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사 범일국사진영(靈隱寺梵日國師眞影) 시도유형문화재 제 140호 = <810년 ~ 889년>
범일국사의 속성(俗姓)은 김씨이며 이름은 품일(品日)이다. 할아버지는 명주도독을 지낸 술원(述元)이고,
어머니 文씨는 강릉의 유력한 가문출신이다.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흥덕왕 6년(83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선사의 제자인 제안(齊安)에게 "道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道" 라는 깨우침을 얻었다.
문서왕 6년(844년)에 귀국하여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루르다가 문성왕 13년(851년) 명주도독 김공의 청으로
굴산사 주지가 되며 40년 동안 제자를 양성 하였다.
이로서 범일은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동해 삼화사(三貨寺)와 강릉 신복사(神福寺)를
건립하고 양양 낙산사(洛山寺)를 중창하여 영동 지방에 선종을 보급하였다.
당시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그를 國師로 모시려 하였으나 모두 마다하고 지방 호족 세력과 결합하여 영동 지방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강릉 학사리에는 그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우물 석천(石泉)이 있다.
범일국사의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이며 탑호는 연휘(延徽)이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보현사를 창건한 낭원대사 개청(開淸. 835~930), 행적(行寂, 832~916년)등이 있다.
벽송당지엄영정(碧松堂智儼影幀)시도유형문화재 제316호=<벽송사 소재>
조선시대 중기에 벽암사를 중창한 벽암 지엄(1464∼1534) 스님의 초상화가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진영은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크기는 세로 134㎝, 가로 85㎝다.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왼손에는 끝에 술을 늘어뜨린 불자(拂子)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편안하게 의자의 팔걸이에 얹었다.
이 그림은 1617년(광해군 9) 왕명에 따라 인오(印悟, 1548∼1623) 스님이 그렸던 다섯 분의 대사의 초상화 중 하나로,
다섯 분의 대사는 벽계 정심(碧溪正心), 벽송 지엄, 부용 영관, 청허 휴정, 부휴 선수, 홍각 등계 등이다.
그림에 있는 기록은 잘 보이지 않지만, 화폭의 윗부분에 있는 휴정 대사의 시는 잘 보존되어 있다.
보조 지눌국사= 동화사보조국사진영(桐華寺普照國師眞影)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
◈생애
지눌(知訥: 1158~1210)은 고려의 승려이다. 속성이 정(鄭)이고, 자호가 목우자(牧牛子)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이며, 동주(洞州: 단흥) 출생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도의(道義: 821)국사를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여기며,
보조국사 지눌을 조계종의 중천조(中闡祖: 분명하게 밝힌 조사)로 여기며, 태고국사 보우(普愚: 1301~1382)를 중흥조(中興祖: 중흥시
킨 조사)로 여긴다.
1158 정광우(鄭光遇)와 부인 조(趙)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에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어 구계(具戒)를 받고 일정한 스승 없이
道를 구하였다. 1182년(명종 12년)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많은 선배를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창평의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을 읽다가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 속세를 피하고 도를 구하기 위하여, 1185년 하가산의 보문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대장경》을 열독하는 등 불도에 전력하며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득재(得才)의 청으로 팔공산 거조사(居組寺)에서 여러 고승을 맞아 몇 해 동안 정혜(定慧)를 익히다가 신종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참선하여 선의 참뜻을 깨달았다.
1200년 송광산 길상사에서 11년 동안 제자들에게 설법을 전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금강경》, 《육조단경》, 《화엄론》, 《대혜록》 등으로 가르치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 경절문(經截門)의 3종으로 수행을 이끌
었는데, 믿음에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 억보산의 백운정사 · 적취암과 서석산의 주봉란야 · 조월암 등은 다 지눌이 창건하고 왕래하며
수선(修禪)하였다.
희종이 즉위하여 송광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라 개명하여 제방(題榜)을 친히 써서 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보내왔다.
그는 중생을 떠나 부처가 따로 없음을 강조하여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였다. 승도를 소집하여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사망하니 탑을 세우고 감로라 하였다. 죽은 후 국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진심직설》·《수심결》·《정혜결사문》·《상당록》·《염불요문》·《원돈성불론》 등이 있다.
왕이 문신 김군수(金君綬)에게 비문을 찬수케 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병화에 없어지고 귀부(龜趺)만 남은 것을 1678년(조선 숙종 4년)
에 백암(栢菴) · 성총(惺聰) 등이 중건하였다.
