며 향나무를 운반하더니 지쳤는지 입가에 흰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스님들이 먹이를 주었으나 소는 먹지도 않고 여러 차례 쓰러지면서도 쉴새없이 울릉도 향나무를 뭍으로 옮긴 후 계룡산 불사의
현장까지 무사히 운반을 마쳤다.
필요한 향나무가 다 마련되자 목수들은 나무를 켜고 다듬어 법당 마루를 깔았다. 법당 안에는 은은한 향내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향나무 운반을 마친 후 지쳐 쓰러진 소는 영 일어나질 못했다. 법당 불사가 완공되던 날, 인호 스님 등 네 명의 스님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소에게로 갔다.
소는 큰 눈을 껌벅이며 스님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제 할일을 다 했다는 듯 스르르 눈을 감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스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소(丑) 의무덤을 잘 만들어준 후 왕생극락을 빌었다.
『아무래도 소는 우리 절과 전생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을 걸세.그리고 그 소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법당을 중창할 수 있었겠나.
후세에까지 소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세.』
스님들은 절 입구에 소의 공을 칭송하는 3층탑을 세우고 「공우탑」이라 명했다.
지금도 갑사로 오르다 보면 중창리에 석탑이 하나 서 있으니 이 탑이 바로 공우탑이다.
갑사는 계룡산 아래에 있는 절로 백제 구이신왕 1년(420년)에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679년에 의상이 수리해서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859년·889년에 새로 지었으나 정유재란(1597)으로 인해 건물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7년(1604)에 다시 지었다.
갑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원래는 현재 대적전이 있는 근처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지을 때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의 주존으로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불좌상이다.
넓적한 얼굴에 반개한 눈으로 당당한 어깨에 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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