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암
혜암스님
◑ 우리 몸뚱이가 하늘이고 땅입니다.
단결 화합하고 어디가든 기쁘고 즐겁게 살아요.
다른 사람 애먹이지 말고. 나도 해롭고 남도 해로운 짓을 뭐하려고 합니까.
짧은 시간에 남도 도우면서 멋있게 살지,
우리가 얼마 산다고 남을 해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단결, 화합하고 즐겁게 삽시다.
남 즐겁게 해서 내가 손해날 일이 뭐 있겠습니까?
가는데 마다 그런 생각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치에 맞도록 그 법을 어기지 말고 합리적으로 삽시다.
-혜암스님
茶香淸談(차향청담) / 혜암스님
가야산 해인사로 떠나는 날은 서울에서 다른 모임에 참석하느라고 서둘렀는데도 불구하고 늦은 시간에 당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에 싸인 해인사 동구길을 오르면서, 잡목 숲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서울에서 보던 밤하늘이 아니었다. 찬란한 별의 향연이라니…
그리고 겨울산이지만 풋풋한 흙냄새가 코끝에 풍겨 왔다.
그동안 해인사는 여러번 왔었지만 이번처럼 긴장된 방문은 처음이다.
해인사의 정신적인 지주요, 오랜 세월 수행생활로 일관해 온 부방장 스님을 뵙고 대담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결제기간이 아닌가,
그래서 더구나 구중궁궐의 상감을 만나는 일만큼이나 스님을 뵙기가 어렵게 여겨진다.
혹시나, 건강상의 이유로나 또는 정진 중이라 하여, 만나주지 않는다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종내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해인사 객실에서 하룻밤을 자는 둥 마는 둥 하여, 아침 일찍 서둘러 원당암으로 연락해 보니 선원에서 스님을 찾아보란다.
선원은 입선(入禪) 시간이어서 물 밑처럼 조용하고 엄숙하였다.
방선(放禪) 시간을 기다려 스님 만나뵙기를 청하였더니,
스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대구의 어느 병원으로 출타하셨다고 전하는 시자의 말이었다.
힘이 쑥 빠졌다. 그러나 포기할 일은 아니었다. 차를 달려 병원으로 갔으나 스님은 그곳에도 계시지 않았고,
결국 스님께서 머물고 있던 어느 신도 댁을 어렵사리 찾아 가까스로 스님을 뵐 수가 있었다.
과연 선지식(善知識)을 만나기란 예사로 힘든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스님께서는 안색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하기 이를 데 없어 절로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지만 스님께서는 장장 네 시간에 걸쳐 줄곧 진지한 모습으로 말씀을 해주셨다.
스님께 대뜸 출가한 동기부터 여쭈었다.
“나는 일찍 일본에 건너가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불교 서적을 탐독했지. 그 가운데서「선관책진」이라는 책과,
일본의 유명한 선승 일휴선사(一休禪師)의 어머니가 쓴 유언서를 읽고
어떻게나 그 유언의 말씀이 간절한지 말이야. 그래서 당장 일본의 절을 찾아갔지.
그뿐 아니라,
그 전부터 내게는 화두(話頭) 비슷한 묘한 의문이 있었어. ‘눈은 왜 두개가 앞에만 있는 걸까?’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 시절의 나로서는 강한 의문이었어. 그 무렵 일본불교는 형식에 치우쳐 있어
아무래도 한국에서 출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일본 임제종의 유나(維那)로 계시던
서옹스님을 뵙고 금강경 한 권과 ‘참선을 하라’는 말씀을 얻은 뒤에 다시 한국으로 왔지. 그때 내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였어.”
그런데, 스님의 출가의 길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 첫째가 부모님의 결혼 간청이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던 스님은 두번씩이나 선을 봤지만,
남의 처녀한테 못할 짓 하는 것 같아,
세번째 혼담이 나왔을 때에는 출가의 뜻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모님은 결혼한 뒤에 출가하면 안 되겠느냐고
더욱 간절히 부탁하시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어 ‘비구 스님에게라도 시집올 여자가 있다면 결혼하겠다’고 스님은 답했다.
