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삼성역 봉은사 : 전경, 운하당, 삼층석탑, 대웅전삼존불, 판전, 심검당, 북극보전, 감로수, 영각, 범종루, 옛종각, 비림 등 外

백련암 2012. 9. 3. 00:34

봉은사(奉恩寺)는 사찰의 외형적 규모에서 뿐 아니라 역사적 위치에서도 서울의 대표적인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는 서울과 경기 일원의 80여 사찰을 관장하던 본사(本寺)였으며, 칼날 같은 억불정책이 지속되던 조선시대에는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의

위치에 있으면서 한국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지금은 뚝섬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옛 정취는 사라졌지만,

봉은사의 빼어난 경관은 아직도 수많은 시민들의 정서를 살찌우는 곳으로 이름 나 있는 곳이다

 

봉은사 창건역사

봉은사의 창건에는 통일신라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794년(신라 원성왕 10)에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주장과, 조선시대 중기에 견성사를

중창하여 봉은사로 하였다는 주장이다. 794년 창건설은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다음의 내용을 현재의 봉은사와 연관시켜서 보기 때문이다.

원성왕 10년 7월에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漢山州)에서 흰 까마귀를 왕에게 바쳤다. 대궐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794년에 봉은사를 창건하였고,

대궐 서쪽에 세운 망은루도 봉은사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현재 봉은사에 있는 「봉은사사적비명(奉恩寺事蹟碑銘)」도 이에 근거해서 연회국사가 창건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 사적비는 1932년 권상로(權相老) 선생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서 봉은사는 원성왕 10년에 창건되었으며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초대 주지로

부임하였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견성사(見性寺)를 지금 유자광(柳子光)과 박안성(朴安性)의 말을 들어 옮겨지으려고 하시는데,

유자광 등은 대비(大妃)의 뜻을 받들어 말한 것이오니 만일 철거하지 못한다면 예전대로 두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 새로 창건한 봉은사에 전토(田土)가 없으니, 각 사사(寺社)에서 세(稅)를 거둔 것과 세납한 소금을 옮겨 주라.

 

*위의 두 자료는 모두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번째 자료는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인 견성사에 관계된 것으로, 견성사를 이건하려는 왕의 의도에 대하여

대신들이 반대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자료는 견성사가 중창된 후 봉은사로 사찰이름이 바뀌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선릉의 능침사찰이던 견성사는 중창과 함께 봉은사라는 사찰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 자료의 시기는 각각 1498년(연산군 4)과 1499년(연산군 5)에 해당하므로 견성사가 봉은사로 개창된 때는 1498∼1499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창건설에 대해서 지금 당장 무어라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 봉은사에서는 이 두 가지 내용을 하나로 묶어서 창건과 연혁을

구성하고  있다. 봉은사에서 펴낸 안내책자 등에는 794년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1498년 중건하면서 절 이름이 봉은사로 바뀌었고, 1562년(명종 17) 지금의 수도산 아래로 옮겼다는 것이다.

 

 

 봉은사 전경

 

 운하당(雲霞堂)

운하당은 심검당과 마찬가지로 승방으로 쓰이며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전각이지만, 지금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대웅전(大雄殿)과 삼층석탑(三層石塔)

大雄殿 : '대웅전(大雄殿)' 편액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체다.

대웅보전 안에는 가운데 불단에 석가삼존불, 왼쪽 벽에 약사여래, 오른쪽 벽에 십일면관음을 모셨다.

 

三層石塔 : 대웅전 앞마당에 세워진 석탑에는 불사리 1과가 봉안되어 있다.

형태는 전형적인 삼층 모습으로, 상대 하대의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석을 쌓고 그 위에 각각 옥개석을 얹은 것이다.

3층 옥개석 위에는 노반(露盤)을 놓았고 다시 그 위에 상륜(相輪部)가 설치되어 있다. 지대석을 포함한 상륜부까지의 높이는 839m이다.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서울 奉恩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 보물  제1819호  시대 : 조선

중앙 석가모니불, 우측 아미타불, 좌측 약사여래불의 순서임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불을 모셨다.

결가부좌하여 연화좌 위에 앉아있는 석가여래는 전체적으로 매우 근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상호(相好)는 이목구비가 모두 단정하며, 눈은 반쯤 감은 이른바 행실형(杏實形)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은 무릎 옆으로 세웠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역시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석가여래와 비슷하지만 크기가 조금 작다.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이며, 2003년에 개금하였다.

