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완주 송광사 = 1

백련암 2010. 8. 2. 21:29

송광사

송광사는 신라 진평왕 5년(583)에 터를 잡았고,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 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에 의해서 개창되었다.

 

커다란 소조(塑造) 부처님과 대웅전 천정에 그려진 비천상, 오백의 나한님을 모신 나한전 그리고 국내 사찰로서는 유일하게

십자각으로 조형된 종각,

 

창건기 = 송광사는 신라 도의선사가 절터를 찾다가 영천수를 발견하고 돌을 쌓아 표식을 하여 두고 다시 찾아 창건하니 그때가 

경문왕 7년 이였다.

 

송광사는  신라말 보조 체징국사가 백련사로 중건하였다. 그후 고려 보조지눌국사께서 제자들에게 쇠약해진 불법을 중흥하고저

송광사를 중건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후 임진왜란때 승병들의 주둔지였던 송광사가 왜군에 의해 전소 되었다.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스님들이 벽암당 각성스님을 모시고 지눌스님께서 "이곳에 절을 세우면 크게 번성하리라"

뜻을 받들어 중창불사를 광해군 14년에 시작하였고  그때 승명의 할아버지 이극룡이 땅을 희사 하였다.

 

이후 1623년에 대웅전이  2층으로 준공되고 백련사를 송광사로 개칭하며 송광사 사적비를 건립했다

그후 송광사는 도첩을 발행할 정도로 사세가 번성 했으나, 1814년에는 약사전을 증수하고 송광사 경역이 축소되어 3km 밖의 일주문

을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고 대웅전이 기울자 개축하면서 1층으로 개축하였다. 1944년에 현재 위치로 일주문을 이전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국난을 통해 전국토가 폐허가 되고 재정이 고갈된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본사를 복원·중창한다는 생각을

낸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보조국사의 뜻을 쫓아 덕림스님 등이 뜻을 내었고 당대의 최고의 승려

로서 국가의 절대적 신임과 수행, 학덕을 갖춘 벽암각성대사를 大공덕화주로 파견하여 본사를 복원·중창했다는 것은 이 사찰의 복원

중창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적 결집을 새로이 공고히 하는데 국가적으로도 대단히 간과할 수 없었기에 국가의 절대적 정책배려와

재정적 후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명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신 소헌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오실 것을 기원하고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이기도하며 병자호란시 전주사고(왕조실록)를 지키기 위하여 본사에 승군 700명을 배치하였던 곳으로서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또한 석가의 화현이라고 하신 진묵스님께서 1623년(계해년) 대웅전 삼존불 조성시 증명법사로 초청되었으나 부여무량사에서도

동시 초청된 관계로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무량사에는 단주를 보내 법력을 나투시었는데 주장자가 밤낮으로 꼿꼿이서서 법상을

물리는 신의함을 나투신 곳이기도 하다.

 

진묵스님께서는 이적을 많이 나투신 관계로 그저 신화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나 초의선사가 제봉선사의 주선으로 편찬한 문헌외

에는 족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이곳 송광사 개창비에 (大禪師 震○堂)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진묵스님께서 많은 시간을 이곳에

주석하셨음을 엿볼 수가 있다.

 

벽암각성대사도 본사 주지를 역임하시고 1660년(현종1년)에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그후로 전법초조인 도의국사의 뜻을 쫒아

선종대가람사로서 많은 고승 대덕이 배출된 곳이다.

 

일주문이 현재의 위치로부터 3km 남쪽밖인 나드리(무주, 진안방면 도로 입구)라는 곳에 서있던 것을 1814년(순조14년) 조계교가

있던 곳에 옮겼다가 1944년 해방되기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이 절은 본래 白蓮寺(백련사)라 불리워 800동의 당우와

600승려들이 살아 16방사가 즐비하여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다고 사료된다.

 

불조의 혜명을 받들어 1600년 한국불교를 새롭게 하고 열악한 전북불교를 회생시키고 민족과 역사속에 앞장서기 위해서는

선종대가람사 종남산 송광사의 새로운 조명과 절대적 중흥이 필요하다.


역대주요인물들

*도의선사*

속성 왕(王). 호 원적(元寂). 법호 명적(明寂). 784년(선덕왕 5) 중국 당(唐)나라에 유학, 광부(廣府)의 보단사(寶壇寺)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로 가서 지장(智藏)의 법맥을 이어받고 ‘도의’로 개명했다.
그 후 백장산(百丈山)의 회해(懷海)를 찾아가 법요(法要)을 배우고,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설법을 했으나, 당시 경교(經敎)만

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는 풍조를 보고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 길로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陣田寺)에 들어가

40년 동안 수도하여 제자 염거(廉居)에게 남선(南禪)을 전수하고 죽었다.

염거의 제자 체증은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에서 스승에게 전수받은 선(禪)을 펼치게 되었다. 도의선사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지며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는다.

