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 스님 / 1983년 1월 10일 전북신문
*청화(淸華) 스님 ;
1923~2003. 전남 무안 태생. 젊은 시절엔 고향에서 학교를 설립, 운영했으며 24세에 입산(入山)하여 35년 동안 지리산을 비롯한
두륜산, 월출산 등지의 암자에서 수도했다.
이 법문은 스님께서 실상산(實相山) 백장암(百丈庵)에 주석하실 때 전북신문 문치상(文致相) 문화부장과 나눈 대담 중 일부이다.
질문 ; 오늘은 주제를 ‘얼굴’ 이라 내걸고 ‘알되 앎을 실행하는 얼굴’ 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말씀 ; 저는 무외시(無畏施)의 얼굴 곧, 부처의 얼굴을 들고 싶습니다.
무외시란 중생들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평온한 행복을 안겨주며 자기 생명마저도 아낌없이 베푸는 보시 (布施)를 의미합니
다. 여러 가지 얼굴이 있지만 이러한 무외시가 넘쳐나는 부처의 얼굴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얼굴입니다.
현대 사회는 참으로 각박하고도 복잡한 산업 사회입니다. 고귀한 인간 정신이 거대한 기 계 문명에 압도되어 심각하게 소외되고
유린당하는 사례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 상황일수록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본질을 모른다는 것은 불안하기 그지없으며 말씀하신바, 바람직한 바른 얼굴로 살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유구한 인류 역사를 통해 인간성 문제는 꾸준히 탐구되어 왔으나, 불교에서 가장 철저하게 구명(究明)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갈파하듯이, 인간의 본질은 영원한 생명과 지혜와 자비 등 무한한 가능성을 원만히 갖춘 부처라고 파악할 때,
구겨져 있던 얼굴은 자연히 펴지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얼굴이란 불타의 대자대비한 얼굴이며 또한, 우리 인간 각자의 진정한 자아(自我)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질문 ; 그렇다면, 인간성의 구조를 앎으로써 바람직한 얼굴의 형성을 위한 원리 같은 것도 발견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말씀 ; 인간성의 구조에 관해서 불교에는 여러 각도의 교설이 있습니다만, 가장 간략하고 보편적인 것은 십법계설(十法界說)입니다.
인간의 현재 마음은 비록 옹졸하고 너절한 번뇌로 들끓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성의 저변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무시무종하고
무량무변 한 무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법계란 잔인하고 비뚤어진 마음인 ‘지옥’에서부터 점차 승화된 단계로, 배고픔 속에서 괴로움을 받는 귀신의 세계인 ‘아귀’ 그리고
동물의 세계인 ‘축생’, 다투기를 좋아하는 ‘아수라’, 사바세계의 ‘인간’, 안락하기만한 ‘천상’, 부처의 진리를 깨달은 ‘성문’, 인과법칙과
인연법을 터득한 ‘연각’, 중생과 더불어 불심을 깨닫는 ‘보살’, 끝으로 ‘부처’ 등 열 가지 세계를 말합니다.
모든 중생은 각각 열 가지 세계 가운데 어떤 한 세계가 위주가 되어 그에 상응한 몸을 받고 살아가고 있으나, 언제나 십법계의 가능성을
모두 마음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수행 여하에 따라서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최상의 부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일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지옥 같은 악독한 마음, 탐욕만 부리는 아귀 같은
마음, 바보처럼 어리석은 축생 같은 마음, 등은 될 수 있는 한 이를 억제하고 정화하고 제거해 가면서 우리 마음속에 공존해 있는 가장
건설적이고 긍정적이며 모든 지혜공덕을 원만히 갖춘, 영생하는 마음인 부처를 개발하고 빛내는 것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만덕(萬德)을 갖춘 불타의 원만한 얼굴을 가슴마다에 간직하고 애써 닮으려 노력할 때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험난한
모든 문제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광명무량한 안락정토가 이루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질문 ;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물질만 있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된다는 풍토마저 마련돼 있습니다.
물질우선주의, 배금주의 풍토가 극복될 이념이 나와야 할텐데요.
말씀 ; 우리 인간의 신체도 물질이요, 의식주가 다 물질이 아닌 것이 없는데 어느 뉘라서 물질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만,
그 소중한 물질의 본질이 다만 물질, 그것이 아니라 마음의 본질이기도 한, 아니 바로 마음뿐인 부처이며, 인간의 제한된 시야에
비치는 물질이란 다만 부처의 현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철학이 선행될 때 비로소 물질 우선주의에서 오는 불안과 갈등은 해소가 되고 동체대비의 진정한 윤리가 확립
될 것입니다.
불교에 일체유심조라 하여 모든 것은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하여 일체만유는 오직 식(識)뿐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다보면 결국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듯 과학자들은 모든 물질을 원자, 소립자(素粒子) 등으로
분석해 나가면서 물질의 근원은 텅 빈 허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텅 빈 것 같으면서도 신비한 광명이 충만해 있는 영원한 광명의 바다가 무한(無限) 전개돼 있는 것입니다.
신비한 광명이란 곧, 무한한 힘, 무한한 지혜, 무한한 자비 등 무한의 가능성을 지닌 부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부처의 성품에 대해 불교에서는 영생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상(常)이요, 완전무결한 행복이기 때문에 락(樂)이며,
일체의 것에 자유자재하기에 아(我)고, 번뇌가 없이 청정영롱하기에 정(淨)이라는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도 풀이를 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비단 인간의 본질만이 부처가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만유의 본질 또한 한결같이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비롯한 일체만유는 찬란하고 무량무변한 부처의 바다 위에 이루어진 파도나 거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의 이름을 달리하여 주인공, 본래면목, 실상, 실존, 도, 열반, 진여, 하나님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가장 궁극적이고
제일의적인 표현을 한다면 우주 그대로가 광명찬란한 부처의 일대행상(一大行相)이요, 청정미묘하고 한없이 큰 불가사의한
명주(明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물질의 근원을 바로 이해할 때 유물 극단주의는 물론, 유심 극단주의도 지양될 것입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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