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익산 = 심곡사(深谷寺) : 백제 미륵사지의 전통을 잇는 심곡사

백련암 2013. 3. 7. 01:07

심곡사(深谷寺)

신라시대에 무염대사(無染大師)가 수도할 장소를 찾던 중 미륵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와 절을 세움으로써 심곡사(深谷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심곡사가 위치한 미륵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서동(薯童)왕자인 무왕(武王)이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세웠던 미륵사가 자리잡은 곳이기도 하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미륵산을 찾아가는 도중에 미륵삼존(彌勒三尊)을 알현하고 창건하였는데,

심곡사가 창건될 당시에도 상당한 규모의 거찰로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미륵산 일대가 미륵신앙의 도량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미륵사는 폐사되어 창건 당시의 석탑인 미륵사지석탑과 통일신라 때 세운 당간지주와 초석만 남아있지만,

창건 당시 소규모의 가람으로 출발한 심곡사는 그 법등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어 아이러니하게도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 하다.

 

심곡사의 창건과 연혁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상태이다. 다만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옛 사원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자세한 연혁은

나타나지 않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심곡사는 통일신라 문성왕(재위 839~856) 때 무염대사(無染大師)가 수도할 장소를 찾던 중 미륵산 깊은 골짜기에

사찰을 세우게 되어 ‘심곡사’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 해줄 현존 유적이나 유물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심곡사 또한 창건 이후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은 채 19세기에 접어들어 허주(虛舟)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사찰은 100여 년 전 현재의 위치에서 200~300m 떨어진 산등성이에서 빈대가 너무 많아 옮겨왔다고 한다.

 

심곡사 전경(深谷寺 전경)

 

 

칠층석탑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7층의 탑신과 옥개을 올렸으며 옥개 정상에 보주형 상륜을 안치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높다란 느낌을 준다.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탑의 기단부는 대좌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상대석과 하대석에는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가 한 매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탑신에는 우주와 탱주의 표현이 생략되었다.

경사가 완만한 옥개석은 3단의 받침을 두고 있으며, 모서리 끝이 살짝 들려 있다.


탑은 일부가 나중에 고쳐진 흔적이 있고, 기단부와 탑신부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점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의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2001년 9월 21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92호로 지정되어 있다.


심곡사는 사찰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에 무염대사(無染大師)가 수도할 장소를 찾던 중 미륵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와 절을 세움으로써

심곡사(深谷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심곡사가 위치한 미륵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서동(薯童)왕자인 무왕(武王)이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세웠던 미륵사가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익산 지역에서 석탑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심곡사칠층석탑   재질은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366㎝, 기단 높이는 116㎝, 탑신 높이는 250㎝, 1층 탑신 폭은 92㎝ 정도이다.

기단(基壇)과 탑신(塔身), 상륜부(上輪部)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기단은 사각형의 기단석에 정교한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그 솜씨가 뛰어나다.

또 탑신은 비교적 낮아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으며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도 표현하지 않았다.

1층의 받침돌 위에 7층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리고 맨 위에는 작은 연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얹었다.

옥신(屋身)과 옥개석이 1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옥개석 받침은 3개로 표현되어 있고 경사가 완만한 옥개석의 처마끝은 모서리가 살짝 들어 올려져 있다.

바닥돌 위에 있는 받침돌에는 엎어 놓은 모습의 연꽃무늬와 위를 향한 모습의 연꽃무늬가 아래위로 각각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기단부의 앙련, 복련 등은 고려시대 후기 탑의 양식이 남아있으며 옥개 받침의 약화 등 

조선시대 탑의 특징이 보여지고 있어 과도기적인 석탑 양식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범종각의 범종

 

 

석조 미륵불입상

 

 

삼성각

내부에는 칠성탱ㆍ산신탱ㆍ독성탱 등 3점의 탱화와 목조로 된 독성상 1구가 봉안되어 있다.

 

 

산신탱화

칠성탱은 근래의 작품이며, 독성탱과 산신탱은 금산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라 현재 법당에는 사진으로만 봉안하고 있다.

이 중 독성탱은 소나무 아래 법장을 들고 앉아 있는 독성(獨聖)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대웅전의 아미타후불탱 및

명부전의 지장시왕탱과 함께 1892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신탱은 화기가 없어 제작연대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독성탱과 같은 연대일 가능성이 높다.

 

 

칠성

 

 

나한

독성탱은 소나무 아래 법장을 들고 앉아 있는 독성(獨聖)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대웅전의 아미타후불탱 및

명부전의 지장시왕탱과 함께 1892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심곡사 대웅전(深谷寺 大雄殿)= 전북 문화재 자료 제 87호 

심곡사는 신라 문성왕(839~857년) 때 무염스님이 창건한 절로서 본래는 산등성이 넘어에 있었다고 한다.

