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연기와 중도

백련암 2008. 8. 25. 04:37
연기(緣起)와 중도(中道)(1)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내가 말한다. 공이라고
  또한 거짓 이름이라고
  또한 중도라고」
  衆因綠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위의 것은 용수(龍樹)보살의 중론에 있는 삼제게(三諸偈)라는
유명한 게송입니다. 

그 내용인 즉 모든 우주 만물 일체가 생기는 기연에 대해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남의 종교를 예로 드는 것은 실례이지만,
예수교의 경우 창조설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고... 전부 하나님이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천지를 자기네가 신봉하는 신이 창조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믿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믿고 하는데,

그 교인들은 절대적으로 신봉 안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만물이 생기는 기연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이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불교의 경우 만유연기설(萬有緣起說)입니다. 일체 만유가 연기로 됩니다.

연기란 어떤 것인가? 인연으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비유로 말하면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는데,

바닷물은 인(因)이 되고 바람은 연(緣)이 됩니다.

바닷물이 아무리 많이 있다해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가 안 일어납니다.

 

바닷물 위에 바람이 불어야 파도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인연(因緣)이라 합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면, 금으로써 무슨 물건을 만든다고 할 때,

금은 인(因)이 되고 사람의 수공은 연(緣)이 됩니다.

그래서 가락지도 만들고 숟가락도 만들고 가지각색의 물건들을 만들지 않습니까?

이것을 인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체 만법이 연기로 된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 원리 입니다.

이것을 용수보살이 간단하게 게송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내가 말한다. 공이라고」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공이란 실체가 없다 그 말입니다.

무엇이던 실체가 있으면 화합이 안됩니다.

서로 서로 자유 자재하게 합하게 되는 것은 그 자체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즉 공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입니다.

 

실체가 있으면 그것을 고집하여 서로 합하지 않습니다. 연기가 안됩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인연으로 되어 있는데, 이 인연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고,

또 어떤 것으로 고정이 되어 있을 것 같으면 서로 서로 융통이 안됩니다.

융통이 되어 연기가 일어나는 근본은 그 모든 것이 다 공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것을 거짓 이름이라고 한다」
  亦爲是假名

연기로써 천지 만물이 구성되는데 그 자체가 공이기 때문에
즉 실체가 없기 때문에

융합되어 있는 모양은 단순히 거짓 이름(假名)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에 바람이 일어 파도가 생겼습니다.

파도는 영원히 있지 않고 곧 없어집니다. 자꾸 이리 저리 변합니다.

그런 동시에 임시로 나타나는 물체는 실체가 아니라 거짓인 것입니다.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며 공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중도입니다」
  亦是中道義

중도라 함은 양극단을 여윈 것입니다.

아까 공이라고 한 것은 무(無)에 해당하고, 가명이라 함은 유(有)에 해당하는 소리입니다.

연기라 함은 전체가 무인 동시에 공입니다.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색(色)인 동시에 공(空)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과 같은 소리입니다.

 

색인 동시에 공이라 하면 그뿐인가. 아닙니다.

색도 공도 아닌 동시에 색과 공이 둘이 아닙니다.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이상이 용수보살의 중론에 있는 유명한 삼제게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중국에서 아주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첫째는 선종(禪宗), 둘째는 천태종(天台宗), 셋째는 화엄종(華嚴宗)입니다.

 

천태종을 처음 세울 때 혜문(慧文)스님이 이 삼제게에 의지해서 세웠습니다.

또, 이것은 화엄종에도 통하고 선종에도 다 통합니다.
결국 연기란 공이며 색이며 중도입니다.

색이 즉 중도이고 공이 즉 중도입니다.

세가지가 하나 하나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융통 자재합니다.

이것을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고 합니다.

 

즉 모든 것이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 서로 통해서 원융무애하게 활동하는 그런 존재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의 근본 사상인데,

 

화엄종에서는 십현연기(十玄綠起:연기를 시간과 공간 등의 열가지 방면에서 설명하는 것)를 표준으로 하고,

천태종에서는 일념삼천(一念三千:한 생각 가운데 삼천의 제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표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흔히 와서 묻습니다. 예수교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면
그만인데,

불교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어렵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연기로서 말하는데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예전 조사 스님네들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천지 창조설과 만유연기설(萬有緣起說) 즉

일체가 연기로서 되었다는 것은 서로 대립적입니다.

종교의 진리라 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것으로 어느 시대에 어떤 학설이나

어떤 학문이 생겨나더라도 그것에 꼭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종교가 그 시대의 사상에 얽메일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전체적인 사상의

조류가 어떻게 흘러나간다 할 때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근세기에 와서 진화론이 제창되었습니다.