이 말에 두 어른은 며느리감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백양사 근처의 어느 비구니 절의 노스님이
‘스님과 결혼할 처녀가 있다’고 한 농담을 듣고서 아들을 데리고 그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스님이 해인사로 출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부처님의 인연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 노스님을 만난 혜암스님은 ‘부모 위로하고 나 갈 길 가면서 남의 처녀 망치지 않으려다 보니 일이 이리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도 닦기에 가장 좋은 곳이 어디입니까’하고 물었고, 그 노스님은 망설임 없이 ‘해인사’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음력 3월 11일 가야총림 해인사로 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는 길로 쉽게 출가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일본식으로‘하이칼라’를 한 겉모양 때문인지, 공사를 세번이나 했으나 ‘중노릇 할 위인’이 못 된다는 이유로
해인사에서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위인전 등을 두루 읽은 터에다 도를 닦겠다는
눈도 깜짝 않고 ‘아하, 나를 시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또 ‘지성이면 감천’임을 믿고,
나뭇간이며 부엌 같은 한데서 자고 하루에 한끼만 먹으면서 불 때고, 물 긷고, 밥을 하면서 한 주일쯤 넘게 실랑이를 했단다.
그러던 중에 일본에서 인연을 얻은 서옹스님을 다시 만나 은사스님이신 인곡스님께 소개되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출가하고서 맨처음에 한 것은 공양주 직분이었다.
가던 날부터 거의 잠도 못 자며 불구를 날마다 닦고, 밥을 잘 짓고 양도 잘 맞추니
쌀 곡간의 열죄를 받아 미감의 일까지 다 보게 되었다.
또 신발도 손수 지어 신고 옷도 새옷은 입지 않으면서, 행자가 밤 새워 공부하고 말도 없으니,
주위에서 ‘문수 관세음보살 화신이 나타나 가야총림을 도우러 왔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이렇게 고된 행자생활을 하던 어느날, 주걱으로 밥을 푸다가 문득 ‘나는 도를 닦으러 왔는데,
딴 스님들 공양 준비만 해주다 시간을 다 흘려보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옆의 스님한테 ‘내가 배가 아프니
어렴풋이 백련암 뒤에 옛적에 환적스님이 공부하던 ‘환적굴’이 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 무조건 찾아나선 것이다.
그 때에 스님은 ‘일주일만에 꼭 도를 깨치겠으며, 그러지 못할 때는 죽어도 좋다’는
결심을 종이에 쓰고 먹을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아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환적굴을 찾지 못하고 대신에 다른 새로운 굴에서 돌멩이 여덟 개를 구하여
‘깨달음의 공부’에 들어갔다.
하루가 지나면 돌맹이 한 개를 옮겼으니 여덟 개 모두를 옮기면 꼭 만 칠일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돌맹이 둘을 남겨놓고는 ‘화두 선택이 잘못되었으면 큰일이다’라는 망상이 들어 그만 굴을 나오고 말았다.
(스님의 평생 화두는 그 시절 가야총림의 방장 효봉스님이 주신‘無’이다.)
굴 속에서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육일을 지내고 나니, 귀가 바글바글 울리고 손발의 마디가 빡빡하더라고 했다.
효봉스님께서는 겉으로는 ‘공부를 그렇게 하면 되느냐’고 야단치셨으나, 이 일에 속으로는 꽤 흐뭇해하셨고,
혜암스님의 간청을 받아들여 보통 정진실과 구분되어 용맹정진을 하는 가행 정진실에 들여보내 주었다.
대중공사에서 이제 갓 들어온 신참에게 가행 정진실의 퇴설당은 불가하다고 의견이 분분했으나,
효봉스님은 공부하는 데 구참, 신참이 따로 있느냐고 일축해 버리셨다.
스님이 출가하여 처음 공부하던 때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계속된다.
스무살이 채 되기 전부터 삶의 이치에 의문을 품고 구도에 대한 열정을 다져왔던 바,
스님은 출가 뒤부터는 참선이 아닌 어떤 다른 길도 쳐다보지 않으며 오로지 일생을 선방 수좌로서만 살아왔다.
