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김제 진봉산 망해사(望海寺) = 서해바다가 손에 닿을 만큼 가까운 바닷가 절집, 김제 진봉산 망해사

백련암 2013. 10. 23. 14:15

김제 진봉산 망해사

망해사는 서해바다를 가장 가깝게 바라보고 만질 수 있는 사찰이다.  이곳 망해사 앞은 서해바다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맑은 바닷물이 손에 잡힐

듯하다.  눈이 시리게 파란 바닷물이 망해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자 마구 달려오다가 바로 절집 앞 마당 아래에서 마구 부서져

하얀 파도가 되는 그런 곳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인해 바다가 강인지 개울인지 모를정도로 쇠퇘되었다.

 

망해사를 찾아들어가면 가장 먼저 오래 묵은 나무가 양팔을 벌리고 반갑게 맞이해 준다. 한눈에도 아주 오래된 나무임을 느낄 수 있고

그만큼 유서깊은 고찰의 면모가 반갑다.  나무에 기대서자마자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수려한 변산반도가 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만큼 바다가 바로 내 발밑에 다가와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길고 깊은 나무그늘에 잠시 서서 한여름의 무더위를 씻어줄 정도로 시원한 바닷바람이다.

 

절집을 바라보면 17세기에 전북의 유명한 고승 진묵대사와 인연이 깊은 낙서전(樂西殿)의 고색창연한 모습이 반갑게 맞아준다.

 

오래된 옛 건물들은 우리의 산과 들, 혹은 바다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록 건물은 작지만 그 안에는 고승의 법력으로 부처님의 가피력을 발현하여,

이곳에 자주 출현하던 왜구를 막아낼 수 있게 한 것이다. 지금도 먼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어주는 관음보살의 원력이 생동하는 듯하다.  

서해안 바닷가에 서 있는 작지만 큰 아름다운 고찰, 망해사. 그곳에 가면 자연과 하나되어 항상 우리를 지켜주시는 부처님의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다.

 

◈사찰의 창건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671년(백제 11년, 신라 문무왕 11년)에 부설스님이 세웠다거나,

   통일신라시대인 754년(경덕왕 23)에 통장(通藏)법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설이 정확한지는 고증하기 어렵다.

 

♠진묵스님

진묵 큰 스님이 이곳에 사찰을 지은 이유는 서해안의 바닷가에 바로 붙어있었기 때문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서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망해사를 건립한 다음부터는 터를 눌렀기 때문인지 외침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장스님

도장스님은 백제 후기의 스님으로서 망해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고승이다.<망해사중수기>에 의하면 "중도(中道)"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바로 도장스님을 지칭한 듯하다.  스님은 일본에 가서 성실종(成實宗)을 전한 분으로 유명하다.

그 행적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본조고승전>, <속일본서기>등의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675년에 일본에 갔는데

684년 여름에 날이 가물므로 왕이 스님을 불러 비를 빌게 하니, 해가 채 뜨기전에 비가 대지에 가득내려 그로부터 왕이 스님을 존숭했다.

 

721년에는 왕이 글을 내려 "도장스님은 부처님의 동량이며 법문의 으뜸인데, 나이가 80세가 넘어 기력이 쇠약해졌으므로

시물하여 잘 공양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스님은 구사(具舍), 삼론(三論)에 능한 학자로 평가 받으며, 저술로는 <성실론소> 16권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는다.

 

 

요사채 전경

공양간 겸 요사채로 사용되는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지은 목조기와집이다.

 

 

  

聽潮軒(청조헌)               요사채에 걸려있는 편액                 望海寺(망해사)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1991년에 중창되었는데, 다포형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목조 기와집이다.

편액이 걸려있고, 4개의 주련이 걸렸으며, 내외에 단청이 되어 있고, 4분합문이 배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상이 가운데 모셔져 있고, 왼쪽으로 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불화로는 아미타후불탱과 지장시왕탱 및 칠성탱과 산신탱,

신중탱 및 진묵대사초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 밖에 범종이 있다. 

