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역대 큰 스님들 = 대 선사 이야기(3)

백련암 2012. 7. 25. 15:03

청화큰스님(1924년 2월 14일 ~ 2003년 11월 12일)

 

무주당 청화(無住堂 淸華) 큰스님은 1947년 24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셔서 이후 50여년 동안 사성암, 벽송사, 백장암, 상원암,

남미륵암,  칠장사등에서 수행, 정진하셨습니다.

1985년 전남 곡성군 동리안 태안사에서 3년 결사를 시작으로 회상을 이뤄 대중교화의 인연을 지으시고 1995년까지 태안사를 중창 복원하여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을 재건하셨다.

 

미주표교를 위해 카멜 삼보사, 팜스프링스 금강선원 등을 건립하여 3년결사를 성만하시고 조계종 원로위원, 성륜사 조실을 지내셨습니다.

2002년 5월 도봉산 광륜사를 개원하시고 2003년 세납 81세 법랍 56세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기본적인 출가수행자의 계율이 오후불식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밤에 취침할 때까지 눕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다 묵언하면서 하루 한끼니만 먹는 일종식

으로 일체 눕지않고 참선하며 앉아서 잠을 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40여년 지켜온 선승 청화스님(곡성 성륜사 조실).

보통사람의 눈에는 고행으로 보이는 그 생활이 편해서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라는 스님은 이제는 몸뚱이도 쇠약해지고, 앉으나 서나 공부에 망상도

별로 나올 때가 아니고 해서 원칙은 세워놓고 있으나 고집하지는 않고있다고 한다.

 

경허대선사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는 조선 말기의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 하여 무애자재로운 생활속에서 전등傳燈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禪佛敎를 진작시킨 혁명가이자 대승 大乘의 실천자였다.

 

경허(鏡虛, 1849년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다는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났고, 9세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 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속가의 이름은 송동욱(東旭)이고, 아버지는 송두옥(斗玉)이다.

 법호경허(鏡虛), 법명성우(惺牛)이다.

1879년 11월15일,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진사인, 이처사(李處士)의 한 마디,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이 한마디를 전해듣고는,

바로 깨달아 부처 되었다. 1대 조사인 인도의 마하가섭존자 이래 75대 조사이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받들던 사미승 원규는 경허의 사제인 학명의 제자였고, 이처사는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ㆍ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어느날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문자공부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오로지 영운 靈雲선사의 "나귀 일 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無)이

   무슨 말인가?" 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茶의 대가 초의선사

 

초의선사(1786-1866년)는 조선 후기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키고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 차와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인물.
다산 정약용에게 다도를 가르쳤고 평생 친구인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으며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 토산차를 예찬.
초의선사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다선일미 사상은 차 안에 부처님의 진리와 명상의 기쁨이 녹아있다는 것.
전남 무안군은 최근 초의선사의 탄생지인 삼향면 왕산리에 초의선원을 개관.

 

의순(意恂: 1786~1866)은 조선 후기의 승려이다. 호는 초의(草衣), 성은 장(張, 무안 장씨), 자는 중부(中孚)이다.

15세에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서 승려가 되어 금담(金潭)에게서 선(禪)을 닦고, 윤우(倫佑)의 법을 이어받았다.

산스크리트어 및 신상(神像: 신령의 화상이나 초상)에 능했고, 정약용에게서 유학과 시문(詩文)을 배웠다.

신위(申緯) · 김정희(金正喜) 등과 사귀면서 해남의 두륜산(頭輪山)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년간 지관(止觀)을 닦았다.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화엄경》을 새길 때 증사(證師)가 되었고, 달마산(達摩山) 무량회(無量會)가 창립되자 강석(講席)을 주재하였다.

의순은 자신의 저서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통해 긍선(亘璇)의 《선문수경》의 주장을 반박하여, 여래선 이외에 의리선이 따로 있을 수 없으니

두 가지 선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일타(日陀)스님 : (1929년 9월 2일 ~ 1999년 11월 29일(음,10월 22일))미국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입적.