 

대웅전 후불탱(대웅전 후불탱)

본존불의 후불탱은 삼여래회상도(三如來會上圖)가 봉안되어 있다.

그림의 내용은 가운데 석가여래가 있고 그 좌우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는 구도이다.

 

그림 아래 화기에는 1892년(고종 29) 5월에 봉안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민두호(閔斗鎬) 등의 시주자,

그리고 이 불사에 참여했던 스님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림을 그린 스님은 영명 천기(影明天機)·월봉 법민(月峯法敏)·태흔(太昕) 스님 등이다.

 

◈봉은사 목 삼불상(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 (奉恩寺 木 三佛像(釋迦佛,阿彌陀佛,藥師佛))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26호  시대 : 조선

▶대웅전 삼존상(大雄殿 三尊像) =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서울 奉恩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 보물  제1819호로 승격되었음 2014년 3월 11일

 

봉은사 대웅전의 삼세불상은 본존 석가불상, 좌 약사불상, 우 아미타불상 등 3존의 불상인데 본존 석가불은 1651년 작(作) 원상이 화재로

훼손되어 후보(後補)한 것이며, 약사불과 아미타불상만 1651년 작(作) 원래의 불상들로서 당대 최고의 조각승 승일(勝一)이 조성한 대표적 삼세불상이다.


<목 석가불좌상>은 얼굴은 넙적하고 사각형적이지만 뺨과 턱이 둥글게 처리되었고 코도 돌출됐지만 큼직하고 둥글게 표현되어 양감이 상당한 편이다.

이런 얼굴은 1636년 화엄사 대웅전 석가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불상들과 유사하지만 좀더 넙적한 것이 다르며,

1703년 작(作) 화엄사 각황전 석가불상 등과도 유사하지만 이마가 그렇게 넓지 않고 코도 보다 큼직하고 둥글어 1706년 작(作) 불갑사 팔상전 석가불상

더 닮아 있다. 눈은 가늘고 입은 작으며 귀가 큼직하고 뚜렷하게 보이며, 코가 상대적으로 덜 돌출한 것도 인상적이다.

상체는 사각형적이고 짧은 편이지만 어깨가 다소 좁으면서 궁글려져 반듯하게 보이는데 천은사 석가상이나 화엄사 각황전 불상

색난파(色難派) 불상들에 표현된 양 어깨를 앞으로 숙이는 특징은 1639년 쌍계사 석가불상의 어깨나 상체와 유사한 편이어서 무염파 조각의 전통을

잇고 있다. 결가부좌한 하체는 높고 큼직한 편인데 무릎이 직각으로 큼직하게 처리되어 화엄사 각황전의 하체의 무릎처리와 유사한 편이다.

<목 약사불좌상>은 본존 석가 불상과 거의 유사하지만 크기에서 본존보다 40여cm 작은 편이며 군의나 옷주름 등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머리가 반달형이고 원통형의 큼직한 정상계주와 반달형의 중앙계주, 촘촘한 나발 등 본존과 동일하며

본존이 약사불이나 아미타불을 모형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사각형적이면서 뺨이나 턱을 궁글려 양감을 느끼게 하며,

가는눈, 짧지만 큼직하고 빚은 듯한 코, 긴 입 등 다소 평판적인 얼굴과 어울려 듬직한 느낌을 주고 있다.

짧고 사각형적인 상체는 어깨를 약간 움추린 듯 표현했고 아랫배가 약간 나오고 있다. 결가부좌한 하체는 무릎이 높고 직각적이어서

듬직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 무릎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체 손등을 보이게 했고,

왼손은 왼 무릎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모은 이른바 하품중생인의 변형을 보여주고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의인데 대의는 오른쪽 어깨로 반달형으로 걸쳐 오른쪽 팔목을 감싸고 있으며, 본존에 없는 팔에 표현된 착의는 상의(上衣)여서

2중착의법으로 입고 있다. 군의의 상단은 삼각형 접힘이 표현되었고 U자를 겹치게 표현한 상의 등 본존 석가불과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무릎아래에서 발목으로 난 3가닥 선은 선운사 대웅전 불상과 유사한 것이다.

<목 아미타불좌상>은 <목 약사불상>과 동일한 형식과 양식의 목불상이지만 크기는 미세할 정도로 작은 편이다.