극락전은 크기나 위용에 있어 사찰 전체를 압도하나 작고 아름다운 낙서전의 자태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미타삼존상 

본존불인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측은 대세지보살,  우측 관세음보살을 협시불로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 과 지장시왕탱화

 

 

신중단

 

 

진묵대사초상

 

 

법당내 동종

 

 

낙서전(樂西殿) = 전북 문화재 자료 제 128호

 

=망해사(望海寺) 낙서전(樂西殿) 안내문에서=

이 건물은 조선 선조 22년(1589년)에 진묵스님이 처음 지은것으로, 1933년과 1977년에 고쳐지었다.

망해사는 만경강 하류 진봉산 기슭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리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부설스님이 처음 세웠다고 하는데 그 때의 절은 땅이 무너져 바다에 잠겨버렸다고 한다.

이 낙서전은 평면이 기억자형으로 건물 한 켠에는 마루를 놓고 그 위에 근래에 만든 종을 걸었다.

다른 켠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 건물이 법당 겸 스님의 거처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양이 불규칙한 나무로 기둥으로 세워 자연미를 짙게 풍긴다.

 

◀망해사(望海寺) 낙서전(樂西殿)에 새겨진 진묵대사의 시▶

天衾地褥山爲枕(천금지욕산위침) =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았도다.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 달은 촛불이요 구름잡아 병풍치고 바닷물로 술잔을 기울이며,

大醉擧然因起舞(대취기연인기무) = 크게 취해 한바탕 멋진 춤가락을 추고 싶은데,

小嫌長袖卦崑崙(소혐장수괘곤륜) = 이놈의 장삼이 곤륜산에 걸쳐 거추장스럽구나.

 

 

편액에‘낙서전’이라 써 있고 4개의 주련이 걸려 있으며, 외부에는 퇴락한 단청이 칠해 있다.

이 건물은 1589년(선조 22)에 전라북도의 고승인 진묵스님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1933년과 1977년에 고쳐 지은 기록이 있고 1986년에 해체 복원을 하여 보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낙서전 내부에는 나무를 깍아 수미단을 만들고 그 위에는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불좌상을 중심으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좌상이 협시를 이루는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뒤에는 아미타불이 설법하고 있는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들어가지못함

 

‘낙서전(樂西殿)’이라는 이름에서 보이듯 서해바다를 즐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서해바다를 즐겼을 스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86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낙서전 앞 쪽에 있는 고목들은 세월의 더께 만큼이나 구불구불하고, 바닷바람을 막느라 한쪽으로 쏠려 있다.

하지만 낙서전에 들어간 순간 바람은 일순간에 멈추게 되는지, 앞쪽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도 뒤쪽의 대나무는 흔들림이 없었다.

작지만 안온한 분위기여서 스님들이 수행하는데 좋을 그런 집이다.

 

 

망해사(望海寺) 낙서전(樂西殿)

 

 

범종각(梵鐘閣)

칠성각에서 보관하고 있던 범종을 이곳으로 옮겨 현재 이곳에 매달려 있다.

전체적으로 범종각의 위치는 바닷쪽에 면해 있어 탁 트인 시원한 느낌을 많이 갖게 된다. 전망이 탁 트이고 아름다운 곳이며,

이곳에서는 왜침의 기운을 누르고 왜구의 침범을 예방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슬기가 느껴진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 옆에 예전에 우물자리였다고 한다. 지금은 메워져있어 흔적만 남아있음

 

 

삼성각(三聖閣)

 

 

 

 독성 혹은 나한 = 나반존자

 


 

칠성 = 칠원성군

 


 산신= 산왕대신

 

 

망해사 팽나무 = 전북 도지정 기념물 제 114호  2그루

신라문무왕 11년(671년) 부설거사가 창건한 사찰인데 낙서전 전면에 서 있는 팽나무는 선조 22년(1589년)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창건하고 그 기념으로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두그루의 망해사 팽나무는 문화재인 낙서전 그리고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와 더불어 망해사의 명물이다. = 안내판설명

