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산사에 갇힐쏘냐…불상에 매일쏘냐 -대각사 용성 선사

백련암 2012. 7. 11. 15:24

△ 용성 선사가 창건하고 열반에 든 대각사. 선구적인 도심 사찰이었다.<서울 종로 대각사>

 

대각사 대각회 사적비

  

법당

 

△ 중국 사대주의를 벗어나 한국불교의 자존을 세우려 했던 용성 선사.

산사에 갇힐쏘냐…불상에 매일쏘냐


뒤늦은 한파에 싸인 22일 서울 종로구 봉익동 3 대각사. 출세간과 세속의 경계 없이 눈이 쏟아지고 있다.


대각(큰 깨달음)은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지 않는다. 1500여년 동안 이런 분단을 깨고, 산사에 갇힌 깨달음을 도심에서 꽃피우고자

한 곳이 바로 대각사다.


대각사를 창건한 용성(1864~1940) 선사는 세간에선 3·1운동 때 33인 민족 대표 가운데 한 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불교계에선 근대 선을 꽃피운 대선사로 손꼽힌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용성은 15살에 해인사 극락암에서 출가해 양주 보광사 도솔암, 선산 아도모례원, 청암 수도암, 지리산 칠불암, 송광사 삼일암 등에서 정진해 깨달음을 얻었다.


속세 절 지어 불교혁파 선구
사대근성 깨려 경전번역
우쭐대는 중국 고승에게
“해와 달이 누구의 것인가”
사자후 토하며 자존 세워
3·1운동때 33인 민족대표로


공부를 마친 44살의 그가 1907년 발길을 돌린 곳은 중국이었다. 그는 베이징 관음사 등에서 동안거를 보내며 법거량을 벌여 관음사

방장으로부터 대선지식으로 추앙을 받았다.

 

다음해 2월엔 통주 화엄사에 갔는데 한 선승이 그에게 “어디서 비구계를 받았느냐”며 “우리 중국의 계가 언제 조선에 들어갔는가?”라고

비꼬듯이 물었다.

유교적 관념으로 상하차별심을 내서 중화의 우월의식을 내보인 것이다. 그 때 마침 범종소리가 울렸다.

 

용성이 물었다.

 

“저 소리는 그대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이에 선승은 “그야 어찌 내 것, 그대의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러자 용성은 다시 물었다.

 

“하늘의 해와 달은 중국의 것인가, 조선의 것인가”

“어찌 해와 달이 중국 것이 있고, 조선 것이 있겠는가.”

 

이에 용성은 “그런데 어찌 불법도 그와 같음을 보지 못하는가. 불법이 어찌 어느 쪽에선 크고, 어느 쪽에선 작아지겠는가”고 일갈했다.

 

그리고 용성은

‘태양이 부상(신성한 나무)국을 비추니

강남의 바다와 산이 붉네

같으냐 다르냐는 묻지 마시게

영묘한 빛은 예와 이제에 통하네’라고 시를 지어 불렀다.


조선 500년의 중국 사대주의와 불교의 피폐, 기울어가는 조국 등은 ‘멸시’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개를 잃지 않아 중국에서도 ‘해동의 선지식’으로 추앙받은 그였다.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의 가야에서 온 공주 허왕옥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과 결혼했고, 여기서 탄생한 일곱 왕자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수행 정진해 모두 성불한 일화를 갖고 있다.

 

원효와 의천 등 수많은 이 땅의 고승들은 독특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그런데도 이를 도외시한 채 중국 사대주의만이 팽배했던

시절에 용성은 홀로 우짖는 사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불교의 대표종단조차 중국 육조대사가 머물던 뒷산 조계산을 본따 조계종이라고 이름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용성의 뜻을 따르는 대각회 이사로 동국대 총장을 지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이사장 지관 스님은 “원효 대사는 중국의 송고승전에서

원효의 신묘한 이적 등을 소개할 만큼 고승으로 추앙됐고,

 

대각국사 의천도 중국 불교를 배우러 간 것이 아니라 시찰을 갔음이 중국의 고승들로부터 받은 서신에서 잘 나타나 있다”면서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사대 근성을 버리지 못했지만 용성 선사는 중국의 고승들을 능히 제압할 (내적인) 힘이 있었고 자존을 지키는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한 차례 혹한은 더욱 진한 매화 향기를 얻기 위함이라고 했던가. 용성은 이미 도인이었지만 또 한차례

혹한이 그를 새롭게 변모케했다.

 

만해의 권유로 3·1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힘든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때 용성은 감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한글로 번역돼 누구나 볼 수 있는 성경과 찬송가를 읽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그는 출소 뒤 왜색화한 불교와 절연하기 위해 불상이 아닌 깨달음을 추구하는 대각교를 설립했고, ‘한자’속에 갇힌 불교의 혁파에

나섰다.

 

그러나 승려들은 “경전을 한글로 풀어 아무나 읽게 되면 스님을 존경치 않고 법사와 강사를 우습게 알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용성은 “본래 한문은 중국 문자이고 한글은 우리 문자인데 중국의 문자를 진서라고 하고 우리 글을 언문이라고 업신여기는 것은

돼먹지 아니한 사대주의의 발로”라며 불철주야 번역을 했다.

 

그리고 직접 찬불가를 작사하고 대각사에 풍금을 들여와 노래를 부르게 했다.

개화된 산중 노승의 혁신이 불상에 절하며 복을 비는 불교외엔 접근하기 어려웠던 깨달음을 일반 대중도 맛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이 나라 독립을 위해 만주 용정에 대각교당을 세워 독립운동가들의 뒤를 돌봤다.

훗날 일제의 밀정에 의해 이 사실이 드러나 대각교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해방 5년 전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입적했지만 그를 따르는 용성문중은 우리나라 불교계를 움직이는 최대 문파가 됐다.


그가 열반에 들었던 대각사에선 풍금소리에 맞춘 새싹들의 법향이 새어나온다.

추위가 매서울수록 그 향기는 더욱 진하고 그 기개는 더 곧은 매화 향기처럼.


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