약간 더 뾰족한 반달형의 머리, 원통형 정상계주와 반달형 중앙계주, 촘촘한 나발 등도 거의 동일한 형태이며,

사각형이면서도 궁글린 양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등도 동일한 모습인 것이다.

짧고 평판적인 상체, 약간 움추린 어깨, 약간 부른 배, 결가부좌한 하체와 높고 직선적인 무릎, 하품중생인 변화수인 등은 물론 착의법도 동일한 것이다.

약사와 아미타불상은 1651년에 조성되었고, 석가불상은 1689년경에 조성된 17세기 작품이 확실하며

만든 조각승도 당대의 최고 명인 승일(勝一)이며 나무로 된 삼세불상이 확실하기 때문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판전 옆모습 

판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전각으로, 화엄경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판전(板殿) : 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

『화엄경소』를 비롯한 총 15종 1, 480매의 많은 목판본이 있는데 판전(板殿)은 바로 이 목판본을 보관하기 위하여 세워진 전각이다.

판전은 처음 남호 영기 대사가 조성한 80권의 『화업경소』를 봉안하기 위해 지었다가  그 뒤로 다른 경판들이 모여지면서 지금과 같은 방대한 양이 되었다.

판전의 건립연대는 1855년(철종 6)으로 현재 봉은사에 남아 있는 전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봉은사 판전 현판 (奉恩寺 板殿 懸板)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83호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말년 작품으로 「71과(과천)병풍작」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정희는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제자이다.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김정희는 순조 9년(1809)에 생원이 되고, 순조 19년(18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증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다.

전해오기로는 그가 「71과(과천)병풍작」이란 글씨를 쓴 3일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죽은 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尋劒堂 :  관세음보살

 

심검당(尋劒堂)

대웅전 앞마당 서쪽, 동쪽의 선불당과 마주하는 곳에 심검당(尋劒堂)이 있다.

심검당은 사찰에서 선방이나 강당의 이름으로 많이 붙여지는 명칭으로, ‘지혜의칼을 찾아 무명(無明)의 풀을 벤다’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다.

 

 

북극보전(北極寶殿) 옆면

 

 

북극보전(北極寶殿)

영산전 왼편의 언덕에 북극보전(北極寶殿)이 있다.

북극보전이란 이름 그대로 북극성을 모신 전각인데 다른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칠성각(七星閣)과 동일한 성격의 전각이다.
안에는 칠성탱·산신탱·독성탱을 봉안하였다.

 

 

북극보전 칠성탱(北極寶殿 七星幀)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33호

칠성탱은 가운데 치성광여래가 앉아 있고 그 신광과 두광을 따라 28(宿)가 무지개 모양으로 배치되었으며, 치성광여래 좌우에 7여래가 표현되어 있다.

그림 하단에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이 있고 화면 상단 좌우에는 각각 삼태(三台)와 육성(六星)도 배치되어 있다.

 

봉은사 칠성도 (奉恩寺 七星圖)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33호

이 불화는 북극보전에 산신도, 독성도와 함께 봉안되어 있는 칠성도로서 1886년 4월 판전의 후불탱화(비로자나불화), 산신도와 함께 조성되어

판전에 봉안되었다가 1942년 북극보전으로 이안된 것이다.

치성광여래는 흰 소가 끄는 마차 위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둥근 얼굴에 육계가 뾰족하며,

오른손은 가슴부근으로 들어 올려 손가락을 마주 잡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아 금륜(金輪)을 들고 있다.

 

소가 끄는 마차에 앉아있는 치성광여래의 도상은 힌두교에서 태양이 백우거(白牛車)를 타고 우주를 1회 돌면 1년이 된다는 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일찍부터 백우거(白牛車)를 타고 있는 치성광여래의 도상이 성립되었는데,

조선후기에는 치성광여래가 대부분 우차(牛車)를 타지 않고 수미단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부 칠성도, 예를 들어 청룡사 칠성도(1868년)를 비롯하여 서울 미타사 칠성도(1874년), 동학사 칠성도(19세기후반), 서울 안양암 칠성도(1930년)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칠성도 중에는 백우거(白牛車)가 묘사되고 있어 전통적인 도상을 잘 계승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봉은사 칠성도 또한 그러한 도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치성광여래 아래에는 해와 달을 신격화한 일광보살[日光遍照逍災菩薩]과 월광보살[月光遍照逍災菩薩]이 몸을 구부린 채

각각 붉은 해와 흰 달이 그려진 보관을 쓰고 본존을 향해 합장하였으며, 그 옆에선 두 명의 동자가 향로와 과일을 공양하고 있다.

