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스크랩] 갑사

백련암 2008. 3. 14. 22:47

 

 

 

 

괴목대신제의 유래

약300여년 전 갑사 장명등(밤새 불을 켜두는 등)의 기름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이를 이상히 생각한

스님들은 이유를 밝히고자 밤에 장명등을 지키고 있었는데 덩치가 큰 누군가 기름을 훔쳐가는 것이었다.

놀란 스님들이 그 물체를 따라가 보니 바로 이 괴목의 당산신 이었다. 기름을 훔쳐간 연유를 묻자

당산신은 사람들이 담뱃불로 이 나무에 상처를 내어 이를 치유하기 위해 장면등 기름을 발랐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를 알게 된 스님들은 마을 사람들과 괴목 주위를 잘 정리하였다. 그 이후 갑사의 장명등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으며 마을에 돌았던 역병이 없어져 스님들과 마을주민들은 괴목의 당산신에게 매년 정월 초사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갑사를 오르기전 장승들이 줄지어서 유쾌한 웃음을 지어준다.

각기 할말들을 품고있다.

 

 

    

 

 

    

 

 

 

 

십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초석에 큰 기둥을 나란히 세워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린 일주문은 사찰을 들어서는 첫번째의 관문이다.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佛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섬으로써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보물인 동종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4개의 기둥을 세워 겹처마에 모임지붕으로 익공식(翼工式) 건물이다.

내부의 천정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구조이다. 이러한 모임지붕은 보통 정자(亭子)에 많이 사용되는 형식이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행랑채가 딸린 솟은 대문이다. 대문의 지붕에는 홑처마에 기와를 올렸다.

해탈문은 사찰의 세번째에 해당하는 문으로 번뇌에 묶인 것에서 풀려 미혹의 고통에서 풀려나 미혹의 세계를 넘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갑사는 계룡산 아래에 있는 절로 백제 구이신왕 1년(420년)에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679년에 의상이 수리해서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859년·889년에 새로 지었으나 정유재란(1597)으로 인해 건물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7년(1604)에 다시 지었다.

갑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원래는 현재 대적전이 있는 근처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지을 때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의 주존으로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불좌상이다.

넓적한 얼굴에 반개한 눈으로 당당한 어깨에 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강당의 옆에 건립되어 있는 'ㄴ'자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안에는 약사불을 모신 불단이 마련되어 있다.

 

 

 

 

 

 

문화재자료제53호
삼성각은 칠성·산신·독성의 삼성을 모신 곳이다. 건물 이름이 삼성각 인 이유는 모두 불교 밖에서 수용한 신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각이라 한다.

칠성은 도교의 북두칠성이 불교화한 것으로 수명장생을 주관하는 별이다.

산신은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난 만사형통의 신이며,

독성은 혼자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지어 삼성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삼성각 안에 같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외경시 되어오던 호랑이를 산의 신령(神靈)으로 존경하여 신앙의 대상이였던 호랑이신앙을

불교화하면서 산신(山神)으로 승격시켜 수용하게 그린 것을 산신탱화라고 한다.

이 산신탱화의 도상적인 특징은 호랑이의 변화신인 산신을 중심으로 반드시 호랑이와 함께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백발의 산신은 조롱박이 달린 지팡이와 산신을 들고 옆에는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호랑이를 이끌고 있습니다.

 

 

 

 

 

 

    

 

 

 

 

 지방유형제50호
갑사 동쪽 계곡 약 100m 지점의 자연 동굴안에 있는데, 원래는 갑사 뒷산의 사자암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손모양을 살펴보면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구성미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공우탑

대웅전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는 공우탑이라는 자그마한 탑 하나가 조성되어 있다.

절에서 짐을 져 주면 혼자서 암자로 짐을 나르던 영리한 소가 있었는데,

그 소가 늙어 죽으니 승려들이 은공을 기려 세운 것이라고 한다.