◈사상
지눌은 1182년 선과(禪科)에 합격하고 청원사(淸願寺)에 이르러 혜능(慧能)의 《6조단경(六祖壇經)》에서 홀연히 깨치고, 이통현(李通玄) 거사의 《화엄론(華嚴論)》에서 선 · 교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대혜(大慧) 선사의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 최후의 의혹을
씻었다 한다. 이러한 깨침의 과정은 그의 독창적인 禪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지눌은 사람을 대할 때 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②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③ 경절문(經截門)의 3문으로 하였는데, 이 3문은 각각
자신의 깨침의 계기가 된 《6조단경》·《화엄론》·《대혜어록》에서 나온 것이다.
지눌은 禪 · 敎의 배타성이 교리적으로 있을 수 없음을 논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강조하였는데,
돈오는 중생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여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문득 깨치는 것이고, 점수는 그렇게 깨쳤다 하더라도 번뇌는 쉽게
없어지지 않으므로 "정"과 "혜"를 꾸준히 닦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지눌이 주장한 성적등지문 · 원돈신해문 · 경절문의 3문 중에
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은 돈오점수의 돈오(頓悟)와 그 내용이 같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은 점수(漸修)와 그 내용이 같다.
그러나 이러한 돈오점수는 학문적인 해석("지해 · 知解")의 자취를 아직 가시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선의 화두를
공부하라는 것이 경절문(經截門)이다.
지눌의 이러한 선사상의 체계는 조계(曹溪) 혜능의 선 속에 화엄을 흡수한 것이었다. 지눌의 조계선(曹溪禪)이 이와 같이 독창적이었던
반면, 지눌 이전의 한국 선은 단지 중국 선의 연장에 불과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지눌의 정혜결사는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에 터를 잡고(고려 신종 3년), 끝까지 왕실불교에 오염되지 않는 조계선을 선양하는
거점이 되었는데, 왕족 · 귀족으로서 여기에 가입하는 자만도 수백인에 달했다 한다.
의천(義天: 1055~1101)의 천태 사상이 교로써 선을 융합하려는 것이었다면, 지눌의 조계종지(宗旨)는 선으로써 교를 융합하려는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명당 = 사명당영정(泗溟堂影幀)시도유형문화재 제450-2호
조선 말기의 승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법명은 유정(惟政)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위 위계를 받았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하는 공을 세웠다.
사명대사는(1544년~1610년)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호는 四溟堂, 송운(松雲)입니다. 속성은 任씨며, 속명은 응규(應奎),
법명은 유정(惟政)입니다. 대사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고 부모가 죽자 명종(1559년)때 직지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 후 묘향산 보현사에 있던 서산대사 휴정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아 의승도대장이 되어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또한 네차례나 왜군 진영에 들어가 후전협상을 벌이며 왜군이 제시한 휴전 내용의 모순과 죄악을
낱낱이 들추기도하였다. 현재의 우리가 재워야 할 점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선조 37년(1604년)에 다시 일본에 건너가
3,500명의 조선인 포로를 귀국시키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사명당은 신통력에 대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사명당 사첫방 = 매우 추운 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일본에 갔다가 붙잡혀 쇠로 만든 방에 같히고 불로 달구는 고문을 받았으나
오히려 얼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해한다.
사명당이 월참하겠다.
추위에 잘 견디는 사명조차 쉬어 가지 않고 그냥 지나칠 정도라는 뜻으로 방이 몹시 추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우운당 진희영정(友雲堂眞熙影幀) 시도유형문화재 제450-4호
이 영정은 좌안7분면의 전신교의가부좌상으로, 팔걸이가 부착된 의자에 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양손에 각각 염주와 주장자를 들고 있다.
전신교의 가부좌상은 교의좌상에서 바닥가부좌상으로 변모하는 중간과정으로 파악되는데 특히 이 영정은 화면에
의자의 다리가 잘린 채 표현되는 독특한 형식을 보여준다. 화면 향우측에는 주지백서의
‘선교양종우운당대선사지진(禪敎兩宗友雲堂大禪師之眞)’ 화제가, 향좌측에는 역시 주지백서의 영찬이 기록되어 있다. .
범어사 의상대사영정(梵魚寺義湘大師影幀)시도유형문화재 제55호
◎통일신라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하며 화엄종을 개창한 승려.
의상대사는 신라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나 702년(성덕왕 1)에 입적하였다. <625년 ~ 702년>
성은 김씨이며,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서 계림부(鷄林府) 사람이다.
의상대사 는 19세 때 황복사에서 출가하였으며, 출가한 지 얼마 안 되어 원효(元曉)와 함께 중국으로 가던 중 요동(遼東)에서
고구려 군에게 붙잡혀 정탐자로 오인받고 수십 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661년(문무왕 1) 당(唐)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의상대사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이후 의상대사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을 찾아갔다. 지엄은 전날 밤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까지 이르렀고, 그 위에 봉(鳳)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대사를 특별한 예로 맞으며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후일 중국 화엄종조(華嚴宗祖)가 되었던 현수법장(賢首法藏)과 함께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여 『화엄경』의
법계원융(法界圓融)의 묘지(妙旨)를 전수받았다.