 

 

부도군(浮屠群)

예전에는 사찰 밖으로 있는 이 부도군이 해양경비대의 군사시설안 있었다고 한다. 만화탑, 심월당, 청심당, 덕유당 등의 스님 묘탑(墓塔)들로 한 곳에 모여

조성되어 있다. 단순한 형태로 항아리 모양의 탑신(塔身)에 옥개석(屋蓋石)을 올려 꾸민 부도로 자유롭게 보인다.

 

 

 

해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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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만나는 우리역사 김제 망해사      “바다를 보며 수행자 본분사 떠올린다”


기축옥사로 희생당한 지식인          임진왜란으로 도탄 빠진 백성          이들이 기댄 인물이 진묵대사 

조선 인조 때 진묵대사 再創          낙서전과 팽나무 여전히 남아          바다 바라보는 천혜절경 자랑


"우리곁에 왔던 부처"

대사의 자취를 찾아 전북 김제 망해사(望海寺)를 찾았다. 망해사가 진묵과 특별한 이유는 대사가 새로 지은 절인데다 그 흔적이 남아 있어서다.

지난 7월10일 김제 평야에는 비바람이 몰아쳤다. 찾아오던 여름이 뒤로 주춤 물러난 듯 제법 한기 마저 드는 날씨였다.

끝없이 펼쳐진 논 한가운데를 비에 흠뻑 젖어 달리는 버스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사람의 아픈 손을 부여잡고

 용기를 주고 힘을 불어넣듯 대사도 이 길을 한 없이 걸었을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는 절’ 이름을 생각하면 산으로 향한 이정표는 처음 온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하다. 김제 평야의 ‘고지대’가 기껏해야 언덕에 불과한데 비해

망해사를 가리키는 곳은 소나무가 우거진, 제대로 된 산이어서 더 당황스럽다. 혼란한 마음을 이기는 길은 한 가지 믿음이다.


저 안내판이 나를 바른 길로 안내한다는 믿음. 믿음이 없으면 산으로 가라는 바닷가 사찰 안내판을 따라 가기 어렵다.

몇 번이나 의심하며 되돌아갈려는 마음을 누르고 산 허리를 돌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다. 아래로 내려가자 망해사가 나온다.

그제서야 20여년 전 그 때도 똑같이 망설였었던 기억이 떠 오른다. 도량은 깔끔하다. 주차장도 생겼고 경내도 훨씬 넓어졌다.

바다는 물 마른 호수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얕다. 새만금 때문이다.

진묵대사가 지은 낙서전(樂西殿), 대사가 심은 팽나무가 여전히 푸르고 싱싱한 자태를 뽐낸다.


문무왕 때 부설거사가 창건

망해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1) 부설거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땅이 꺼져서 바다 속으로 잠겨버렸다고 한다.

바다와 접해 있을 법한 사고다. 혹은 높은 파도가 덮쳤는지 모른다. 아니면 왜구의 노략질 침입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가능성을 자연재해로 갈무리 했는지 알 수 없다. 그 뒤 1000년쯤 지나 조선 선조22년(1589) 진묵대사가 이곳으로 와서 낙서전(樂西殿)을 새로 지었다.

망해사가 자리한 곳은 만경강이 서해 바다와 접하는 진봉면 심포라는 작은 어촌이다. 해안가 산허리를 깎아 들어선 절은 터가 좁아 당우들이 한 줄로 죽 늘어섰다.

원래 절 가운데 범종각이 있고 그 양옆으로 낙서전(樂西殿), 법당, 청조헌(廳潮軒)이 늘어서 있었는데 도량을 넓히면서 범종각이 앞으로 나왔다.

망해사 낙서전 청조헌이 모두 바다를 보고 파도소리를 듣고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니 바다를 면한 사찰 중에 이만한 운취와 정경을 지닌 곳도 없다.