 

*신라보조 체징스님*

수양산 백련사 창건 체징 [體澄, 804~880] 속성 김(金). 시호 보조(普照). 탑호 창성(彰聖). 웅진(熊津:公州) 출생.
어려서 출가하여 화산 권법사(花山勸法師)에게서 배웠다. 827년(흥덕왕 2)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설악산(雪嶽山) 억성사(億聖寺)의 염거(廉居) 밑에서 선(禪)을 닦았다. 837년(희강왕 2) 정육(貞育)·허회(虛會) 등과 당나라에 가서

수도하고 840년(문성왕 2) 귀국, 무주(武州:光州) 황학난야(黃壑蘭若)에 있었다.
그 후 헌안왕의 초청으로 경주(慶州)에 갔다가,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중수하고 선종(禪宗)을 폈다. 보림사 보조선사창

성탑(보물 157)과 김영(金穎)이 세운 탑비(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158)가 전라남도 장흥군 보림사 터에 남아 있다.

 

*고려보조 국사 지눌*

고려중기 승려로 속성은 정씨(鄭氏)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이다. 한국 선종(禪宗)의 중흥조(中興祖)인 지눌은 8세 때 종휘(宗暉)에

게 나아가 승려가 된 뒤로 당시의 종파대립적인 교육을 다양하고 모든 이에게서 배운다는 트인 자세로 정진하였다.

 

1182년(명종 12)승과에 급제하였고, 나주(羅州) 청량사(淸凉寺), 예천(醴泉) 보문사(普門寺) 등지에서 禪과 敎가 다르지 않음을

깨우쳤다. 90년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고 취지문을 선포하였다.

이 결사운동은 定 과 慧를 함께 닦아야 온전한 공부가 됨을 설파한 운동이였다. 이에 97년 왕족 · 관리 등과 승려 수백 명이 결사에

참가 하였다. 지눌은 다시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들어가 선정을 닦다가 홀연히 마음을 크게 열었다.

1205년(희종 1)에는 송광사(松廣寺)에서 120일 동안 큰법회를 열었고 그곳에 머무르면 강설 ·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1210년에 법상에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벽계스님*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법호는 벽계(碧溪)이다. 정심(淨心)이라고도 하며, 충청도 금산(錦山)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의 선승(禪僧)인 각운(覺雲)에게 교법을 배웠다. 이후 명나라로 유학하여 임제종(臨濟宗) 총통화상(摠統和尙)의 법인(法印)

을 전수받았다.
귀국하여 직지사(直指寺)에서 수도하였으나 연산군이 불교를 억압하자 황악산(黃岳山)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그때 찾아온 지엄(智嚴)을 제자로 삼아 선종(禪宗)의 법맥을 전승하였으며, 다시 법준(法俊)을 제자로 삼아 그에게 교종(敎宗)의

법맥을 전하였다.

 

*벽암 각성스님*

조선 중기 승려로 호는 벽암(碧巖), 속성은 김(金), 자는 징원(澄圓)이다. 보은(報恩) 출생 후 10세에 출가하여 화산(華山)의 중

설묵(雪默)에게 사사(師事), 1588년(선조 21) 승려가 되어 정(晶)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내전(內典)을 배웠다.


부휴(浮休)를 따라 속리산가야산·금강산 등에서 정진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부휴와 함께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612년(광해군 4)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이 되었고, 19년 경기도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에서 왕을 모시고 설법했다.
24년(인조 2)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승군(僧軍)을 독려하여 3년 만에 완공(完工)하였고

그 공으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호를 받았다.
32년(인조 10)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를 중수, 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승(義僧) 3000명을 규합,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강화가 성립되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40년(인조 18) 쌍계사(雙溪寺)로 옮겨 절을 중수하고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이 되어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으면서 사고(史庫)를 보호했다.

그 후 송광사(松廣寺)의 주지로 선교(禪敎)의 사석(司席)을 지내고, 41년(인조 19) 해인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보개산(寶蓋山)으로

가서 대법회(大法會)를 개최, 묘향산에 들어가 강도(講道)한 후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선교(禪敎) 양종(兩宗)과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고 초서(草書)·예서(隸書)에 능하였다.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구례 화엄사에 비가 있으며, 저서로는 《도중결의(圖中決疑, 1권)》 《간화결의(看話決疑, 1권)》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1권)》 등이 있다.

 

 

완주군 송광사 일주문 (松廣寺一株門)  :  전북유형문화재 제 4호   시대 =  조선시대

 종남산 기슭에 있는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지은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의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건물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용 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전체적인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단정하고 원숙한 비례감을 느끼게 하는 조선 중기의 일주문이다.

 

 

송광사금강문 (松廣寺金剛門)  :  전북유형문화재 제 173호    시대 = 조선시대

종남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보조 체징선사에 의해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14년(1622)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인조 14년(1636)까지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송광사 금강문은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으로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이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천장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이다. 앞면 3칸 중에 가운데칸이 출입구이고,

양 옆칸에는 금강역사와 사자 · 코끼리를 타고 있는 동자상 2구씩을 배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금강문은 새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익공양식의 공포와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어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이 건물은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처리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완주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完州 松廣寺 塑造四天王像)  :  보물 제 1255호    시대 =  조선시대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 · 서 · 남 · 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송광사의 동방 지국천왕상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이 쳐들어 칼을 잡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길게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끈을 왼쪽 옆구리에 걸쳤으며 바지를 입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지상에서 약간 들어올린 왼쪽다리를 악귀가 오른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악귀는 상투 장식에 눈이 심하게 튀어 나오고 주먹코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입체감을 나타낸다.