 

치성광여래의 두광과 신광 옆에는 머리에 별이 그려진 관을 쓴 28宿이 좌우 14구씩 묘사되었으며, 그 옆으로 왼쪽(향우측)에 4구, 오른쪽에 3구 등

 칠성여래가 큼직하게 묘사되었다.

칠성여래는 녹색의 두광을 두르고 정면 혹은 측면을 향하고 있는데 둥근 얼굴에 뾰족한 육계 등 치성광여래와 동일한 모습이다.

 

칠성여래 아래에는 붉은 관복을 입고 별이 그려진 관을 쓴 문신모습의 칠원성군(七元星君)이 시립하였는데,

왼쪽의 한 성군은 면류관을 쓰고 있어 아마도 시왕 중 다섯 번째 염라대왕이 면류관을 쓴 것을 따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들 옆으로는 좌우 각 2명의 동자가 높게 번을 쳐들고 있다.

칠성여래의 위쪽으로는 태상노군(太上老君)과 필성(弼星), 그리고 화면 상단 좌우에는 각각

삼태(三台)와 육성(六星)이 배치되어 있다. 태상노군의 정수리가 유난히 높은 것이 눈에 띈다.

채색은 적색과 녹색, 청색, 황색 등이 주조를 이루지만 적색과 청색의 사용이 두드러져 보인다.


등운 수은(騰雲 修隱)이 화주, 청신녀(淸信女) 경인생(庚寅生) 오청정월(吳淸淨月)이 인권대시주(引勸大施主)가 되어 조성하였는데,

오청정월(吳淸淨月)은 1892년 대웅전의 삼세불화와 삼장보살도, 감로왕도 제작 때 인권대시주를 맡았으며,

1912년 대웅전 삼존불상의 개금 때도 인권화주(引勸化主)를 맡은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 봉은사의 중요한 단원(檀越) 중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불화는 전체적으로 인물묘사가 섬세하고 곧은 철선을 사용하여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며, 많은 인물들을 표현하면서도 위로 올라갈수록

인물의 크기를 작게 그리고, 치성광여래를 향하여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상단의 본존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특히 백우거(白牛車)에 앉아있는 치성광여래의 도상은 다른 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도상이지만 서울 미타사 삼성각 칠성도(1874년),

정수사 칠성도(1878년) 등에서 볼 수 있어, 이 불화가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지역 칠성도상을 충실하게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북극보전 산신탱(北極寶殿 山神幀)

독성탱화는 1942년 북극보전을 중건하면서 함께 봉안된 것으로 그림은 보응(普應) 스님이 그렸다.

 

 

북극보전 독성탱(北極寶殿 獨星幀)

독성탱은 1942년 북극보전을 중건하면서 함께 봉안된 것으로 그림은 보응(普應) 스님이 그렸다.

 

 

감로수

 

 

영각(影閣)

본래 이곳은 전몰장병 등 호국영령의 위패가 봉안되던 충령각(忠靈閣)이었다.

그러다가 1993년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건하면서 영각(影閣)으로 바꾸어 봉은사에 머물렀던 여러 고승들의 진영(眞影)을 모셔 놓았다.

 

 

영각(影閣) : 지장삼존상

가운데 불단에는 지장삼존불상과 지장탱이 있고, 벽면에는 모두 여섯 분의 영정을 모셨다.

연회국사(緣會國師)를 비롯하여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사명당(四溟堂) 유정(維政), 남호당(南湖堂) 영기(永奇),

영암당(暎岩堂) 임성(任性) 스님 등이다.

 

 

종루

 

 

범종각

 

 

종루와 법왕전 대웅전 앞으로 가는 길

 

 

  범종각 역사의 뒤편에서...

 

 

백중 등

 

 

비림(碑林)

 

 

 

 

할아버지와 손자.

 

 

장독대 담장 밑 옥잠화

 

 

 

 

 

▶찾아가는 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하차 6번출구로 나와서 코엑스 쪽으로 한 10분 ~ 15분 가다보면 봉은사 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