이 대웅전은 조선 순조 19년(1819년)에 세웠으며, 1976년에 건물일부를 고쳐지었고, 1985년에 확장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이 대웅전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좌우에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는 나무로 조각한 삼존불상이 안치되어있다.

또한, 조선 고종 29년(1892년)에 제작한 후불 탱화 2점이 있다.

심곡사는 경내에 나무로 만든 나한상을 보관하고 있는 삼성각, 명부전, 칠층석탑 등을 갖춘 아담한 사찰이다.

 

 

목조삼존불상(木造三尊佛坐像)= 전북 문화재자료 제 152호

이 삼존불상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나무로 만든 것이다.

중앙의 아미타여래상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결가부좌하고 있는데, 사각형에 가까우면서도 평평한 얼굴, 가늘게 뜬 눈, 큰 귀 등이

돋보이며,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을 하고 있다.

오른쪽 지장보살은 머리 형태와 옷 모양새를 제외하고는 아미타여래상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왼쪽의 관음보살상은 불꽃 모양의 구슬과 꽃, 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금속제 관을 쓴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삼존불상은 모두 대형목불로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이라 하면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그 좌우의 협시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삼존불상에서는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봉안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이 널리 유행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관음보살 상

 

 

아미타여래 상

삼존불상은 양식적으로 사각형에 가까운 상호를 가지고 있으며, 통견(通絹)의 법의(法衣)와 수평적인 군의대의 표현, 오른쪽 법의자락을

왼쪽으로 여미어 넣는 표현 등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지장보살 상

 

 

신중단 탱화

 

 

칠층석탑(七層石塔)= 전북 유형문화재 제 192호

이 탑의 조성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탑의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는데, 기단부는 지대석, 면석, 갑석을 별석으로

만들었으며 지대석에 복련, 갑석에 앙련이 양각되어 있어서 조선초기 석탑의 전통이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칠층으로 옥개석과 옥신석을 1매석으로 만들고 옥개석 아래를 추녀와 같이 반전시켜 고려 탑의 흔적이 남아있다.

상륜부는 보주형태의 돌 1매로 만들었다. 이탑은 양식상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의 탑으로 판단된다.


七層石塔 出土品인 金銅佛龕및 金銅阿彌陀如來七尊坐像(칠층석탑 출토품인 금동불감및 금동여래칠존좌상) : 보물 제 1890호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은 2012년 6월 석탑의 해체 수리시, 지대석 윗면에 마련된

사각형의 홈(25.0×24.0cm, 깊이 18.0cm)에서 발견되었다.

불감은 밑판, 좌우측면판, 뒤판, 뚜껑 등이 각각 1판으로 제작되었고 문비만 2판으로 제작되었다.

뚜껑은 지붕의 네 면의 모를 죽인 녹정형(盝頂形)으로 정상에는 2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감실의 내면 중앙벽면에는 타출기법으로 아미타여래설법도를 나타내었고, 문비에는 역동적인 금강역사를 배치하였다.

7구의 불상은 불감의 앞쪽에서 아미타여래와 관음 · 대세지보살상이 발견되었고,

뒤쪽에서 2구의 여래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발견되었다.

이들 불상은 대체로 높은 육계、큼직한 연봉모양의 정상계주, 잘록한 허리와 육감적인 신체표현과 감각적인 세부 표현, 삼각형 모양으로

 仰․覆蓮(앙 · 복련)이 맞닿은 연화좌, 원반모양의 귀고리, U자형으로 두껍게 늘어진 목걸이 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이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元․明代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여말선초기 소형 금동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하는 요소이다.

7구의 불상은 2개의 양식군으로 분류되는데, 라마불상양식을 강하게 반영한 아미타여래삼존상과 이들 양식을 수용하여

어느 정도 우리식으로 변모시킨 4구의 불 · 보살상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이들 불상을 통해 여말선초기 원 ․ 명대(元․明代 ) 외래 양식의 전래와 수용 과정을 살필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며,

또한 분명한 출토지에 7구의 불상이 모두 한 불감 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지정가치가 크다.

<문화제청글과 사진 펌>

 

 

명부전

 

 

명부전 지장보살 좌상((冥府殿 地藏菩薩坐像)= 전북 유형문화재 제 191호

이 불상은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상과 주변에 위치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상(十王像),

시자, 동자상, 금강력사 등 25구의 권속을 이른다.

본존인 지장보살과 시왕상은 좌상이며 시자, 동자상, 금강력사는 입상이다.

지장보살상은 전형적인 승상의 머리에 목에는 이도가 표현되었고 법의는 통견으로 두터운 편이다.

재료는 모두 흙으로 만든 소조상으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불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아래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결가부좌한 다리를 감싸고 있다.