670년(문무왕 10)에 환국하였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한다. 즉, 당 고종의 계획을 김인문(金仁問)이 알아 의상대사에게 알려주자
서둘러 귀국해 문무왕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한편 『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그 해에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 즈음 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고 관리에게 명령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대사는 “왕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비록 풀 언덕 땅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오나,
정교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더라도 재해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고 문무왕은 역사(役事)를 중지하기도 하였다.
676년(문무왕 16)에 문무왕의 명으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일승화엄종(一乘華嚴宗)을 개창(開倉)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많은 화엄종장(華嚴宗匠)을 배출하였는데, 3천 명의 제자가 있었다.
특히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 진정·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은
화엄대덕(華嚴大德)으로 알려졌다.
674년(문무왕 14)에 의상대사는 경주의 황복사에서 표훈(表訓)· 진정(眞定) 등의 제자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가 이룩되기 전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의상대사가 제자들에게 화엄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 이 소문이 전국에 퍼졌고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문무왕이 이에 장전(莊田)과 노복(奴僕)을 베풀어준 일이 있었다.
의상대사의 화엄 사상은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이다. 의상대사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 사상이 전래되어 있었지만, 화엄 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대사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의상대사가 남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라로 돌아온 그 해 낙산사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의상대사의 관음신앙(觀音信仰)을 알게 하여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 도선율사(道宣律師)와도 교유하였다.
특히 당시의 동문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신라로 돌아온 뒤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현수는 의상대사에게 자신의 저술과
서신을 보냈고, 의상대사는 현수에게 금(金)을 선물하였다.
현수는 의상대사 보다 19세 연하였는데, 지엄이 죽은 뒤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된 인물이다.
자장율사진영(慈藏律師眞影)시도유형문화재 제276호 /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아버지 김무림(金茂林)은 진골(眞骨)로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높은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늦게까지 자식이 없었다. 이에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만일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축원하면서 천수관음(千手觀音)을 조성하여 자식 낳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내가 문득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하였다. 그가 태어난 날이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 8일이란 것만 알 뿐, 정확한 출생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선종랑(善宗郞), 즉 자장은 천품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풍부해지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읜 그는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처자를 버리고 전원(田園)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만들었다.
그 후 그는 홀로 깊고 험한 산골짜기를 찾아들어 맹수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고골관이란 앙상하게 뼈만 남기고 썩어 버리는 시체의 모습을 생각함으로써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진리를 터득하고자
하는 수행 방법이다.
간혹 권태롭고 피곤할 때가 없지도 않았으나 그는 조그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가시를 둘러쳐 놓고 앉아 수행을 하였으며,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조금이라도 수행 중 졸거나 하면 머리카락이 당겨져서 바로 깰 수 있도록 하여
정신이 잠시도 혼미함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자장이 이와 같이 피나는 정진을 계속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재상 자리가 비어 그를 불렀다.
문벌로 보아 자장이 그 자리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장은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왕은 마침내 바로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자장은 칙명을 듣고 나서,
“내가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결국 그의 출가를 허락하였다. 이에 자장은 산속 깊이 숨어 들었다. 한 톨의 양식도 없었다.
그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자장에게 공양하였다. 자장이 그것을 먹고는 깜빡 잠이 들었는데,
천인(天人)이 와서 그에게 오계(五戒)를 주는 꿈을 너무도 선명하게 꾸게 되었다. 그제야 자장은 깊은 산골짜기로부터 나왔다.
그러자 각처의 남녀들이 그에게로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럴수록 그는 당나라로 가서 보다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구도심(求道心)에 사로잡혔다.
636년(선덕왕 5) 마침내 자장은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 명과 함게 칙령(勅令)을 받아 당나라로 떠났다.
당나라로 들어간 자장은 먼저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성지(聖地) 청량산(淸涼山)으로 갔다. 그러고는 문수보살의 소상(塑像) 앞에
엎드려 감응(感應)을 기도한 뒤 문수보살의 현신(現身)으로부터 감응을 받고 당나라 서울 장안(長安)으로 향했다.
당나라 태종은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물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으로 불편을 없게 해 주었다.
그가 승광별원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그를 찾아온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던 중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빠른 시간에 널리 퍼지게 되면서 자장을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일 수천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장은 이렇게 번거로운 생활이나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나날을 보내기보다는 더 많은 곳을 편력하며 수행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였다.
자장은 태종에게 글을 올리고 승광별원을 떠나, 장안의 남쪽 50리쯤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동쪽 산록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 종남산에는 많은 절이 있었다.