모든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때에 그 전에는 요새 불도우저로서 땅을 밀어버리면 그만이듯,

천지 창조설로서 확 밀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성경에 있는데, 무슨 잔소리냐! 」 그러면 아무도 말못합니다.

그런데 다윈이「종(種)의 기원」을 발표하여 진화론을 주장하게 되고

여러가지 구체적인 사실들에서 봐도 진화론이 옳다 말입니다.

 

그러니 학자들이 진화론으로 기울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예수교 측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고 종교재판에 붙여 진화론에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

진화론은 거짓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우리 예수교 믿는 사람들에게는 안 통한다.

성경을 그대로 믿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성경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성전이, 일시적으로 학자들이 무슨 소리를 한다고

그것에 흔들려서 아, 그것이 옳다 이런 식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진화론은 사실이 아니라고 유죄 판결을 내려버리고 내내 버티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자꾸 지나면서 버티는 것도 어느 정도이지 더 못 버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바티칸에서 성명서를 내어버렸습니다.

 

진화론에 대한 종교재판의 유죄 판결은 취소한다고. 그렇게 되면 진화론을 인정한다는 말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 가지로 보아 진화론이 옳은데 끝까지 버틴다면 결국 자가당착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세속 학문이나 과학이 무슨 소리를 한다고 그것을 그냥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지만,

장구한 세월을 두고 와서 그 이론이 옳다고 인정이 되면 종교도 그것을 배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몇해 전 천주교에서 교리 문답서를 새로 출판했습니다.

천주교에 들어 갈려면 교리문답에 합격이 되어야 됩니다.

 

성경의 근본 골수를 발췌해서 교리문답을 출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참고할 말이 있습니다.

교리문답서 서론 첫머리에 무엇이라고 했느냐하면, “유구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에 천지만물이 생기고 인간이 생겼다” 이렇게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하고는 그 방향이 남북으로 영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국내의 각 신문에서 「현대 옷을 입은 천주교」이렇게 보도를 했습니다.

진화론이라는 현대 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교황청에서도 진화론의 유죄 판결을 취소하고 인정해 버렸고,

한국에서 교리문답의 서론에 “유구한 세월 동안에 천지 만물 인간이 생겼다 고 하여

자연현상 그대로를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에서 방향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예수교에서는 이렇게 천지 창조론에서 전환하여 시대에 적응할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불교의 연가라 하는 것은 현대 과학하고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모든 것이 연기입니다. 연기 자체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공(空)입니다.

동시에 유(有)고 색(色)입니다. 공이 색이고 색이 공입니다.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중도입니다. 골자는 중도에 있습니다.

중도라고 하는 것은 양변을 여의고 양변이 융합하는 것입니다.

 

생(生)도 아니고 멸(滅)도 아닌 동시에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인 것을 중도라 합니다.

공(空)도 아니고 색(色)도 아닌, 동시에 공이 즉 색이고 색이 즉 공인 것을 중도라 합니다.

 

어떻게 들어보면 아이들 수수께끼 놀음 같지만, 여기에 묘한 이치가 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이것이 이해가 되면, 연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과학 중에서도 물리학이 가장 발달했다고 보는데,

그 중에도 가장 첨단이 무엇이냐 하면 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 입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이론을 제시 할때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질량 에너지의 등가원리로서 표현했습니다.

 

즉 보기에는 질량과 에너지가 대립되어 있지만 질량과 에너지가 둘이 아닙니다. 

질량이 곧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즉 질량입니다.

 

이전 고전물리학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어서

에너지도 없어지지 않고 질량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질량과 에너지는 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는 질량이 곧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곧 질량으로서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는 딴 물건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얼음과 물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을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이 없어졌습니까?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얼음이 없어졌습니까?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즉 물이고 물이 즉 얼음입니다.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났을 뿐 질량과 에너지가 따로 없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상대성 이론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에서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물과 얼음이 서로 다르게 나타날 때에 물이 없어지고 얼음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물 그대로 전체가 얼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不滅) 얼음이 새로 생긴것이 아닙니다.

(不出) 모양만이 바뀌어서 물이 얼음으로 되었을 뿐이지

물이 없어지고 얼음이 새로 생긴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제나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 입니다. 이와 꼭 같습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또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가 새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업니다.

 

불생불멸일 뿐 아니라 동시에 부증불감 입니다. 불생불멸이니 의례 부증불감이 아니겠습니까.

동양사상을 잘 아는 일본 물리학자들은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불생불멸 부증불감 그대로라고

아주 공공연히 말합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 술어를 잘 모르니까 이런 표현을 그대로는 못해도

내용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보존된다고 합니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합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입니다.