 

 

 

 

 

 

    

 

 

                                     보물제257호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갑사 대적전은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석가모니·아미타불·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원래의 금당지 옆에 있던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887년(진흥왕 원년) 무염대사가 중창한 것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임진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년)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년) 寺僧 인호 경순 성안 보윤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했고, 1654년(효종5년)에는 寺僧 사정 신징 경환 일행 정화 균행 등이 중수하였으며,

이 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1875년(고종12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1899년 적묵당이 신축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고,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조성된 불상과 탱화 경판이 남아있으며 1866년(고종3년) 개금불상한 施主秋가 있다.

또한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로써 그의 활약상은 범우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 설화집에 실린 공우탑에 대한 글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이 끝난 후 스님들이 폐허가 된 절을 찾아 다시 모여들자, 왜란중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절을 지킨

인호, 경순, 성안, 병윤 스님은 갑사를 다시 중창하기로 하고 모두 탁발에 나섰답니다.

동쪽으로 길을 떠난 인호 스님이 해질 녁 어느 산아래 이르자 절박한 소 울음소리를 들려 왔다네요.

그래서 스님이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자, 고삐가 소나무에 칭칭 감긴 어미 소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고

옆에는 송가지 한 마리가 어미소의 고통을 아는 듯 안타까워 울부짖으며 소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었더랍니다.
그것을 보고 스님은 소의 고삐를 잘라서 소를 구해 주고 다시 길을 재촉하길 7년,

네 분 스님들이 모은 시주금을 갖고 대웅전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 가기 시작하였으나

문제는 돈. 그렇다고 공사를 그만두고 다시 시주에 나설 수도 없고 스님들은 암담했겠죠.

그러던 어느 날 밤, 인호 스님은 꿈에 소 한 마리가 절 안으로 들어오더랍니다.

아직 공사중이라 인부들이 못 들어오게 막았느나, 소는 막무가내로 들어와 인호 스님 앞에 멈춰 서더니, 소가 말을 한거죠.
"스님,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저는 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이렇게 왔사옵니다. 법당 건립 불사를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절 밖으로 사라진거죠. 꿈에서 깬 인호 스님은 꿈이 하도 생생해서 다시 꿈속의 소를 생각하더니,

"아! 바로 그 소로구나" 생각하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문밖에 나섰더니 소 한 마리가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 소는 스님을 쳐다보고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3일 후 서까래를 한 마차 싣고 왔다네요,

또 3일 후에는 기와를 가득 싣고 오고, 하여간 소의 도움으로 대웅전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제 마지막으로 법당 마루만 깔면 불사는 완공을 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마지막으로 법당 마루를 깔기 위해 스님들이 백두산과 울릉도로 향나무를 구하러 떠났답니다.

백두산에 도착한 스님들은 향나무를 구하긴 했으나 운반할 일이 걱정,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그 소가 나타나 향나무를 자신의 등에 얹으라고 하더니 어느새 절에 옮겨 놓고는

이번에는 울릉도에 나타나 향나무를 등에 지고 바다를 헤엄쳐 건너더랍니다. 하여간 소들은 대단하죠.(소띠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여러 차례 바다를 오가며 향나무를 운반하던 소는 결국 지쳤는지 입가에 흰 거품이 일기 시작하였지만,

그 덕분에 필요한 향나무들이 마련되고 법당 마루는 은은한 향내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향나무 운반을 마치고 지쳐 쓰러진 소는 일어나질 못하였다네요.

하여간 법당 불사가 완공되던 날, 네 분의 스님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소에게로 다가가자,

소는 큰 눈을 껌벅이며 스님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제 할일을 다 했다는 듯 스르르 눈을 감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더군요.

이에 스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소의 무덤(어디 있는지는 ?)을 잘 만들어준 후 부처님께 왕생극락을 빌었죠.
그리고 스님들은 절 입구에 소의 공을 칭송하는 3층탑을 세우고 "공우탑"이라고 하였답니다.

 

 


  

 

 

 

출처 : 풍경소리~
글쓴이 : 째째한순이 원글보기
메모 :

'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진천 보탑사 여행  (0) 2008.08.20
[스크랩] 마곡사  (0) 2008.03.18
[스크랩] 신원사  (0) 2008.03.14
[스크랩] 보탑사 부처님  (0) 2008.03.06
[스크랩] 동학사  (0) 2008.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