 

일타스님은 1929년 9월 2일, 충남 공주군 우성면 동대리 182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성명은 : 김 사의(金 思義)    법명 : 일타(日陀)   법호 : 동곡(東谷), 삼여자(三餘子)

1942년 양산통도사에서 윤고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43년 4월 15일  통도사에서 김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47년 7월 이후 송광사를 비롯해 전국

 선원에서 동. 하안거 성만 1949년 3월 14일 범어사에서 하동산스님을 계사로 보살계 수지 범어사에서 김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1949년6월 통도사 강원 대교과 졸업 1955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7일간 3천배 후 연지연향 발원 1962년 2월 대덕법계 품수 1962년 2월 대한불교 조계종 비상 종회의원 역임

1962년 12월 대한 불교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의원 이후 2~3대 중앙종회의원 역임 1965년 4월 제 12교구 해인사 해인총림 율주역임 1984년 12월 제 12교구 본사 해인사 주지역임 1991년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 제 12교구 본사 해인총림 전당 수좌 1993년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 단일계단 전계대화상 역임 1993년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원로회의 의원 1964년 6월 제 10교구본사 은해사 주지 역임 1996년 5월 제 10교구본사 은해사 조실  1999년 11월 29일 미국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입적

 

▣불교와 나의 인연

대부분의 스님들은 나름대로 출가 동기가 있지만, 나는 특별한 출가의 동기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있다면 전생에나 있었을까?
금생에는 전생의 인연을 따라 자연스럽게 중이 된 것으로 나는 믿고 있습니다.

내 나이 5살 때, 우리 마을로 천수경(千手經)을 외우며 동냥을 하는 스님이 찾아 왔습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그런데 어린 마음에 그 스님의 천수경 외우는 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았던지 하루 종일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스님은 나를 기특하게 여겨 엿을 듬뿍 사주었는데, 그 엿을 주머니 여기저기에 넣고 우두둑 씹으면서 죽자고 따라다니며 ″원왕생(願往生) 원왕생‥‥‥‥″을 외웠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날 밤 나는 잠을 자면서도 천수경을 외웠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 외웠는지도 모르게 천수경을 다 외웠고, 그 외에도 몇 가지 경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우고 있었습니다.

국민학교를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누구든지 교단 앞으로 나와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 앞으로 나가 춤을 추면서 천수다라니를 외웠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내가 춤을 추면서 이상한 말을 하자 선생님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배꼽이 떨어져라 웃었고, 그 때 이후 내 별명은 ″중″이 되었습니다.

그 후 집안의 친가 ·외가 식구 49명 모두가 차례로 출가하였고, 나도 국민학교를 마친 14살 때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통도사에 계시는 고경(古鏡) 스님을

뵙고 출가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출가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생출몰(死生出沒) 나고 죽음은,                          월전공중(月轉空中) 달의 공전과 같네,      

동곡일타(東谷日陀) 동쪽 계곡에 해 저물면,           서안월명(西岸月明) 서쪽 해안에 달 밝으리.

 

한암스님(1876년 ~ 1951년 3월 21일(음력 2월 14일))

 

주인공이 한암(漢岩) 중원(1876~1951.사진)스님. 해방 이후 조계종을 창종했으며 초대 종정을 지내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존경받고 있는 한암의

생가가 복원된다.

1925년 봉은사 조실로 계실 때 조선총독부에서 협조를 요청하자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익히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에 은둔, 입적하실 때까지 27년간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6.25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ㅇ르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1.4후퇴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만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受)하고 법당에 들어가 정좌한 뒤  "나는 부처님의 제요, 당신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명령에 복종하듯이 절을 지키는 것도 나의 도리이다.

중이 죽으면 어차피 화장을 해야 하는 것 이제 불을 지르시오." 했다. 스님의 법력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뜬어내 불을 지르고 떠났다.

 

입적하기 15일 전부터 사바세계의 연(緣)이 다함을 알고 물외에는 먹지 않았다.  1951년 3월 21일 아침, 스님은 죽 한그릇과 차 한잔을 마시고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이때 나이 세수 75세 법랍 54세이다.

 

한암스님이 어느날 길을 가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내렸다.    쉴 곳이 없어 주막에 들렀는데 한 여인이 혼자 지내고 있었다. 
  

   한암스님을 모시는 시자가 하룻밤만 유숙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끝끝내 허락을 해주지 않고

   오히려 여인은 한암스님께 관상을 좀 봐 달라는 것이었다. 

   시자는 한암스님은 그런분이 아니라 하며 간신히 청을 물리친 후 한암스님과 함께 여인이 일러준 집을 찾아가  하루를 유숙하게 되었다. 

   다음날, 한암스님은 다시 주막에 들렀다.  여인의 일방적인 간청을 묵과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쉴수 있는 집을 일러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표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여인에게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다.

   여인에게 관상을 보아 주겠다고 하니 여인은 얼굴을 씻고 화장을 하고 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암스님은 "화장을 하고 오면 상이 삼천리나 멀리 도망가니 그대로 있으시오."라고 한 뒤 질문을 시작했다. 