낙서전은 바다 쪽으로 한 쪽이 튀어나온 ㄱ자건물인데 건물 한켠에 마루를 놓고 종을 걸었다. 다른 켠에는 방과 부엌을 두었으니 낙서전은 법당겸 요사채인 셈이다.

1933년, 1977년 고쳤고 1986년 해체 복원했다. 대웅전은 일제 강점기에 고쳐 지은 자그마한 법당이었다가 1991년 중건했다.


부처님의 화신으로 지금도 이 지역에서 추앙받는 고승 진묵대사는 임재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선승이다. 진묵대사의 이름은 일옥(一玉)이며 진묵은 그의 호이다.

망해사 인근 만경이 진묵대사가 태어난 고향이다. 그래서 이곳을 불거촌(佛居村)이라 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일곱 살 때 완주 서방산 봉서사에서 출가했다.

신비스러운 기행과 이적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불경 뿐만 아니라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출가해서 내전을 읽었는데 조금도 막힘없이 줄줄 해석하였으며 한번 눈에 스치면 외우곤 하여 아무도 스승이 되어 가르칠 수 없었다.

언젠가 주지스님이 진묵스님에게 신장단의 신중들에게 향을 사르는 소임을 맡겼는데

주지스님이 “우리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장인데 도리어 부처로 하여금 우리에게 예경하고 봉향하게 하니 불안하기 이를데 없다.

그분으로 하여금 다시는 향을 사루게 하지 말아 우리를 아침 저녁으로 편히 지낼 수 있게 하라”는 꿈을 꾸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진묵대사의 화신불 설을 뒷받침하는 일화는 많다. 그 중 하나가 사냥꾼들의 이야기다.

진묵대사가 사냥꾼들이 소금이 없어서 노루고기 육회(肉膾)를 먹지 못하는 것을 알고 시자에게 소금을 보냈는데, 이 일에 감동한 사냥꾼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진묵노장이 우리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부처가 계곡마다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분을 말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사람을 살리는 부처(活人之佛)이라고 찬탄한 것이다.


진묵대사가 다시 일으켜

진묵스님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출암(전주시 우아동)에 살 때 어머니를 인근의 왜막촌에 모셨는데 모기 때문에 고통을 겪자 산령에게 부탁해

모기를 쫓아버리게 했다. 스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만경 북쪽 조앙산에 길지를 가려 장사지냈다.

그런데 그 묘역의 풀을 깎고 술과 음식을 차려 제사 지내면 그 사람의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드는 까닭에 먼 고을 사람들까지 앞을 다투어 묘소를 돌보았다 한다.

군산에서 올 때 망해사 못 미쳐 만나는 성모암(聖母庵)이 진묵대사 어머니를 모신 암자다.


임진왜란을 맞아 직접 승병을 이끌고 전쟁에 뛰어든 서산 사명대사와는 달리 그는 깊은 산에 우거하며 고고한 한 마리의 학처럼 살다가 입적했다.

수많은 스님들이 목탁 대신 칼을 들고 직접 전쟁에 뛰어들어 싸웠는데 절에서 참선하고 경전 읽으며 기도하던 진묵대사를 부처님 급으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 까?


우선 당시 이 지역 유학자들이 정변(政變)에 휘말려 거의 전멸하다시피 몰락한 국내 정치적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 조선 정국을 뒤흔드는

일대 정변이 일어나니 바로 기축옥사다. 1589(선조 22년) 10월2일 정여립이 모반했다는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고변을 시작된 피비린내 나는 사건에 연루돼

 희생된 인원만 1천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정여립을 비롯해 전북 지역 인재들이었다.

정여립은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화담학파로 붕당으로 치면 동인(東人)에 속했다. 화담학파는 불교 등 다른 종교와 학문에도 열린 자세를 갖고 받아들였다.

