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스크랩] 평상심(平常심)/정무스님

백련암 2008. 7. 22. 13:26

***평상심(平常심)***
    ...정 무 스님... 선종에서 즐겨 쓰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보통 사람들은 평상심이 도라는 말을 들으면 당황합니다. 평상심이 어찌 도(道)냐며 반문합니다. 평상심.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것. 이것이 평상심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밥만 먹으면 될 것을 '맛이 있느냐 없느냐', '더 맛있는 밥은 없을까' 등등 생각에 생각을 거듭합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버릴 것은 오직 간택뿐 밉다 곱다는 마음만 없으면 확 트여 도리어 명백하리라. [신심명] [신심명]에서는 우리의 분별하는 생각을 일러 '간택심 (揀擇心)'이라고 했습니다. 일체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옳다 그르다'고 분별하는 간택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평상심은 무엇일까? '옳다 그르다'고 분별하는 간택심이 없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平常心)입니다. 평상심에서 볼 때 수행은 때와 장소를 가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 전체가 수행의 시간이요 공간입니다. 밥 먹고 잠자고 마당 쓸고 빨래하는 그 어느 한 가지도 수행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선종에서 '행주좌와 어묵동 정(行住坐臥 語默動靜:걷고 서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 하고 움직이고 조용히 하는 것) 속의 선'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일상생활의 중요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실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는 일상생활이 곧 수행이요, 일상생활을 떠나서는 도(道)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 바히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히야여, 들을 때는 듣는 것만 있게 하고, 볼 때는 보는 것만 있게 하며, 생각할 때는 생각만 있게 하라." 양치질을 할 때는 양치질만 하고, 설거지를 할 때는 그릇을 잘 닦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생들은 그릇을 닦으면서 그릇 닦는 일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을 떠올리고 온갖 번뇌망상을 다 일으킵니다. 수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은 다음 생을 위한 것도 아니요 전생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수행은 오직 '바로 이 순간',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것입 니다. 수행은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 신이 있느냐 없느냐 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법에 있어서도 기도를 하느냐 참선을 하느냐 주력을 하느냐 경전공부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일상 속에서 흔들림 없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 생각과 행위일 때 수행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조 홍인(弘忍)대사 회상에 법축(法竺)이라는 스님이 있 었습니다. 어느 날 법축스님은 꽃 한 송이를 들고 선상 (禪床)을 한 바퀴 돌더니 꽃을 향로에 꽂으며 뒷짐을 지고 말했습니다. "화상들이시여, 말씀해 보십시오. 이게 어떤 뜻입니까?" 스님들이 여러가지로 말을 하였으나 법축스님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두 달 뒤 한 승려가 법축스님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대가 말해보시오." "저는 단지 꽃을 향로에 꽂았을 따름인데 스님들께서는 스스로 의심했습니다. 달리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삶이 무엇이며 인생의 의의가 무엇인가를 의심하는 사람 들을 대할 때 나는 이 이야기를 많이 들려줍니다. 삶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의의가 무엇입니까? 내가 삶 자체요, 내가 인생의 의의 그 자체입니다. 나 말고 삶이 어디 있으며, 나 이외에 인생의 의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두고 '물속에서 물을 구한다 스스로가 법이면서 법을 구한다'고 표현합니다. 말하자면 마음이라는 법이 물이라는 법을 마시고 공기라는 법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 이고 생각하는 이 법이 '이 뭣꼬' 라는 화두도 들게 하고 수행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묘한 것이 법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직 이것뿐이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밖에서 찾지 말고 안을 들여다 볼 일입니다. 이 법의 실상 은 마음 안에 모조리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삼계(三界)의 법 가운데 가장 오묘한 법이 바로 마음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법은 형체도 빛깔도 없지만 그 위신력은 대단합 니다. 빌딩도 짓고 핵폭탄도 만들며 달나라도 왕복합니다.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며, 중생이 되기도 하고 부처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은 우주 전체와 통하는 입구입니다. 누구든 자기의 마음을 통하여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습 니다. 곧 이 우주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오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나'입니다. 나의 마음은 우주가 만들어낸 마음이요, 우주를 포함하고 있는 우주 그 자체입니다. 곧 우주와 마음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조사스님들께서 '불이(不二)'라고 하신 것입니다. 번뇌가 없는 평상심(平常心)! 실로 마음이 번거롭지만 않 다면 진리를 따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에 집착하면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집착이 모든 것을 왜곡 시키고, 분주함이 마음의 본질을 흘려놓는 것이지, 마음 자체는 본래 흐린 것이 아닙니다. 법축스님은 단지 꽃을 향로에 꽂았을 뿐 다른 마음은 저혀 없었습니다. 스님도 법이고, 꽃도 법이고 향로도 법이고 향로에 꽃을 꽂는 행위도 법입니다. 일체가 모두 법인 것 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분별입니다. '법이다, 법이 아니다'라는 분별만 없으면 그것이 바로 도(道)입니다. 생사(生死)가 본래 없건만, 우리의 감각 기관인 육근(六根)이 대상에 집착하여 나고 죽는 중생심을 불러일으키고 분별하기 때문 에 대도(大道)를 막는 것입니다. 결코 대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大道無難]. 분별하지 않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분별하지 않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에 속지 않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월간 [법공양] 5월호에서-
The Garden/조지윈스턴
출처 : 나누는 기쁨 실천회
글쓴이 : 은빛물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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