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奉恩寺)는 사찰의 외형적 규모에서 뿐 아니라 역사적 위치에서도 서울의 대표적인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는 서울과 경기 일원의 80여 사찰을 관장하던 본사(本寺)였으며, 칼날 같은 억불정책이 지속되던 조선시대에는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의
위치에 있으면서 한국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지금은 뚝섬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옛 정취는 사라졌지만,
봉은사의 빼어난 경관은 아직도 수많은 시민들의 정서를 살찌우는 곳으로 이름 나 있는 곳이다
봉은사 창건역사
봉은사의 창건에는 통일신라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794년(신라 원성왕 10)에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주장과, 조선시대 중기에 견성사를
중창하여 봉은사로 하였다는 주장이다. 794년 창건설은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다음의 내용을 현재의 봉은사와 연관시켜서 보기 때문이다.
원성왕 10년 7월에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漢山州)에서 흰 까마귀를 왕에게 바쳤다. 대궐 서쪽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794년에 봉은사를 창건하였고,
대궐 서쪽에 세운 망은루도 봉은사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현재 봉은사에 있는 「봉은사사적비명(奉恩寺事蹟碑銘)」도 이에 근거해서 연회국사가 창건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 사적비는 1932년 권상로(權相老) 선생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서 봉은사는 원성왕 10년에 창건되었으며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초대 주지로
부임하였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견성사(見性寺)를 지금 유자광(柳子光)과 박안성(朴安性)의 말을 들어 옮겨지으려고 하시는데,
유자광 등은 대비(大妃)의 뜻을 받들어 말한 것이오니 만일 철거하지 못한다면 예전대로 두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 새로 창건한 봉은사에 전토(田土)가 없으니, 각 사사(寺社)에서 세(稅)를 거둔 것과 세납한 소금을 옮겨 주라.
*위의 두 자료는 모두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번째 자료는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인 견성사에 관계된 것으로, 견성사를 이건하려는 왕의 의도에 대하여
대신들이 반대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자료는 견성사가 중창된 후 봉은사로 사찰이름이 바뀌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선릉의 능침사찰이던 견성사는 중창과 함께 봉은사라는 사찰명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 자료의 시기는 각각 1498년(연산군 4)과 1499년(연산군 5)에 해당하므로 견성사가 봉은사로 개창된 때는 1498∼1499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창건설에 대해서 지금 당장 무어라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 봉은사에서는 이 두 가지 내용을 하나로 묶어서 창건과 연혁을
구성하고 있다. 봉은사에서 펴낸 안내책자 등에는 794년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1498년 중건하면서 절 이름이 봉은사로 바뀌었고, 1562년(명종 17) 지금의 수도산 아래로 옮겼다는 것이다.
봉은사 전경
운하당(雲霞堂)
운하당은 심검당과 마찬가지로 승방으로 쓰이며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전각이지만, 지금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대웅전(大雄殿)과 삼층석탑(三層石塔)
大雄殿 : '대웅전(大雄殿)' 편액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체다.
대웅보전 안에는 가운데 불단에 석가삼존불, 왼쪽 벽에 약사여래, 오른쪽 벽에 십일면관음을 모셨다.
三層石塔 : 대웅전 앞마당에 세워진 석탑에는 불사리 1과가 봉안되어 있다.
형태는 전형적인 삼층 모습으로, 상대 하대의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석을 쌓고 그 위에 각각 옥개석을 얹은 것이다.
3층 옥개석 위에는 노반(露盤)을 놓았고 다시 그 위에 상륜(相輪部)가 설치되어 있다. 지대석을 포함한 상륜부까지의 높이는 839m이다.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서울 奉恩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 보물 제1819호 시대 : 조선
중앙 석가모니불, 우측 아미타불, 좌측 약사여래불의 순서임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불을 모셨다.
결가부좌하여 연화좌 위에 앉아있는 석가여래는 전체적으로 매우 근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상호(相好)는 이목구비가 모두 단정하며, 눈은 반쯤 감은 이른바 행실형(杏實形)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은 무릎 옆으로 세웠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역시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석가여래와 비슷하지만 크기가 조금 작다.
조선시대 후기의 작품이며, 2003년에 개금하였다.
대웅전 후불탱(대웅전 후불탱)
본존불의 후불탱은 삼여래회상도(三如來會上圖)가 봉안되어 있다.
그림의 내용은 가운데 석가여래가 있고 그 좌우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는 구도이다.
그림 아래 화기에는 1892년(고종 29) 5월에 봉안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민두호(閔斗鎬) 등의 시주자,
그리고 이 불사에 참여했던 스님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림을 그린 스님은 영명 천기(影明天機)·월봉 법민(月峯法敏)·태흔(太昕) 스님 등이다.
