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自我得佛來)
지내온 많은 세월은(所經諸劫數)
한량없는 백천만억아승지로다. (無量百千萬億阿僧祗)
이 귀절은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는 말씀인데 법화경의 골수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성불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 하면 숫자로써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무량무궁한 한량없는 그런 세월이 경과했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봐서 이것은 사실하고 틀립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해서 성불하여 열반하신지 지금부터 2천 5백여년 밖에 안되었읍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 말씀이 자기가 성불한 지가 무량백천만억아승지라고 했을까?
어째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사실에 있어서 부처님이 2천 5백년 천에 출현하여 성불하신 것은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실지가 아닙니다. 실지로는 한량없는 우수한 아승지겁 이전에 벌써 성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불교에 대한 기본자세 근본자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보면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 할 때 “성불이다”,
즉 부처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레 하는 말입니다마는 실제로는 안 맞는 말 입니다.
실제내용은 무엇이냐 하면 본래부처(本來是佛)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억천만우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더라 이것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었는데 다시 무슨 성불을
그런데도 “성불한다 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중생을 지도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하는 말일 뿐입니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했다고 하는 것은, 깨쳤다고 하는 것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한 본래 모습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중생, 일체생명 심지어는 구르는 돌, 서 있는 바위, 유정(有情) 무정(無情) 전체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다 성불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합니다.
모를 때는 사바세계이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사바세계가 아니고
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본래 자기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는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시방법계가 불국토(佛國土) 아닌 나라,
정토(淨士) 아닌 나라가 없고, 전부가 불국토이고 전부가 정토라는
이것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흑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천당간다” 그런 식 아닙니까?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이 안됩니다.
본래 부처인 줄 확실히 알고 온 시방법계가 본래로 불국토,
정토인 줄을 알았으면 그만이지 또 무슨 구원이 있겠읍니까?
그래서 불교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구원이란 것은 절대로 없읍니다.
전체가 본래로 부처인 동시에 천체가 본래로 불국토, 정토인데
누가 누구를 구할 수 있읍니까?
이것이 어느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불교가 어느 종교, 어느 철학보다 가장 수승한 이론을 갖고 있다 하는 것이
공연히 내가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실제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佛), 부처란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부처라 하는 것입니다.
우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 아닌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심지어 저 허공까지도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처소 시방법계 전체가 모두다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즉 정토며 불국토인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부처고, 모든 처소가 전부 다 정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항상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전체가 캄캄할 뿐 광명을 못 봅니다.
그와 꼭 마찬가지 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천체가 광명인 동시에 대낮 그대로 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부처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읍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해서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하고 말할 뿐 입니다.
근본 병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눈을 떳나 눈을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읍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광명이고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암흑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천체가 다 부처이고 천체가 다 불국토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천체가 다 중생이고 전체가 다 사바세계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말할 것 없읍니다.
누가 눈 감고 캄캄한 암흑세계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읍니까?
누구든지 광명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정토에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어떻게든 노력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해결 다 됩니다.
가고 오고 할 것 없읍니다.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해결 다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아승지겁 전부터 벌써 성불했더라
본래 부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은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감았어 !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눈을 뜨겠느냐 이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 보고 자꾸 “눈 감았다” “눈 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도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는 그것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명경에 끼인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대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시방세계를 고루 비치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고 고요하게 그대로 확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 뜰래야 안 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 번 뛰면 부처에 들어 간다고,
한 번 훌쩍 뛰면 눈 다 떠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는가?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 눈이 어두워진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 진, 치(貪瞋癡)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 밝아질래야 안 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내만 좀 잘 살자
내만! 내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 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 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 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 깨나 내 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 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기준을 둡니다.
남 도우는 데에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아지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 보일리 있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아승지겁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은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수익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자기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번 굶어 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서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하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로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하나도 안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 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아승지겁 억천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사가 괜찮은 것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사니 칼부림을 하고, 전부 그런 식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 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 먹히셨으니 말 다한 것 아닙니까?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 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이것을 버리는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 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근래에 와서 순치황제(順治皇帝) 같은 분,
만주에서 나와서 18년 동안 전쟁을 하여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건설한 분 아닙니까?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서장(티뱃) 그리고 안남(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해탈도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 대청제국은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負木)이 되었읍니다.
대청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대영웅 순치황제 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 할래야 성취 안 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출가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본시 서방의 결식하며 수도하는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고?