스님의 이러한 외골수 기질을 일찍부터 간파한 은사 인곡선사께서는 초창기에는 스님더러 경을 공부할 것을 권하셨다.
그러나 혜암스님은 “사람의 죽음은 알 수가 없는데, 제가 공부(참선)도 다 못하고 스님보다 먼저 죽었을 때 스님 원력으로
다시 경을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경을 먼저 공부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은사 스님의 권유를 따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혹 타락할지도 모르는데 글을 배우면
범어사에서의 스님 행적을 듣고는 내심 안심하여, 그 뒤로는 경을 공부하라는 말씀을 더 이상 하지 않으셨다.
그게 무슨 일인고 하니,
그 때에 범어사에서는 역경원장 운허스님이 능엄경을 강의하고 있었던 바, 워낙 명강의인지라 그 시간이면 선방의 입승까지도 죄다
그 강의를 들으러 가는 바람에, 선방에는 오직 혜암스님 한 분만 남아 있곤 하였다.
결국 안거 기간이 끝나자,
그 곳 동산선사는 외길로 제 길을 지킨 혜암스님 한 분에게만 안거증을 내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님의 꼿꼿한 외길 정진은 ‘사십년 장좌불와’에서 더욱 사람을 경탄하게 한다.
이는 일반의 사람은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로, 출가할 때부터 시작한 장좌불와를 스님은 몇 해 전에 의사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그만둘 때까지 사십여 년을 계속하신 것이다.
스님이 이토록 오랜 세월을 장좌불와하게 된 동기는,
맨처음부터 그리 했듯이 ‘일주일만에 도를 깨우치겠다’고 마음 먹고 한 주일 공부하고는,
다시 마음 먹고 다음 한 주일을 새로 시작하고 하다 보니, 어느새 사십년을 계속하여 장좌불와를 하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범인에게는 ‘누워서 자는’평상의 모습이 스님에게는 ‘눕는 공부’가 되어, 오히려 애를 많이 써야 했다며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즉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걸림 없는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것을, 오랜 장좌불와와 선방
생활에서 터득하셨다고 한다.
스님은 원당암에 계시면서 이러한 장좌불와의 정신을 십년째 재가불자를 상대로 가르쳐 오고 있다.
근대의 선지식 가운데 혜암스님의 은사이신 인곡스님의 행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기에, 스님께 여쭈었다.
“우리 스님은 열네살 어린 나이로 백양사 운무암에 동진 출가하셨지. 선과 율과 경에 두루 해박한 분이셨어.
효봉스님과는 둘도 없는 도반이셨고. 많은 일화가 있지만, 특히 임종하실 때의 이야기가 잊을 수 없어.
스님께서는 칠월 보름 전날에, 즉 해제 하루 전에, 효봉스님의 상좌를 불러 ‘나 오늘 갈란다’하셨어.
그러자 그 시자가 ‘스님 오늘 가시면 안 됩니다. 좋은 날 가십시오’라고 했겠지.
그래, 스님께서 ‘도 닦는 사람이 무슨 좋고 나쁜 날이 있겠는가’하니, 그 상좌스님 하는 말이 ‘스님, 오늘 가시면
해제 준비랑 가사불사에다 또 스님 장례 준비를 하자면, 대중이 얼마나 바쁘겠습니까?’하는 거였어.
그 말에 인곡스님은 ‘그렇다면, 내가 한번 생각해 보지’ 하셨지. 내가 곧바로 자운스님을 찾아가서 이 말을 전했더니,
대중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거였어. 왜냐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고서 돌아가시지 않으면
오히려 망신스럽다는 거지.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대중에게 알렸고,
다음날 대중들이 마당에 꽉 찬 가운데 인곡스님은 마지막 임종의 말씀을 하셨지.
‘일심(一心)이 불생(不生)하면 만법(萬法)이 무구(無垢)니라’는 법문으로,
한 생각이 나지 않으면 모든 법이 허물이 없다는 말씀이었어.”
혜암스님께서 수도생활을 하시는 중에 억울한 일은 없으셨을까, 있었으면 어떤 일일까, 궁금하였다.
스님께서는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설사 남이 당신을 해꼬지하려 들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하여도
조금도 마음에 동함이 없으며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신다.
