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보배로 세가지를 들고 있다. 그래서 삼보(三寶)라고 한다. 그 세가지는 부처님(佛) 가르침(法)
승가(僧)이다. 불교인의 신앙은 바로 이 세가지 보배를 값지고 귀한 것으로 알고 그에 귀의해 가는 것이다.
한국 불교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 보배를 가리키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고 한다.
곧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전남 순천의 송광사이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
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송광사 일주문<조계문이라고도 부른다>
송광사 일주문은 편액을 가로로 달지 않고 창방과 평방의 중앙에 종서로 쓴 점이 다소 특이하다.
정면 중앙에 대승선종(大乘禪宗), 우측에 조계산(曹溪山), 좌측에 송광사(松廣寺)라고 나란히 3열로 썼으며,
뒷면에는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이라 적었다.
초입에서부터 선종사찰로서 송광사의 종풍과, 삼보사찰 중 승보종찰(僧寶宗刹)로서의 격을 살필 수 있다.
종고루<鍾鼓樓), 범종각>
종고루는 2층 맞배지붕의 누각이다. 원래 해탈문(解脫門)이 있던 자리에다 1961년에 종고루를 중건하였다.
누하식(樓下式) 구조로 1층 어칸의 통로를 따라 출입할 수 있으며,
2층은 사면이 트인 난간식의 누(樓) 형태로 내부에는 범종(梵鐘)ㆍ운판(雲板)ㆍ목어(木魚)ㆍ법고(法鼓) 등 불전사물(佛前四物)이 봉안되어 있어
조석예불 전에 불음(佛音)을 울리는 곳이기도 하다.
= 관음전 =
목조 관헤음보살상 =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는 해와 달의 단청 (하단부)
관음전의 관음보살은 나무를 깎아 제작한 높이 90㎝의 중형 불상이다.
머리 위에는 연꽃과 불꽃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 한가운데는 광배를 갖춘 화불을 봉안하였다.
보관의 양 옆으로 두 가닥씩의 띠자락이 수평으로 하늘거리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 보살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목조 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관음보살의 좌우에 단청된 태양과 달 은 각각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고 있다.
화려한 연화문의 소란반자와 화조도ㆍ산수화 등이 내부를 장엄하고 있으며, 특히 좌우 측벽에 그려진 조선후기 품계도(品階圖)는
일반사찰의 벽화와는 다른 송광사 관음전의 독특한 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관음전의 특징 : 관음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용궁을 상징한다. 모든 내부의 장식은 물속에 있는 물고기와 산호등으로 단청이 되어 있으며,
용들의 머리와 꼬리와 뒤엉켜 있는 형상이다.
또한 송광사의 불의 기운을 막기위해 관음전 처마밑에 빙 둘러서 海(해) 水(수) 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다.
또한 내부의 벽화는 왕을 호위하듯이 정일품에서 부터 관직에 있는 사신들이 허리를 숙이며 절을 하고 있다.
관음전은 1903년에 성수전(聖壽殿)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1955년에 관음전으로 바뀌었다.
설립 당시는 1902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사액(賜額)된 황실 기도처의 역할을 하였다.
건물 외관은 빗살로 단장된 4분합의 창호와 중앙 석축 앞 거북모양의 계단석이 특이하며, 3면의 건물 외벽에는 고종황제의 축수를 기원하듯
십장생(十長生)을 도안한 화려한 단청이 장엄되어 있다.
비사리 구시
대웅보전 한 쪽에 놓인 ‘비사리구시’는 쌀 일곱 가마에 해당하는 약 4천명분의 밥을 담아 저장할 수 있는 목조용기(木造容器)이다.
그 크기에서 보는 이들을 압도하고 있는데, 1724년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지자 이를 가져와 만든 것이다.
조선 영조 이후 절에서 국재(國齋)를 모실 때 사찰로 모여든 대중들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일종의 밥통이다.