   "손과 발 중에 어느 것이 예뻐야 하겠소"   "그야 물론 손이 예뻐야겠지요."
   "그러면 손과 얼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예뻐야 하겠오."   "그야 물론 얼굴입지요."
   "그러면 얼굴은 예쁜데 마음이 예쁘지 못한 것과 설사 얼굴이 밉다해도 마음이 예쁜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낫겠오."
   "그야 얼굴만 예쁘고 마음이 못되면 안될 일이지요.    마음이 예뻐야 겠지요."

   "그렇소. 족상(足相)이 수상만 못하고(不如手相),    수상이 관상만 못하며(不如觀相),    관상이 심상만 못한 것이오(不如心相). 

   그러니 마음을 잘쓰도록 하시오.   그러면 복을 받고 앞길이 훤히 열릴 것이오."

 

 

혜암큰스님(慧菴玄門, 1886년~1985년)

 

혜암현무(慧菴玄門, 1886년~1985년)스님은 조선말기 대선지식인 경허(鏡虛). 만공(滿空)선사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선풍을 계승한 선사이다.

1896년 부친상을 당하자 이듬해 출가하여 양주 수락산 흥국사에서 삭발 출가하였으며, 1900년 보암(保庵)을 은사로 금운(錦雲)을 계사로 득도하였다.

1911년 해담(海曇)화상으로 구족계를 받았고, 1913년 성월(性月)선사로 부터 화두를 간택받았다. 그 뒤 만공. 혜월(慧月). 용성(龍城)선사를 차례로 모시고

6년 동안 용맹정진하여 도를 깨닫고 오도송을 지었다.

오도송  :   어동정 한 마디 글귀를(語默動靜句),  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箇中誰敢着), 내게 동정을 여의고 한 마디 이르라면(問我動靜離),

                곧 깨진 그릇을 서로 맞추지 못한다 하리라(破器不相從).

 

선사는 그 뒤 묘향산 상원사 주지와 정선 정암사 주지를 역임하였고, 1929년 수덕사 조실 만공선사로 부터 깨달음을 인정받아 전법계(傳法偈)를 받고

법통을 이어 받았다.

만공스님의 전법계  :  구름과 산은 다름 없으나(雲山無同別), 또한 대 가풍도 없다(亦無大家風), 글자 없는 도장을(如是無文印),

                                 그대 혜암에게 주노라(分付慧菴汝)

 

그 뒤 전국의 주요 사찰을 순례하면서 보임(保任: 깨달음을 보호하고 지켜가는 無爲의 수행)공부를 하는 한편,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어 덕숭산에

머무르면서 3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또, 1984년에는 100세의 고령으로 미국 서부의 능인선원 봉불식(奉佛式)에참여하여 우리나라의

선(禪)을 미국에 전파하고 귀국하였으며, 1984년말에 설립된 덕숭총림(德崇叢林) 제 1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다.

선사는 마지막까지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즐기다가 1985년 삼월 삼짇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이 육신을 간단히 화장하여 사방에 흩어

버릴지언정, 결코 사리(舍利)를 수습하거나 부도(浮屠)를 세우지 말라, 만약 탑이나 부도를  세우면 나는 세세생생 지옥고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유훈을 남기고 나이 101세, 법랍 89세로 입적하였다. 

 

혜월 혜명스님(1862년 6월 19일~

 

혜월당(慧月堂) 혜명(慧明)선사의 고향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다. 1862년 6월 19일 생으로써 이때가 철종 13년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신(申) 씨다.

그의 나이 열두 살이 되던 1873년 고종 10년에 덕숭산의 정혜사(定慧寺)로 동진출가하였는데, 집에 있다가는 목숨을 연명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다는 것이

출가 동기였다. 은사인 혜안(慧安)스님이 친척 간이었다. 친척에게 의탁시켜 자식을 절에 맡긴 것이므로 부모들이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3년 동안의 행자기간을 거쳐 열다섯 살이 되던 1876년 비로소 사미계와 더불어 혜명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로부터 정혜사에서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관음

(觀音) 정진에 몰두하였다. 까막눈이었으므로 염불과 주력이외의 수행 방법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 해 은사가 속퇴하면서 제자 혜명을 연암산 천장암

에서 선풍(禪風)을 날리기 시작한 경허선사에게 보낸다. 이로써 혜명수좌와 당대의 최고 선지식이었던 경허선사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천장암에서 살게 된 혜명을 위해 경허선사는 우선 글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왔다. 스물세 살이 되던 1884년부터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

의 『수심결(修心訣)』을 가르쳤다. 이때 혜명수좌는 『수심결』 서두에 인용되어있는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개조인 임제(臨濟) 의현(義玄)의 법어인

"네 눈앞에 항상 뚜렷하여, 홀로 밝고 형상없는 그것이라야, 비로소 법을 말하고 법을 듣느니라." 하는 대목에서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 라는 큰 의문을 갖게

된다.

