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낙산사에얽힌 인연들<의상스님과 원효스님, 범일스님>

백련암 2012. 6. 18. 02:58

 

= 고 육영수 여사의 발원으로 건립된 해수관음상 =

 

파랑새의 위치가 바뀌었네요 예전에는 홍련암 근처에 있었는데...

 

 

♧의상스님♧ 

 

의상의 성(姓)에 대한 의견이 김씨나 박씨로 분분 하지만 그가 왕경(王京) 출신이며, 진골의 신분이었음은 확실하다고 한다.

 

진덕왕 4년(650)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가려고 요동까지 가서, 원효는 무덤 사이에서 자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닫고 먼저 돌아 가고, 의상은 혼자 계속 가던 중에 난을 당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후 661년(문무왕 1)에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중국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

(智嚴)의 문하에서 현수(賢首)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화엄종의 제 3조가 되고, 의상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낙산사(洛山寺) 관음굴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

다.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을 강술하여 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의상의 사상 체계는 화엄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술인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하나가

바로 일체이며, .....하나의 아주 작은 먼지(微塵) 속에 시방(十方)의 세계가 포함된다."고 표현하였다


이 낙산사에는 조신의 꿈을 깨우쳐 주신 관음상.  의상스님이 부처님을 친견을 위해 기도했다는 의상대. 의상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직접

친견했다는 관음굴이 있는 홍련암.

고 육영수 여사의 발원으로 건립된 해수관음상 등이 참배객들에게 아름다움 자연경관으로 소리 없는 법문을 보여주고 있다.

 

홍련암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에서부터 멀리 이곳까지 온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푸른 새[靑鳥]를 만났는

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이윽고 7일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 곧 홍련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의상대사는 드디어 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푸른 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觀音窟)이라 불렀다고 한다.

 

 

 

= 법당내에서 본 관음굴 =

 

의상대

의상대(義湘臺)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 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고 전한다.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창건 이후 언제인가 이 곳에 암자를 지었는데,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천 여 년 전이라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25년에 낙산사 주지 김만옹(金晩翁) 스님이 이 곳에 정자를 새로 지었다. 정자를 지을 당시가 6월인데,

들보로 쓸 굵은 나무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졌고, 스님은 그 소나무로

들보를 만들어 육각형의 정자를 완성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 곳을 의상대로 불러 왔으나 이 때 정식으로 의상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1974년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1975년에도 한 차례

중건되었다.

 

근래에는 1994년 11월 강원도에서 의상대를 점검한 결과 기둥·기와 등 구조체가 10도 가량 기울었고, 기둥이 썩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어 해체되었다가 1995년 8월에 육각정(六角亭)으로 복원되었다.

 

이 곳은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이었으며, 지금도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 보는 곳이 되었다

 

의상대

 

 

 

 

원효스님

 

두터운 우정을 나누던 도반(道伴)인 의상대사가 동해의 관음굴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원효 대사도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낙산사로 향했다.

 

원효 대사의 경험은 관음보살이 현신하는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한 설화를 대표해준다.

원래 관음보살은 세상의 중생들을 구하고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낙산사의 관음보살 또한 여러 모습으로 화현(化現)

해서 교화했다는 경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 마리 파랑새로 변한 관음이 사람들을 일깨워 준다는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원효 대사가 낙산사의 남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 대사가 장난삼아 그 벼를 얻고자 청했다.

여인 역시 ''벼가 없다''고 장난으로 대답했다.

 

 

스님이 다시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스님이 물을 청함에 연인은 그것을 빨던

물을 떠서 주었다.  스님은 그 물을 쏟아버리고 손수 깨끗한 물을 떠서 마셨다.

 

그 때 들판에 있던 소나무 위에서 한 마리 파랑새가, ‘제호를 마다한 화상(和尙)아!’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스님은 비로소 앞에서 만났던 여인이 곧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임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불렀다.

 

이어 스님은 관음성굴에 들어가 그 진용(眞容)을 보려했지만 파도가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범일스님

굴산조사(堀山祖師) 범일 스님 역시 낙산사와의 인연이 깊다.

범일(梵日:810∼889)국사의 성은 김씨, 경주 계림 출신으로 명주도독을 지낸 김술원의 아들이다.

태양을 머리 위로 받드는 태몽을 꾸고 13개월만에 낳았으며 15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제안(齊安) 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다.'라는 말에 크게 깨달았다.

 

38세에 귀국한 후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에 머물며 40여년간 후학들을 교화하였고 여러 왕들이 국사로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항상 '부처의 뒤를 따르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깨달음도 따르지말라'고 가르치며 자기 스스로의 깨침을 중시하였고 80세로 입적하였다.

 

786년 화재로 인해 낙산사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 소실됐었는데 858년 범일 스님에 의해서 중창의 역사를 통해 거듭나게 된다.

특히 이 당시 세 칸의 불전과 정취보살상을 짓고 봉안했던 역사에 인연해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들불로 인한 화재로 사찰의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는데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을 봉안한 불전은 무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낙산사를 중창한 범일 국사가 당나라 유학시절, 명주(明州)에 있는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왼쪽 귀가 잘린 한 스님이 말석(末席)에

앉아 있다가 스님에게 말했다.

 

“저도 신라 사람입니다. 집은 명주계(溟洲界)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후일 본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제 집을 지어주셔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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