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대신 칼을 받은 돌부처님

백련암 2008. 4. 11. 15:59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부산 백양사 선암사 벽화1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부산 백양사 선암사 벽화2

 

 

대신 칼을 받은 돌부처님 

 

법당을 세워 맨땅 위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세 돌부처님을 모시고 기도한 공덕으로, 죽을 목숨을 잇고 나라의

큰 일까지 성사시킨 영험담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초기의 정승 조반이 겪었던 이야기로,
이태조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으로부터 개국(開國) 국호를 재가받기 위해 그를 사신으로
보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원래 공민왕의 신하로 북벌(北伐)의 공을 세운 장군이었으나,
국세가 약한 틈을 타서

공민왕을 폐위시켰고 우왕 * 창왕 * 공양왕 등을 옹립하였다가 곧 폐위시킨 다음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고려로 보면 그는 역신배장(逆臣背將)이며, 
조선으로 보면 건국 태조 인것입니다.
새로운 나라 이름을 고려로 답습할 수 없었던 그는,
고향인 함흥의 함(咸)자와 강녕의 녕(寧)자를 딴 '함녕국(咸寧國)'과 

고조선의 맥을 잇겠다는 의지를 담은 '조선(朝鮮)'을 지어 택일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우리나라였으므로 국호를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명나라 태조로부터 함녕국 또는 조선이라는 명호를 재가받기 위해 건국 초부터 많은 사신을 중국에 보냈으나, 

배신 역적 이성계를 모시는 신하라는 이유 때문에 모두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후 공신들은 중국에 가기를 서로 꺼려하였습니다.

생각다 못한 이태조는 중국을 수차례 내왕하여 명태조와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정승 조반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조반은 내심 매우 난처하였으나 왕명인지라 하는 수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불교를 믿었던 조정승의 가족들은 그전부터 다니던 절에 올라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하였고,

조정승도 자신이 즐겨 읽는 <관음경>, <금강경> 등의 경전을 읽으며 일이 성취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개경을 떠난 일행은 황해도 시흥의 어느 주막집에서 죽음이 보장되어있는
여행길의 첫 밤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새웠습니다.

그런데 비몽사몽 간에 고깔을 쓰고 가사 장삼을 입은 세 사람의 사미승이 조정승 앞에 나타났습니다.


"대감,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는 대사(大事)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굳게 잡수시고 신표(信標)를 청하십시오."
"신표라니? 무슨 좋은 방도라도 있는가?"
"예. 방도가 있습니다.

이 집 뒤편의 골짜기로 5리쯤 올라가면 큰 절 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한 길이 넘는 세 분의 돌부처님이 풍우를 가리지 못한 채 서 계십니다.

대감이 절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하면 반드시 대사 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명을 받고 한시라도 빨리 명나라 태조를 만나야 할 내가 언제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신다는 말씀인가?"


"그것도 길이 있습니다.

황해도 감사에게 부탁만 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조정승은 이제 중국에 도착하면 곧 죽을 것이 틀림없는데
절을 짓는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다시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미승은 두번 세번 거듭 나타나 부처님을 모실 것을 일렀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하고 역력한 꿈이 거듭되는지라,

잠에서 깨어난 조정승은 정신을 가다듬고 집주인을 불러 물었습니다.
"이곳으로부터 5리쯤 떨어진 곳에 옛 절터가 있는가?"
"예. 세 분의 돌부처가 반쯤 흙에 묻힌 채 크게 풍상을 겪는 폐사가 있습니다."
조정승 일행은 이른 아침 그 절터로 올라갔습니다.

과연 쓰러진 절터 위에 세 분의 부처님이 가련하게 서 있었습니다.

조정승은 가람을 짓도록 황해도 감사에게 부탁하고,

부처님께 이 일을 도와 달라고 간절히 발원한 다음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중국에 도착하여 명나라 황제를 배알한 조정승 일행은 태조의 뜻을 전하고 국호를 결정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노발대발했습니다.
"이신벌군(以臣伐君)한 역적이 국토를 도둑질하고, 
다시 국호를 정해 허락을 청하다니!

어찌 하늘이 무심할 수 있느냐! 저놈을 참형에 처하라."
조정승은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물 한 그릇과 배석자리 하나면 갖다 주오."
물이 상 위에 올려지고 배석자리가 깔리자 조정승은 단정히 무릎을 꿇고
먼저 국왕이 계신 곳을 향해 절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부모에게 절을 하고 마지막으로  황해도 시흥 산중의 세 부처님께 정례했습니다.
"필히 대사를 성사하여 부처님의 가람이 이룩된 것을 친견하고 공양코자
하였으나, 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게 되었습니다.

약속을 이향치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곧이어 망나니가 칼을 들고 날뛰더니 칼로 조정승을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정승의 목은 베어지지 않고 천룡도가 두 동강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두번 세번 내리쳐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이상히 여긴 형 집행관이  명태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명태조는 크게 놀라 말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벌을 주어 미안하오.

이제 그대에게 비단 5백 필과 1천 냥을 내리고, 또 국호를 조선이라 재가 하노라."
이 말을 듣고 조정승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본국으로 돌아오던 중 황해도 시흥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그 부처님이 계신 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조정승이 부탁한 절의 낙성식이었던 것입니다.

함께 참례하고자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려던 조정승은 깜짝 놀랐습니다.

부처님의 목에 칼자국이 나 있고 피가 맺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정승은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저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3일 미시(未時:오후 3시)에
부처님을 이곳으로 모셨는데,

이상스레 칼소리가 나기에 쳐다보니 이 부처님의 목에 칼자국이 생겨 나면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른 부처님도 마찬가지인가?"
"예.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시간의 차이만 조금 있었을 뿐입니다."
"참으로 신통한 일이로다.

내가 바로 그날 그 시간에 교수대에서 칼을 받았다."
조정승은 그 길로 왕궁에 돌아와 이성계를 뵙고 이 사실을 아뢰니,
태조 역시 감격하여 크게 상을 내리고 

절 이름을 속명사(續命寺:명을 이은 절)라 지어 현판까지 써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