남방 증장천왕상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는데, 용은 입을 벌리고 천왕상의 얼굴을 향해 치솟고 있으며

꼬리는 팔뚝을 한번 휘감으며 올라가고 있다. 악귀는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데, 발등의 근육과 발톱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깃발은 뒤로 휘어졌다. 왼팔은 거의 어깨까지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 놓았다.

다리 아래의 악귀는 측면을 향하고 있는 다른 악귀에 비해 정면을 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 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사천왕상은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병자호란 이후 국난극복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이 지녀야 할 분노상, 용맹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남쪽 증장천왕<성난 눈> = 용과 여의주를 들고 계신다 : 만물을 소생시킨다.                                                     

서쪽 광목천왕<벌린 입> = 보탑과 삼지창을 들고 계신다 : 악한자에게 고통을 주어 불법에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사천왕 = 동쪽 지국천왕<다문 입> = 칼을들고 계신다. : 善한 사람 에게는  福을 주고 惡한사람 에게는 罪와 罰을 내린다.

              북쪽 다문천왕<치아가 보인다.> = 비파를 들고 계신다 :  어리석음에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인도하신다.

 

십자형 범종각= 팔작지붕과 다포로 되어 있는 법종각이고 지붕이 십자형으로 되어 있다.

완주 송광사 종루 (完州 松廣寺 鍾樓)  :  보물  제1244호    시대 = 조선시대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 · 승명 · 운정 · 덕림 · 득순·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종을 달아 놓은 종루는 십자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십자각은 열 십(十)자 모양을 하는 2층형 누각이다.

종이 걸려 있는 중앙칸을 중심으로 동 · 서 · 남 · 북에 각각 1칸씩 덧붙여 이루는 모양인데, 지붕 역시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북·운판은 돌출된 칸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마루 밑의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으며,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열 십(十)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송광사동종 (松廣寺銅鐘) : 전북 유형문화재 제 138호    시대 = 조선시대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종이다.

종을 메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 주는 음통이 있다.

종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殿牌)가 있고,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동종에 씌여있는 글을 통해 숙종 42년(1716)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뒤 영조 45년(1769)에 보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심정

 

송광사오백나한전목조석가여래삼존상및권속상일괄 (松廣寺五百羅漢殿木造釋泇如來三尊像및眷屬像一括)  :  전북유형문화재 제 169호

시대 =  조선시대

전라남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사(松廣寺)의 나한전에 모셔진 불상으로, 삼존상 3구, 16나한상, 500나한상, 제석상 1구, 동자상 2구,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등 모두 526구이다.

본존불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놓여 있는데, 얼굴은 원만한 편이며 양쪽 귀는 짧게 표현되어 있다.

정제된 얼굴 표현에서는 근엄함과 자비로움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두꺼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고, 왼쪽 어깨에서 내려진 옷주름은 왼쪽 팔에 걸쳐 무릎을 덮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얹어놓았고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이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 나한상, 인왕상, 동자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최근에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효종 7년(1656)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500나한상 중 일부는 후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새로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을 비롯하여 나한전 내의 불상들은 비교적 작품성이 뛰어난 귀중한 자료이다. 

 

*송광사 나한전 (松廣寺羅漢殿)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72호    시대 = 조선시대  

송광사 나한전은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이며,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현재 건물은 20세기 초를 전후로 고친 것이다.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또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천장 윗부분을 가리게 꾸민 우물천장이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인왕상·동자상·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 (完州 松廣寺 大雄殿)  :  보물 제 1243호    시대 = 조선시대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 · 승명 · 운정 · 덕림 · 득순 · 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대웅전 = 약사여래,  석가여래, 아미타불,  소조삼존불좌상 (전세, 현세, 내세의 상징 )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完州 松廣寺 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腹藏遺物)  : 보물1274호

시대 =  조선시대

신라 경문왕 7년(862) 도의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목조삼전패 (松廣寺木造三殿牌)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70호    시대 = 조선시대

대웅전 삼존불 사이 앞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3점의 패(牌)이다. 전체적인 만든 방법과 형태는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차이를 보인다.

그중 하나는 높이 2.28m로 앞면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 때 조성된 것이란 제작연대가 있다.

다른 2점은 높이가 2.08m로 같으며, 뒷면에 정조 16년(1792)에 수리하였음을 검은 글씨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보살의 명칭을 적은 다른 위패들과는 달리 왕, 왕비, 세자로 조성한 2m가 넘는 대작이다.

여러 장의 목판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구름과 용을 뚫어새긴 것이 특징이다.

조각이 정교하고 크기가 크며, 조성된 연대와 수리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대다수 연대를 알 수 없는 불교 목공예의 시기을 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신중전

 

관음전

 

 

 

밖에서 볼땐 금강문 안쪽에서 보면 천왕문이라 쓰여 있다.

 

문수보살

 

대세지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