『보조국사와 당나라의 담당국사가 나란히 꽂은 지팡이가 살아서 자란 것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쌍향수(雙香樹),
어느 순서로 포개어도 크기가 오묘하게 딱 들어맞는다는 바루 세트인 ‘능견난사(能見難思, 바루셋트)’와 함께
송광사의 이른바 ‘3대 명물’ 중 하나로 칭해지고 있다.』
승보전
지장전
대웅보전
송광사의 중심전각이자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자형(亞字形) 대웅보전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대웅전은 신라 때부터 있어왔으나 수차례의 소실과 중건을 거친 후 8차 중창시에 원형 그대로 중정 북쪽에 옮겨 짓고 승보전(僧寶殿)이라 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8년 대웅전 자리에 규모를 넓혀 신축하면서 그 명칭도 대웅보전이라 칭하게 되었다.
중앙에는 과거불인 연등불(燃燈佛), 현재불인 석가여래(釋迦如來),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의 삼세불(三世佛)을 주존으로 모셨으며,
문수ㆍ보현ㆍ관음ㆍ지장 등 4대 보살을 협시로 봉안하였다.
한붕화상
사자루 건물
= 우화각 =
지나 경내로 진입하는 홍교(虹橋) 위에 세워진 문루(門樓) 형식의 우화각은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과 조화를 이루는 18세기 초의 건물이다.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59호로, 능허교(凌虛橋)라 불리는 홍교와 함께 속세와 인연을 끊고 불국(佛國)으로 향하는
선승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누각명칭인 우화(羽化)는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신선이 된다는 뜻으로,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가(赤壁歌)'에 나오는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에서 딴 것이다.
따라서 몸을 가볍게 하고 마음을 비워 부처님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물소리ㆍ바람소리가 끊이지 않고 맑은 계곡에 비친 누각과 고목의 풍광이 빼어나, ‘우화청풍(羽化淸風)’이라 하여
송광사의 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송광사를 거쳐 간 시인ㆍ묵객들의 한시가 걸려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더욱 운치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사중(寺中) 기록에 의하면 1707년에서 1711년에 걸쳐 건립한 후 1774년에 중수한 것으로,
18세기의 누교(樓橋) 건축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우화각의 정경은 송광사를 소개하는 상징적 이미지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우화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제59호
아치형의 우화교 = 우화등선(羽化登仙).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된다는 뜻이다.
그 줄임말인 ‘우화(羽化)’란 이름이" 송광사 산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건너는 다리에 붙여져 있다.
우화교의 아치형 교각 사이로 송광사를 찾은 관광객들이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바라봤다.
사자루 뒷면
사자루는 전면 7칸, 측면 4칸의 중층 누각건물로서 일명 침계루(枕溪樓)라고도 한다.
1층 전면 툇간을 계류의 바위 위에 누주를 두어 건물을 받치도록 하였다. 누상(樓上)은 기둥 사이를 막아 폐쇄하였으며,
폐쇄된 벽체는 머름드린 판벽에 중앙 창얼굴을 만들고 널빤지로 문짝을 만들어 다는 바라지창을 가설하였다.
=찾아가는 길 = 기차여행
1) 용산역 출발<오전 6시 40분 KTX> = 익산역 하차<오전 8시 31분>, 환승 순천행으로 <08시 50분차 무궁화>= 순천역 하차
<10시 56분 도착>
순천역 앞에서<오전 11시 5분~10분정도차 이차를 놓치면 1시간은 기다려야 함> 시내버스 111번 송광사행 탑승 종점하차
2) 용산역 출발<오전 7시 20분 KTX> = 익산역 하차<오전 9시 11분>, 환승 순천행으로 <10시 8분차 무궁화>= 순천역 하차
<11시 58분 도착>
순천역 앞에서 시내버스 111번 송광사행 탑승 종점하차 ** 이시간대는 차오는 시간을 맞출수가 없음 고생하였음
** 용산역에서 우선 KTX 를 타고 익산까지 <2시간소요> 하차해서= 무궁화나 새마을로 환승 = 순천역 하차<2시간소요>
송광사까지 <1시간 30~40분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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