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방거사와 그의딸영조

백련암 2008. 4. 8. 12:19

 

금산사 십일면관세음보살

 

 

방거사와 그의딸영조


龐居士 거사의 이름은 蘊이요, 자는 道玄이니 襄陽사람으로서
아버지는 衡陽 에서 太守의 벼슬을 하였다.

잠시 성남에서 살 때 수행할 암자는 가택 서쪽에다 세우고 수년 뒤에 는 전가족이 득도하니 지금의 悟空庵이 이것이요, 

후에 암자의 아래 에 있는 옛 집을 희사하니 지금의 能仁寺가 이것이다.

 

唐나라 貞元年에 數萬마의 많은 보배를 배에 싣고 가서 洞庭湘右라는 江 中流에 모두 버렸다.

그로부터 삶은 오직 한 장의 나뭇잎 같은 생애였다.

 

거사에게는 처와 일남일녀가 있었는데 대나무 그릇을 만들어 시중에 팔아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나라 정원 년에는 선종과 율종이 크게 성하고 조사의 가르침이 서로 융성하여 그 빛은 사방에 뻗쳤으며

생활 속에 다 들어가 있었다.

 

거사는 먼저 石頭 스님에게 參學하고 지난날의 경지를 몰록 밝게 하고  馬組스님을 알현한 후에는

本 心에 계합하니 일마다 깊게 통하고  道 에 계합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妙德과 변재가 대단하고 문자의 眞詮마저 갖추어 합치하고 있었으며
그 후 각처를 찾아다니면서 지극한 이치를 겨루었다.

元和 초년에 그는 襄陽에 살면서 암굴에 보금자리를 정했다.

그때 태수인 于公적은 두루 살펴 민요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거사의 글을 읽고 더욱 흠모하는 생각이 더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몸소 나아가 알현하고 보니 옛친우와 같았다.

그리하여 정분이 깊이 계합하고 또한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거사가 入滅하려 할 때 딸 靈照에게 말하기를 

모든 것이 幻化며 無實이니 네가 하기에 따라 인연한 바이니 잠깐 나가서 해의 높이를 보고  한낮이 되거든 알려다오.
영조는 문밖에 나아가 급히 말하되  벌써 한낮인데다 日蝕입니다.
잠깐 나와서 보십시오.


거사가  설마 그럴리가  하고 말하니 
영조가  그러합니다. 라고 말했다.
거사가 일어나 창가에 갔다.
그러자 영조가 아버지가 앉았던 자리에 
올라가 가부좌하고 곧 열반에 들었다.


거사는 돌아서서 그것을 보자 웃으며 
내 딸 녀석 빨리도 앞질러 가는 구나. 하고는 나무를 베어서 다비를 하였다.
칠일이 지나서 우공이 문안을 왔다.


거사는 우공의 무릎에 손을 얹고 잠시 돌아보며 말하기를 다만 원컨대
있는 바 모두가  空하니 삼가 없는 바 모두가 있다고 말라.
잘 계시오

세상살이는 다 메아리와 그림자 같은 것이니 하고 말을 마치자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고 몸은 단정히 앉아 思索한 것 같았다.
그러자 우공은 빨리 붙들려 했으나 이미 열반에 들었었다.

 

바람은 大澤에 거칠게 불어대는데  하늘에 피리 소리는 고요히 들려 달은 희미하게 창가에 비치는데  얼굴의 화색은 변하지 않았다.
시체를 태워 강이나 호수에 버리라는 유언에 따라
陳儀事를 갖추어 如法이 茶毘에 붙이게 되었다.


한편 곧 使人을 보내어 처자에게 알리니 妻는 소식을 듣고 가로되

이 어리석은 딸과 無知한 늙은이가 알리지도 않고 가버렸으니 이 어찌 가히 참겠는가.

 

하고 아들에게 알리려 가니 화전을 일구고 있는 것을 보고 가로되 龐公과 더불어 靈照가 가 버렸다. 고 말하니

아들은 호미를 놓고 애 !  하고 조금 있다가 선 채로 열반에 드니 

母 는 말하되 어리석은 아들아 어리석음이 어찌 이다지도 한결 같은고  하고  또한 화장하니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에 그 妻는 마을의 집집을 두루 돌면서 작별을 告하고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로부터 어디로 갔는지 아는 자가 없었다.

巨士는 늘 말하되 아들이 있지만 결혼하지 않고  딸이 있어도 시집가지 않았으며  온 집안이 단란하여 無生話를 했다.

그 밖의 현묘한 말과 道를 읊은 詩頌이 세간에 전해져 있으나 자못 많이 흐트러져서

이번에 우선 듣고, 알고 있는 것만을 하나로 묶어 편집하여 길이 장래를 보아 후학에게 격려하는데 쓰여지고자 한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居士는 유마의 後身이라 하니 아마 그대로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