특히 지상사(至相寺)에는 중국 화엄종의 초조(初祖) 두순(杜順)[557~640]이 있었고, 풍덕사(豐德寺)에는 훗날 남산종(南山宗)이란
계율종(戒律宗)의 한 종파를 열게 되는 도선율사(道宣律師)가 있었다.
643년(선덕왕 12) 신라에서 왕이 태종에게 글을 보내어 자장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신라 조정의 이 같은 동기는 당시 통일 전야의 어려운 국내 사정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덕왕 7년에는 고구려의 군사가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왔고,
9년에는 당시 신라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원광법사(圓光法師)가 타계하였다.
특히 11년 7월에 백제에게 40여 성을 빼앗기고 다음 달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연합군에게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겼으며,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을 함락당하는 등 신라로서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장은 이때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태종에게 말하여 『대장경(大藏經)』 한 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갖추어 귀국하였다. 신라를 떠난 지 7년 만의 귀국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고창의 문수사를 지나다가 산세와 수세가 중국의 청량산과 너무도 흡사하여 기이하게 여겨
문수산 기슭의 암굴을 찾아 7일 기도를 올렸는데, 그때 문수보살이 땅 속에서 솟아나는 꿈을 꾸게 되어 그 곳을 파 보니
화강석의 장대한 문수보살 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산190-1번지에 절을 세우고 문수사라 이름 하고,
취령산을 문수산 혹은 청량산으로 불렀다.
귀국 후 자장의 활동은 호국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의 활동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국민 교화와
불교 교단의 기강 확립이었다. 특히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러 있게 하고 대국통(大國統)의 높은 벼슬을 내리는 등
대우를 두터이 하였다. 이때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게 된 동기는 불력(佛力)에 의해 나라를 지킨다는 소박한 신앙심만이 아니라,
신라의 서울 경주에 거대한 탑을 세움으로써 왕실의 권위와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한 현실적인 필요성에 그 비중이 더 많았다.
그는 어느 해 여름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기도 하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 불교계는 기강이 세워져 있지 못했다. 조정에서 자장에게 대국통이라는 상직(常職)이 아닌
높은 직위를 주었던 것은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려들을 관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대국통이 된 자장은 전국의 모든 승려들에게 불경을 공부하게 하여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한 달에 여러 번 계를 설하게 하며, 전국에 순검사(巡檢使)를 파견하여 지방 사찰을 일일이 살펴
승려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 등을 정중히 모시도록 하는 등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전력하였다.
자장은 만년에 서울 경주를 떠나 강릉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거기에 거처하기도 하고,
오대산에 월정사(月精寺)를 세우기도 하였다.
청허당영정(靑虛堂影幀) 휴정 서산대사 시도유형문화재 제450-1호
1520(중종 15)~1604(선조 37). 조선 중기의 승려·승병장.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휴정은 법명이다.
아버지는 향관(鄕官)을 지낸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마저 죽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로 옮겼다.
12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힌 다음 15세 때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했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청학동(靑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유람하다가 숭인장로(崇仁長老)의 권유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전등록 傳燈錄〉·〈염송 拈頌〉·〈화엄경〉·〈능엄경 楞嚴經〉·〈반야경〉·〈원각경 圓覺經〉 등의
교리를 탐구하다가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머리를 깎았으며, 1540년(중종 35)에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1549년(명종 4) 승과에 합격했으며,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금강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선조의 직접 신문에 의해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
되었다. 이때 선조와 휴정이 주고받은 시가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부탁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호소했다.
자신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했으며,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
으로 돌아갔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나가 호위한 후 승군장의 직에서 물러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렸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당시 불교는 조선왕조의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박탈당했으며, 사림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국가제도권에서 탈락하여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휴정은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하고 이에 대처했다. 그는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했다.
교학에 대해서는 禪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만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교입선(捨敎入禪)적 입장에서 그는 종래
선종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중시해온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했다.
또 휴정은 염불을 인정했는데, 이때의 염불은 사후에 서방극락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아미타불
을 찾는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차원이었다. 즉 염불도 선 수행의 일종이었다.
실천으로서 그가 인정한 경전공부와 선 수행 및 염불은 조선 후기에 불교교단의 공통된 수행방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유(儒)· 불(佛)· 도(道)의 3교는 명칭만 다를 뿐 그 가르침의 근본은 같다는 3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에 대비되는 불교의 법통관을 새로 제시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 편양언기(鞭羊彦機)· 소요태능(逍遙太能)· 정관일선(靜觀一禪)
의 4대 제자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 淸虛堂集〉을 비롯하여 〈선교석 禪敎釋〉·〈선교결 禪敎訣〉·〈심법요초 心法要抄〉·〈삼가귀감 三家龜鑑〉·〈설선의 說禪儀〉·〈운수단 雲水壇〉 등이 있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탑이 세워졌으며,
해남 표충사(表忠祠)와 밀양 표충사 및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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