상주 법계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다 상주 아닙니까.

불(佛), 법 (法) , 승(僧)의 모든 것이 다 상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郞是空 空卽是色)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유형 (有形)이 무형(無形)이고 무형이 유형이란 말입니다.

 “아니 바위가 허공이 되고 허공이 바위가 된단 말인가?”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주 나누어 가 보면 분자들이 모여 생긴 것입니다.

분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 생긴 것 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의 결국 소립자 뭉치 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서 시시 각각으로 색즉시공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입자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입자가 나타날때는 색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입니다.

이리하여 입자가 자꾸 유형으로 무형으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립자 물리학에서 증명된 사실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연기는 어디에 서 있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우주가 연기로서 변화 형성되어 가지만,

거기에는 불생불멸 부증불감이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대로 입니다.

 

이렇게 되어 과학이 발달해도 상대성 원리가, 양자이론이 불교의 이론에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불교를 공격은 고사하고 자꾸 가깝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있습니다.

부처님은 진여 혜안으로서 우주의 근본 본질을 들여다 보고 연기를
말씀하시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말씀하시고, 부증불감을 말씀하시고, 중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요사이 과학자들은 혜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육안으로 보고 실험을 통하여 부처님께서 보신 그것에 가깝게 왔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론이 없었다면 불교는 어떻게 할려 했는가 하겠습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질량의 등가원리는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라는 것인데,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유형인 질량이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할때

불생불멸인 동시에 부증불감입니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 입니다.

이 원리는 물리현상 그대로로서 변경시킬래야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불교이론을 뒷받침 시키기 위해 변경시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본시 진리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니까 결국에 가서는 둘이 합쳐져 버립니다.

 

그래서 에너지 질량의 등가원리 입자의 생성-소멸을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 중도, 불생불멸, 부증불감이라는 것이 증명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생명의 기원을 말할때에 진화론(進化論)과 창조설(創造說)을 대립시켜 많이 말하는데,

창조설은 과학적으로 성립 안된다고 보고, 진화론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진화론에서는 모든 것이 자꾸 변화를 한다고 합니다.

변화 안하면 진화할 수 없는 것이니까 창조론에서는 본시 하나님이 창조했으니 안변한다 불변이라고 설명합니다.

 

불교에서는 변화와 불변을 어떻게 보는가?

변하면서 안 변하고, 안 변하면서 변한다! 이 무슨소리인가?

변하면서 안변하고 안 변하면서 변한다니!

이것을 불교적문구로서 표현하면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진여문(眞如門)에 불변과 수연이 있습니다.

불변이란 진여 자체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수연이란 인연 따라 자꾸 변한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불변이란 바닷물 자체이고, 수연이란 파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바다에 온갖 형형색색의 파도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아무리 온갖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도 물이 변합니까?

물 자채는 언제나 그대로 입니다. 변하면서 안변합니다.

물은 변하지 않지만 파도는 이리 저리 자꾸 변합니다.

그러니 변하면서 안 변하고 안 변하면서 변합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연기가 되어 일어납니다.

 

물 위에 파도가 일듯이 물은 인(因)이 되고 바람은 연(緣)이 되어 파도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 물이 출렁이고 파도가 일어도 파도 자체가 물이고 물 전체가 파도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물이 파도가 될때 안 변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아무리 변해도 물 전체 그대로 입니다.

결국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입니다. 서로 통합니다.

 

이처럼 불교란 것이 이상하여 아무리 절벽같이 탁 부딪쳐 막혀도 빠져나가는 큰 대문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보통 세상 어른은 어떤것에 확 부딪치면 있는 것과 없는것이 서로서로 통하듯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연기법이란 무엇이던 전부 다 통해 버립니다.

아무리 철문을 첩첩이 닫아 두었다고 해도 연기법의 진리를 들이대면 철문이 확 열려 사통오달로 전부 다 통합니다.

아무리 바위로써 태산을 쌓아 두었다고 해도 불교 이론을 갖다 놓으면 바위는 모두 다 무너져 버립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니까, 이것을 무애법문 즉 꺼리낌 없는 법문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근본이 연기인데, 연기는 무애에 있습니다. 용수보살의 게송에서도
말했지만

연기가 최고로 발달된 것이 화엄종의 법계연기라는 것입니다.

 

이무애, 사무애, 이사무애, 사사무애의 모든것이 무애연기에 있습니다.

리고 화엄십현이라는 것이 전부 무애법문입니다.

 

금방 이야기 했듯이 연기라는 것이 불생불멸, 부증불감,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있는데,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것이 무애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연기법이라는 것이 무애법입니다. (끝)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