(我本西方一納子 緣何流落帝王家)하고 탄식하였습니다.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만승천자의 보위(보位)를 헌신짝같이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시방법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할 터인데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얘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25사변때 서울대학에서 교수하던 문박사라고 하는 이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형제 다 버리고 사회,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서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혼자만 좋을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야 !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형제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자 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당신 여태 5O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한 것이야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
당신 말처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이야 말로 철두철미
개인주의자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진보적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에 모두 그렇게 씌여 있어
“남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보살의 육도만행(六度萬行) 6바라밀의 처음이 무엇인고 하니
베푸는 것이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布施)야 !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묵묵)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을려는 것이 아니고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탐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버릴려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하는 이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전에도 이야기 하지 않았읍니까?
불공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절하고 복비는 것이 불공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도우는 것이
불공이라고.
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 보다도 중생을 잠깐동안이라도 도와줄 것 같으면
그것이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 보다도 여러 억천만배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이 있다고.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마음의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 하도록
영원한 큰 살림살이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도와주는 것이 부처님에게 갖다 놓는 것보다 비유할 수 없는
그런 큰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 천리교(天理敎)의 교주되는 사람이 “나까야마 마끼”라는 사람인데 여자입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도 굉장한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공부를 해서 자기 딴에는 마음의 눈을 떠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자기 살림살이는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살림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남편을 불러 앉히고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당신 마누라였는데 오늘부터는 내가 당신 스승이야 !
내가 깨쳤어 ! 내가 하나님이니까 내 말 들으시오.
-(저게 미쳤나, 왜 저러지)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요?
-우리 살림살이를 전부 다 팝시다.
이것 다 해 봐야 얼마나 되나요. 모두 다 남에게 나누어 줍시다.
그러면 결국에는 참으로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돈벌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재산을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이제 내외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밥은 얻어 먹으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이익되는 것, 남에게 좋은 것,
남 도우는 것을 찾아 다니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돈벌이는 크게 한 것 아닙니까? 우선의 조그만 살림살이를 논놔주고서.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도 큰 살림살이를 한번 해 봐야겠다’
이렇게 작정하고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다 팔 사람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웃음)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재산 온통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 준다면 !
그렇게만 되면 내가 목탁가지고 따라 다니면서 그 사람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설사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생활방침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해 욕심부라는 것은 결국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자꾸 노력하면, 참으로 남을 돕는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결국에는
마음의 눈을 떠서 청천백일(靑天白日)을 환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것을 많이 할 것 없이 한 가지라도 남을 도우는 생활을 해보자 이것입니다.
작년 겨울에 불공에 대한 법문을 했더니 신문기자들이 정리해서
“불공대상은 법당에 앉아있는 부처님이 아니고 일체중생”이라고 해서 한창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보통 사회사람들이 볼 때는 참 좋은데 스님네들이 볼 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불공한다고 부처님께 갖다 놓고 절하지 말고 자꾸 “남 도우자 남 도우자” 해 놓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으라고? 하면서 한때 소동이 났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내가 설사 천번 만번 시궁창에 처 박힌다고 할지라도 자꾸 말할 참이야.
불공은 남을 도우는 것이,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라고.
우리 불교가 앞으로 바른 길로 설려면 승려도 신도도 모든 생활방향이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느냐’ 하면
남을 돕는데로 방향이 완전히 돌려져야 합니다.
승려가 항상 예전같이 산중에 앉아서 저 꼬부랑 할머니가 됫쌀이나 돈푼이나 가지고 와서 불공해 달라고 하면
그걸 놓고 똑딱 거리면서 복 주라고 빌고 하는 그런 생활을 그대로 계속하다가는
불교는 앞으로 영원히 없어지고 맙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도 또한 그렇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자식이 머리만 아파도 쌀되나 가지고 절에 가서
“아이고 부처님 우리 자식 얼른 낫게 해주십시오”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참된 부처님 제자 아닙니다.
승려도, 신도도 부처님 제자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발전 없습니다.
산중에 갇혀서 결국에는 아주 망해버리고 맙니다.
마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도 논을 팔아서라도 자식들 공부
시킬려고 합니다.자식 공부시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인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승려를 자꾸 교육시켜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포교하며 어떻게 남을 지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나중에는 법당의 기왓장을 벗겨서 팔더라도
“승려들을 교육시키자”하는 것이 내 근본생각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종단적인 차원에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명이 억천만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있는데
왜 지금은 캄캄밤중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깨치든지 아니면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고기장사를 하든 뭐를 하는 사랑이든지
화두를 배워서 마음속으로 화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화두를 하고 행동은 남을 도우는 일을 꾸준히 할 것 같으면
어느 날엔가는 마음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 뜨여서 그때에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에 살고 있다는 그 말씀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참으로 인간 세상과 천상의 스승이 되어서 무량대불사(無量大佛事)를 미래겁이 다 하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춤 뿐이겠습니까? 큰 잔치가 벌어질텐데 그렇게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끝)
* 위 법어는 1981. 7. l (음력 5. 30) 해인사 큰법당에서 행하신
상단법어를 정리한 것입니다.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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