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만공 스님 일화

백련암 2012. 7. 26. 02:07

 

수덕사 대웅전

 

만공스님

 

 

 

만공 스님 일화

 

어느 날 제자와 함께 고갯길 산마루를 오르고 있었는데 제자가 다리가 아파 더는 못 가겠다고 하자, 만공이 마침 길가 밭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아낙네를 와락 끌어안으니 그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좇아오는 바람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고개를 훌쩍 넘었다. 나중에 제자가 "스님,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하자, "이 놈아, 네가 다리 아파 못 가겠다고 했지 않느냐?

덕분에 여기까지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오지 않았느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스승 경허의 일화라고도 하는데,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대변하는 이야기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30년대 말, 만공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당시 만공 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어린 진성사미(오늘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 이라는 설도 있다)는 어느 날 사하촌(寺下村)의 짓궂은

나뭇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줄 것이니 따라 부르라는 나뭇꾼의 장난에 속아 시키는 대로

‘딱따구리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터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던 철없는 진성사미는 이 노랫말에 담긴 뜻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진성사미는 나중에 절안을 왔다갔다 하며 구성지게 목청을 올려 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성사미가 한창 신이 나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만공 스님이 지나가다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 사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부른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로구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예, 큰스님.”  진성사미는 큰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에 있는 이왕가(李王家)의 상궁과 나인들이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였다.

만공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마침 좋은 법문이 있은니 들어보라 하며 진성사미를 불렀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 번 불러 보아라.”

많은 여자 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는 노스님의 분부에 어린 진성사미는 그 전에 칭찬받은 적도 있고 해서

멋들어지게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제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어린사미가 이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에서 내려온 청신녀(淸信女)들은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때 만공스님이 한 말씀했다.

“바로 이 노래 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뚫린 부처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오.

뚫린 이치을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 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이 것이오.”

만공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서야 청신녀들은 합장배례했다.

서울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윤비(尹妃)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윤비도 크게 감동하여 딱따구리 노래를 부른

어린 사미를 왕궁으로 초청, ‘딱따구리’노래가 또 한 번 왕궁에서 불려진 일도 있었다.

만공 스님은 다른 한편으로는 천진무구한 소년같은 분이었다.

특히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린애처럼 손짓발짓으로 춤을 추며 ‘누름갱이 노래’를 부를 때는 모두들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지경

이었다고 한다.

오랑께루 강께루
정지문뒤 성께루
누름개를 중께루
먹음께루 종께루


한국 불교계에서 첫째 가는 선객, 만공 스님은 타고난 풍류객의 끼도 지닌 분이셨다.

1946년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고 난 스님은 거울 앞에 앉아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수고했네"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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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은 출가한 12살 때부터 만공 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그를 시봉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다.

만공은 인근 홍성이 고향인 청년 김좌진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했다. 김좌진은 젊은 시절부터 천하장사였다.

만공 또한 원담 스님이 “조선 팔도에서 힘으로도 우리 스님을 당할 자가 없었지”라고 할 정도였다.

“둘이 만나면 떨어질 줄 몰라. 어린 아이들처럼 ‘야, 자’하곤 했어. 앞에 놓인 교자상을 김 장군이 앉은 채로 뛰어넘으면 스님도 그렇게

했지. 언젠가는 둘이 팔씨름을 붙었는데, 끝내 승부가 나지 않더라고.”

김좌진은 훗날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만공 또한 출가한 몸이었지만 서산 앞바다 간월도에 간월암을 복원해 애제자 벽초와 원담으로 하여금 해방 직전 1천일 동안 조국 광복

을 위한 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이에 앞서 일제의 힘 앞에 굴종을 강요받던 1937년 3월11일 만공은 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마곡사 주지로 참석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사 가풍의 기개를 보여준 바 있었다.

 

총독 미나미가 사찰령을 제정해 승려의 취처(아내를 둠)를 허용하는 등 한국 불교를 왜색화한 전 총독 데라우치를 칭송했다.

이때 만공은 탁자를 내려치고 벌떡 일어나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전 총독은 지금 죽어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요. 그를 구하고 조선 불교를 진흥하는 길은 총독부가 조선 불교를 간섭하지 말고 조선승려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일갈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조선불교 간섭 말라’ 일제에 호통


 이날 밤 만공이 안국동 선학원에 가자 만해 한용운은 기뻐서 맨발로 뛰쳐나오며 “사자후에 여우 새끼들의 간담이 서늘하였겠소.

할도 좋지만 한 방을 먹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소”했다.

이에 만공은 “사자는 포효만으로도 백수를 능히 제압하는 법”이라며 껄껄 웃었다.

 

허공(虛空)은 마음을 낳고,
마음은 인격(人格)을 낳고,
인격은 행동을 낳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