정여립을 선조에 천거하기도 했던 이이는 한 때 승려였으며 허균은 경전을 읽는 불자였다. 정여립도 사명대사와 친분이 두터울 정도로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그는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와 대동계를 조직해 무예를 가르치고 왜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형식에 매이지 않고 폭넓은 학식과 진취적 사상을 지닌 그의 사상이 성리학으로 조선을 통일하려는 반대 세력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호남 우도 지식인이

거의 전멸한 것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실체인 것이다. 이후 전라도는 반역향이라는 오명을 쓰고 철저하게 관직이 막혔다. 그 여파는 오늘날에 까지 이른다.

이러한 지역 분위기를 잘 아는 진묵대사가 조선 왕실을 위한 전쟁에 합류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보듬는 역할이다. 사명대사가 정부 사절단으로 일본과 담판을 벌여 끌려간 조선인을 송환받은데 반해

진묵대사는 전쟁으로 터전을 잃고 굶주리는 백성들 곁으로 갔다. 김제의 비옥한 토지는 기축옥사 이후 정권을 잡은 기호지방 사림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 여파는 소작농과 소농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학을 공부하여 관직으로 진출하는 길도 막히고, 경제기반 마저 외부에 빼앗긴 이들을

불교가 어루만졌다고 하면 과장일까?


출가 수행자이지만 진묵은 사람을 살리는데 우선했다. 살생을 꾸짖는 대신 사냥꾼에게 고기 먹을 소금을 주고, 소년들이 끓여주는 물고기를 먹지만 배설하여

다시 방생하는 신이를 보이는 모습은 수행자의 위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중생의 입장에서 함께 살아가는 보살의 삶이다.

수많은 무애행과 이적을 보이지만 대사는 밥 먹는 것도 잊고 손가락이 문짝에 찧어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능엄삼매에 빠지는 선사였다.

평생 선을 참구하고 경전을 연마한 수행자였던 것이다. 진묵대사의 이러한 모습은 사명대사의 그것과 정확하게 닮았다.

그런 점에서 당대 민중들은 자신들을 현실 지옥에서 구할 영웅을 도력 높은 고승을 통해 찾으려 했는지 모른다.


중생 생명 가장 우선시

진묵대사는 병자호란 발발 2년 전 입적했다. 대사가 어느 날 목욕하고 머리를 깎고(淨髮), 옷을 갈아입고 주장자를 끌며 문을 나섰다.
계곡을 따라 가다가 주장자를 세우고 물을 마주보면서 서서 손으로 물속의 자기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의 그림자이다”고 하니,
시자는 “이것은 화상의 그림자입니다”고 하였고, 진묵은 “너는 다만 나의 거짓된 몸(假)을 알 뿐이고 석가모니의 진신(眞)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는
마침내 주장자를 메고 방에 들어가서 다리를 포개서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제자를 불러 놓고 말했다.
“나는 입적하고자 한다. 너희들이 묻고 싶은 대로 물어라”고 하니, 제자는 “화상이 입적한 지 백 년 뒤에는 종승(宗乘)은 누구를 계승한다고 하겠습니까?”고 물었고,
 진묵은 말없이 침묵하였다가 “어떤 종승(宗乘)이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였다.
제자가 다시 가르침을 달라고 청을 하니, 진묵은 마지 못해서 말하기를 “명리를 추구하는 승려(名利僧)이긴 하지만 청허휴정(淸虛休靜)의 계보에 속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편안하게 입적하니 세속 나이 72세, 법랍은 52세다. 계유년(1632) 10월28일이다.

불교방송    글쓴이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2019. 8. 5. 16: 39

 

 

 

마을전경

 


 

 

 

 

 

 

 

 ◈찾아가는 길 =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임  ☎ (063) 543 - 3187  네비로 찍고갔습니다.

 


기차 : 용산역 = 김제역 = 시간이 잘 안맞아 힘들어요.   김제역 앞에서 역시 같은 버스를 타실 수 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5분정도 소요시간을 더 추가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