 

기이한 입적은 법은사 혜월(慧月)스님이 세인들에게 보여준바 있다.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며 대중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했던 혜월스님은 언제나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논밭을 일구고, 짚신을 삼는 등 일상에서 무심(無心)의 경지에 있었다. 노년에 혜월스님은 매일 산에 올라 솔방울을 주워 큰 자루에 담아 내려왔

다. 입적에 드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여느날 처럼 솔방울을 주워 내려오다, 항상 쉬는 자리에서 자루를 지고 반쯤 일어난 자세로 열반에 들었으니,

희유(稀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자 운봉(雲峰)을 통해 남긴 임종게다.

付雲峰性粹(부운봉성수),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世尊應化(세존응화)           二九五一年(2951년) 四月(사월),        鏡虛門人(경허문인) 慧月(혜월) 설(說)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변하는 법은  본래 진실한 실체가 없네   그 모습을 보고 무상한 뜻을 알면   그것을 일러 견성이라 하네

세존응화  2951년 4월  경허문인 혜월 설함

무주상 보시의 자비도인이요, 무소유의 무심도인(無心道人)이며, 천진무구했던 천진불(天眞佛) 혜월스님의 법맥은 운봉스님을 통해

향곡과 진제스님에게 계승되었다.

효봉선사(1888년 5월 28일~1966년 10월 15일(음력으로 9월 2일)

 

효봉선사(曉峰禪師)는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錦城洞)에서 아버지 수안(遂安) 이씨 병억(炳億)과 어머니 김씨의 사이에서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스님은 스물 여섯에 졸업한 후 서른 여석이 될 때까지 10년간(1913∼1923) 서울과 함흥 등지의 지방법원으로,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법관으로 종사했다. 1923년 스님의 나이 서른 여섯 살 때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날 몇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자기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고뇌하게 된다.

 

스님은 이를 계기로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러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석두(石頭)스님이 바로 그 스승이시다.

이날로 삭발, 석두스님으로부터 사미계(五戒)를 받고 원명(元明)이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잠자지 않으면서 분발, 깨달음을 위한 좌선(坐禪)에만 전념했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 지 1년반, 토굴의

벽이 무너지고 필사적인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마흔 다섯되던 1932년 4월 초파일,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은 스님은 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의 상원사 등의 청정한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7년 스님의 나이 쉰살 되던 해,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 머무른 후 선원인 삼일암(三日庵)에서 10년을 조실로 있으면서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고 길을 열어 보였다.

 

8.15 광복으로 일제의 탄압에서 풀려나게 되자 불교계의 인재양성을 절감, 해인사에 종합 수행처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개원,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어

조계산을 떠나 가야산으로 가게 된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처를

밀양 표충사로 옮긴 후 1966년 10월 15일(음력으로 9월 초이틀) 일흔 아홉의 나이로 세연을 마쳤다.

 

인곡당 법장스님 (1941년 6월 15일 ~ 2005년 9월 11일)

 

=인곡 법장 (仁谷 法長) 스님 열반송=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는데
입도 없고 밑도 없다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我有一鉢囊
無口亦無底
受受而不濫
出出而不空
--- <나에게 바랑이 하나 있네> 중에서

지관스님(1932년 5월 11일~2012년 1월 2일 (향년 79세)

 

제 32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1932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났다. 1947년에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 1953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곌글 수지했다. 1957년에는 해인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1963년 마산대에서 종교학을 공부했다. 1976년에는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님은 강원졸업 후 1970년까지 해인사 강원 강주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1970년 ~ 1972년과 1993년 ~ 1996년에는 해인사 주지를 지냈다.

 

법정스님(1932년 10월 8일 ~ 2010년 3월 11일)

 

법정스님(속명 박재철)1932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1956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을 은사로 출가.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하였고,

《불교신문》 편집·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및 보조사상연구원장 역임. 1970년대 후반에는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인 불임암()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홀로 살았음.


1994년 순수 시민행동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끄는 한편, 1996년에는 서울 도심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었음.

2003년 회주직에서 물러난 이후 강원도 산골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면서 무소유의 삶을 살았음. 그러던 중 폐암이 발병하여 3~4년간 투병생활을

하였으며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를 일기로 입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