부처님 말씀하신 대로,
어떠한 애매한 경우에도 까닭은 있기 마련이라고,
그나마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면 전생의 빚이거니 하고 생각하신단다.
한 예를 들자면, 오대산 상원사에서 점심공양을 하던 중에 느닷없이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매맞은 일이 있었다.
이유를 모르고 맞으면서도 아픈 줄을 몰랐고,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이 밝혀졌을 때에도 결코
이는 결코 가식이 아니요, 스님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듯이,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부처님 말씀에 따라서 사는’ 까닭에 가능한 일이리라.
“가없는 세상에 나고 죽고 또 나고 죽는 육도윤회 속에서, 부모형제 잡아먹고 다녔으나
사람 몸으로 태어나고,
사람 몸보다 더 만나기 어려운 바른 법 만나려고 애쓰는 사람이 되었으니, 나는 이대로 만족한다.
그러하니, 언제나 극락세계라네”하시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남을 미워하지 않고 늘 천진함으로 사시는 힘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을 두루 다녀보시던 중에 다시 가고 싶은 곳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태백산 각화사의 암자 동암(東庵)이라고 하신다.
동암은 적멸보궁이 있는 정암 갈래사 및 도솔암과 더불어, 태백산의 삼보 사찰에 든다.
그런데 이 동암은 옛날에는 호랑이가 나타나곤 하여 사람들이 무서워서 잘 가지도 못하던 곳이란다.
하지만 혜암스님께서는 호량이를 한번 타보고 싶어 일부러 호랑이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호랑이가 오히려 먼저 달아나고 말아 못내 아쉬웠다고 하신다.
스님의 생각과 생활에는 낙관적인 태도가 늘 바탕에 깔려 있는 듯하다. 더러 황당하고 무모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스님에게로 가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과연 스님은 타고난 선객인 성싶다.
오랜 운수납자 생활을 이어온 스님은 “공부(참선)는 오래 하고 있는 것보다 일도양단해서 간절히 할 때에
힘을 얻고 덕을 보는 것이지 그저 오래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라고 일갈하신다.
또, 안처비상(安處砒霜)이라고, 요즘처럼 의식주가 너무 풍족하고 환경이 이리 자유스럽고
어디 발심하기가 쉽겠느냐고 한탄하신 뒤에 ‘대웅전은 절이 아니라 골동품 관람사로 간판을 바꾸어야 할 판’
이라며 사찰의 국립공원 지정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신다.
비록 산중에서 거의 내려오는 법이 없으신 스님이지만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짐작하시고 있었다.
얼마전 종립 동국대의 총장, 이사장 스님들이 구속되었을 때,
혜암스님은 당신이 의장으로 있는 해인총림 임회를 열고 규탄대회를 열 것을 결정하신 바 있다.
스님은 그 규탄대회가 다만 지관스님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불교를 이리 멸시하고 탄압하므로 마땅히 불교 대중이 일어나 해명을 받아내든지
사태를 중지시키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신다.
“명분이 있는 일이거든 사람이 죽더라도 그 일을 할 일이요 그렇지 못하면 모든 스님을 죽이는 꼴이 된다”는 말씀이셨다.
혜암스님은 해인사 선원의 대중선원 바로 곁에 있는 부방장실에 거주하시면서,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해인사 선원의 규칙에 따라 다른 대중과 똑같이 수행하시고 있다.
삼개월 전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그곳 조동종, 임제동 종정들과 친분을 나누었는데, 그들이 새해에 답방할 예정이라
벌써 그들에게 선물로 줄 도자기에 친필로 글씨를 써놓았다고 즐거워하시는 모습에서
스님의 천진한 성품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을 여쭈니,
‘수행자에게는 자기 본분을 잘 지켜 여법하게 실천할 것과 단결’을 특별히 강조하신다.
지면이 좁아 스님이 오랜 시간 동안 말씀해 주신
그 귀한 이야기들을 다 옮기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오늘도 무(無)자 화두를 들고 법보종찰 해인사를 지키고 계시는
스님을 향하여 삼배를 올리면서 아쉽게 필(筆)을 놓는다.
글/유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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