두 손은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오른손은 무릎에, 왼손은 오른발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두 손은 몸체와 구분하여 따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이 불상들은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1634년에 조성된 숭림사 지장보살좌상 및 권속(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

1640년에 조성된 완주 송광사 명부전 소조지장보살삼존상 및 권속(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들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장보살상의 후벽에는 지장시왕탱이 사진으로 봉안되어 있다. 원래의 불화는 현재 금산사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으며,

불화의 하단이 많이 손상되어 화기(畫記)의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그러나 그림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의 아미타후불탱ㆍ칠성탱 등과 함께 같은 화원(畫員)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 권속들(冥府殿 眷屬들)

지장보살상과 주변에 위치한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상, 시자, 동자상, 금강력사 등 25구의 권속을 이른다.

 

 

명부전 권속들(冥府殿 眷屬들)

지장보살상과 주변에 위치한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상, 시자, 동자상, 금강력사 등 25구의 권속을 이른다.

 

 

범종각


 

사적 및 신도 공덕비

 

 

부도군

부도밭은 절에서 동북쪽으로 300m 떨어진 산 정상에 모여 있던 것을 한국전쟁 뒤에 지금의 위치인 사찰 입구로 옮겼다.

모두 7기가 전하는데, 앞쪽에 4기와 뒷쪽에 3기가 있는데 정확한 연대나 부도의 주인을 알 수 없으며,

오직 1기에서만 ‘경진당(敬眞堂)’이라는 당호(堂號)를 확인할 수 있다.

 

7기의 부도들은 크기를 약간씩 달리하고 있는데, 경진당부도만 석종형(石鐘形)으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 부도들은 평평한 지대석이나 연화좌 위에 고복형의 탑신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의 옥개석을 올린 것이 기본이라 할 수 있으나,

옥개의 형식이 조금씩 틀리거나 퇴화된 양식이 보이기도 한다.

조선 후기 유물이다.

 

심곡사의 정보

 

심곡사는 미륵산 기슭의 장암마을 위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대웅전 안에는 현재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목조삼존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을 각각 모셨는데,

조신시대 양식이기는 하나 제작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외에도 삼존상 뒷면에 아미타후불탱화와 영산회상도, 지장보살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심곡사는 사찰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에 무염대사(無染大師)가 수도할 장소를 찾던 중 미륵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와

절을 세움으로써 심곡사(深谷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심곡사가 위치한 미륵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서동(薯童)왕자인 무왕(武王)이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세웠던

미륵사(미륵사지)가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 미륵산 기슭의 장암마을 위쪽에 자리한 심곡사 =

 전하는 바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문성왕(839~856) 때 창건됐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다.

그 뒤 19세기에 중건되었으며, 지금의 사찰은 100여년 전 현 위치에서 200m쯤 떨어진 산등성이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와 대웅전을 해체 중건하고 요사를 새로 짓는 등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심곡사는 동향하고 있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삼성각, 왼쪽에 명부전을 두고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칠층석탑 1기가 자리한다. 그리고 명부전 뒤쪽에 요사가 있고,

사찰에 오르는 입구에 부도전이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7호 심곡사 대웅전   

 

이전에 있던 대웅전은 1819년(순조 19)에 만든 앞면 3칸, 옆면 2칸에 맞배지붕의 겹처마를 한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헐고 지금의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크기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앞쪽의 기단은 이중 형태이며,

아래 단에 있는 석재는 잘 가공된 장대석이고, 다른 곳에서 사용하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이익공 형식이고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2분합문이 각 칸에 설치되어 있다.    

대웅전 안에는 현재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목조삼존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을 각각 모셨는데,

조선시대 양식이기는 하나 제작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외에도 삼존상 뒷면에 아미타후불탱화와 영산회상도, 지장보살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구달나 = 구름에 달가듯이 나그네 란뜻

만약에 심곡사를 찾을 일이 있으신분들은 꼭 이곳에서 차 한잔...

테블위에는 전통 다기와 찻잔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으면 전통 한방차에서 커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료를 골라 마실 수있고

어떤 분은 컵 라면도...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부어 먹는것도 보았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자유로우면서도 보이지 않는  질서, 찻값은 자율적으로 보시함에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주변을 내다 보면서 정취를 느껴보심이 어떨련지^^*

 

 

◈찾아가는 길

*주소 =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176번지 미륵산 기슭의 장암마을 위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기차를 이용할 경우 = 함열역ㆍ익산역하차하여  익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나 버스편을 이용하면 된다.

*함열역 부근에서는 거리가 다소 가까운 편이므로 택시를 타는 것도 좋으며,

*익산역 또는 익산시외버스터미널을 이용할 경우에는 터미널에서 낭산ㆍ장암마을행(30번, 60-2번) 버스을 타야 하며 배차간격은 2시간에 한 대 꼴이다.

*따뜻한 봄날에 걷기 좋으리 만큼에 거리에 있다. 가는 길 또한 정겹고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