◈봉은사 목 삼불상(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 (奉恩寺 木 三佛像(釋迦佛,阿彌陀佛,藥師佛))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26호 시대 : 조선
▶대웅전 삼존상(大雄殿 三尊像) =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서울 奉恩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 보물 제1819호로
승격되었음 2014년 3월 11일
봉은사 대웅전의 삼세불상은 본존 석가불상, 좌 약사불상, 우 아미타불상 등 3존의 불상인데 본존 석가불은 1651년 작(作) 원상이 화재로
훼손되어 후보(後補)한 것이며, 약사불과 아미타불상만 1651년 작(作) 원래의 불상들로서 당대 최고의 조각승 승일(勝一)이 조성한 대표적 삼세불상이다.
<목 석가불좌상>은 얼굴은 넙적하고 사각형적이지만 뺨과 턱이 둥글게 처리되었고 코도 돌출됐지만 큼직하고 둥글게 표현되어 양감이 상당한 편이다.이런 얼굴은 1636년 화엄사 대웅전 석가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불상들과 유사하지만 좀더 넙적한 것이 다르며,
1703년 작(作) 화엄사 각황전 석가불상 등과도 유사하지만 이마가 그렇게 넓지 않고 코도 보다 큼직하고 둥글어 1706년 작(作) 불갑사 팔상전 석가불상과
더 닮아 있다. 눈은 가늘고 입은 작으며 귀가 큼직하고 뚜렷하게 보이며, 코가 상대적으로 덜 돌출한 것도 인상적이다.
상체는 사각형적이고 짧은 편이지만 어깨가 다소 좁으면서 궁글려져 반듯하게 보이는데 천은사 석가상이나 화엄사 각황전 불상 등색난파(色難派) 불상들에 표현된 양 어깨를 앞으로 숙이는 특징은 1639년 쌍계사 석가불상의 어깨나 상체와 유사한 편이어서 무염파 조각의 전통을
잇고 있다. 결가부좌한 하체는 높고 큼직한 편인데 무릎이 직각으로 큼직하게 처리되어 화엄사 각황전의 하체의 무릎처리와 유사한 편이다.
<목 약사불좌상>은 본존 석가 불상과 거의 유사하지만 크기에서 본존보다 40여cm 작은 편이며 군의나 옷주름 등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머리가 반달형이고 원통형의 큼직한 정상계주와 반달형의 중앙계주, 촘촘한 나발 등 본존과 동일하며
본존이 약사불이나 아미타불을 모형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사각형적이면서 뺨이나 턱을 궁글려 양감을 느끼게 하며,
가는눈, 짧지만 큼직하고 빚은 듯한 코, 긴 입 등 다소 평판적인 얼굴과 어울려 듬직한 느낌을 주고 있다.
짧고 사각형적인 상체는 어깨를 약간 움추린 듯 표현했고 아랫배가 약간 나오고 있다. 결가부좌한 하체는 무릎이 높고 직각적이어서듬직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 무릎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체 손등을 보이게 했고,
왼손은 왼 무릎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모은 이른바 하품중생인의 변형을 보여주고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의인데 대의는 오른쪽 어깨로 반달형으로 걸쳐 오른쪽 팔목을 감싸고 있으며, 본존에 없는 팔에 표현된 착의는 상의(上衣)여서2중착의법으로 입고 있다. 군의의 상단은 삼각형 접힘이 표현되었고 U자를 겹치게 표현한 상의 등 본존 석가불과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무릎아래에서 발목으로 난 3가닥 선은 선운사 대웅전 불상과 유사한 것이다.
<목 아미타불좌상>은 <목 약사불상>과 동일한 형식과 양식의 목불상이지만 크기는 미세할 정도로 작은 편이다.
약간 더 뾰족한 반달형의 머리, 원통형 정상계주와 반달형 중앙계주, 촘촘한 나발 등도 거의 동일한 형태이며,사각형이면서도 궁글린 양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등도 동일한 모습인 것이다.
짧고 평판적인 상체, 약간 움추린 어깨, 약간 부른 배, 결가부좌한 하체와 높고 직선적인 무릎, 하품중생인 변화수인 등은 물론 착의법도 동일한 것이다.
약사와 아미타불상은 1651년에 조성되었고, 석가불상은 1689년경에 조성된 17세기 작품이 확실하며만든 조각승도 당대의 최고 명인 승일(勝一)이며 나무로 된 삼세불상이 확실하기 때문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한다.
판전 옆모습
판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전각으로, 화엄경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판전(板殿) : 서울시유형문화재 제84호
『화엄경소』를 비롯한 총 15종 1, 480매의 많은 목판본이 있는데 판전(板殿)은 바로 이 목판본을 보관하기 위하여 세워진 전각이다.
판전은 처음 남호 영기 대사가 조성한 80권의 『화업경소』를 봉안하기 위해 지었다가 그 뒤로 다른 경판들이 모여지면서 지금과 같은 방대한 양이 되었다.
판전의 건립연대는 1855년(철종 6)으로 현재 봉은사에 남아 있는 전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봉은사 판전 현판 (奉恩寺 板殿 懸板)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83호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말년 작품으로 「71과(과천)병풍작」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정희는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제자이다.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문인화의 대가였다. 김정희는 순조 9년(1809)에 생원이 되고, 순조 19년(18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고증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다.
전해오기로는 그가 「71과(과천)병풍작」이란 글씨를 쓴 3일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죽은 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尋劒堂 :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