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같은 업도 결과가 다르다

백련암 2008. 8. 16. 22:09

 

 

 

    "같은 업도 결과가 다르다"

  虛空 中에서도
  바다 가운데서도
  또는 산 속 동굴에 들어갈지라도
  惡業의 갚음에서 벗어날
  그런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법구경-


  몸(身)으로
  말(言)로
  생각(思)으로 지은 惡業은
  반드시 그 결과를 받고야 만다.

  惡業을 짓고
  善業을 다시 지었다고
  惡業이 상쇄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지은 惡業은
  반드시 그 결과를 받고 나서야 사라진다.
  惡業의 결과에서 벗어날 곳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왜 佛敎에서는
  수행을 통한 업장소멸을 설파하는 것일까.
  언뜻 보기에 이 게송과
  업장소멸은 어긋나는 것 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소금물의 비유를 설하고 계신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잔 속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 그릇 속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마시기 힘들만큼 짠 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 악업을 지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업을 기계론적이나 결정론적으로
  반드시 나쁘게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즉, 惡業을 지었더라도
  그 뒤에 善業을 많이 짓거나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닦아
  罪가 본래 空함을 깨닫게 되면
  惡業에 대한 과보를 나쁘지 않게 받을 수도 있다.

  즉, 과거에 어떤 業을 지었느냐가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 내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과 운명을
  자신 스스로 변화시키고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보(業報)의 ‘보’는 ‘다르게 익는다’는 의미다.
  業에 따라 결정론적으로 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과거에 지은 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내 삶의 모습에 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