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불교의 근본사상] 영원한 진리(3)

백련암 2009. 9. 1. 03:05

중도(中道)의 여러가지 표현


현수(賢首)대사가 화엄종을 크게 일으켜 오교장(五敎章)이란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화엄종의 개종선언서(開宗宣言書)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정념(情念)을 버리니 정리(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정리(正理)를 따르니 정념(情念)이 스스로 없어진다.

(反情에 理自現이요 據理에 情自亡이니라)
일체 차별 망견(妄見)을 버리니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일체 차별 망견을 버린다함은 모든 일체 양면을 다버리는 쌍차(?遮)를 말하며

중도의 근본원리인 정리(正理)가 나타난다함은

모든 양변을 버려서 모든 양변이 융합하여 중도원리가 드러난다는

쌍조(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리(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함은

모든 것을 융합하는 쌍조(照)의 중도원리에서 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쌍차(遮), 양변을 버리고 나니

쌍조(照), 양변이 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쌍조(照)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니

쌍차(遮)양변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묘한 표현입니다.

앞에서 말한 “정념을 버린다”함을 차(選), 막는다 버린다 이며

“정리를 따른다”함을 표(表), 들어난다, 융합한다고 하여 화엄종에서는

차(選)와 표(表)를 가지고 중도(中道)를 많이 표현합니다.

차(避)란 쌍차(遮)를, 표(表)란 쌍조(照)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쉽게 표현하자면 구름이 흩어졌다 하면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며

해가 드러났다 하면 구름이 흩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망견을 다 버리고 나면 자연히

쌍조(照)의 바른 이치가 드러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바른 이치가 드러나면

양변의 일체 망견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쌍조(照)란 말이 본래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영락경(瓔珞經)에서 나오며 부처님께서 자세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을 천태종의 지자(智者)대사가 중도를 표현하는 용어로서 그대로 인용해 썼습니다.

그 뒤 화엄종의 현수(賢首)대사가 같은 중도원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쌍차쌍조를 그대로 쓰려고 하니 지자대사를 추종하는 것 같아서

쌍차쌍조란 말 대신에 쌍민쌍존(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또 어디서 연유되느냐 하면

쌍비쌍역(亦)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불성을 얘기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


불성(佛性)은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완전히 떠나면 역유역무(亦有亦無)이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므로 중도(中道)라 하는 것입니다.
(佛性은 非有非無며 亦有亦無니 有無合故로 名爲中道니라)
비유비무는 서로 모순 상극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으로써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서로 고집해 있으므로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 통하지 않고 고집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쌍차가 되어서

비유비무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가 되면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합하는, 서로 통하는 역유역무의 쌍조가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쌍비쌍역이라고 합니다.

양쪽을 다 버리고 양쪽이 다 살아나는 것이니 쌍비는 부정이고

쌍역은 긍정입니다.

부정을 하고, 철저하게 부정하면 영(零), 공(空)에 떨어져 버리지 않느냐고

의심들을 하거나 부정만 한다보면 아무 것도 없는 허무로 나가는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을 참으로 바로 알 것 같으면 대긍정(大肯定)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온 누리를 비추듯이 철저하게 부정해가면

대긍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쌍비쌍역이라 하며 그것이 중도원리입니다.

이렇게 중도원리를 쌍차쌍조, 쌍비쌍역, 쌍민쌍존으로 설명하여도 이해하기 곤란하다면,

이를 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진공(眞空)이란 양변을 완전히 버린 쌍차(遮), 쌍민(泯), 쌍비(非)입니다.

이 진공이란 공(空)과 유(有)가 상대적인 공이 아닌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린다고 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면 낙공외도(落空外道),

즉 공에 떨어진 외도가 되고마니 그것도 변견입니다.

그러한 단멸공이 아닌 진공이 되면 상대적인 공과 유를 떠난 묘유(妙有)가 됩니다.

묘유(妙有)란, 상대적인 공과 유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공은 공

유는 유로 대립하여 통하지 아니하지마는 그러한 상대적인 공과 유를 버리고나니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인 공과 유가 서로 통하여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郞是空 空郞是色)의 묘유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쌍조(照), 쌍존(存), 쌍역(亦)입니다.

대부정(大否定)하여 대긍정(大肯定)이 된다 하니

그 긍정을 차별적인 긍정으로 알면 안됩니다.

이것은 묘한 있음(妙有)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고

공과 있음이 서로 통하고 선(善)과 악(惡)이 서로 통하고

마군이와 부처가 서로 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공이 쌍차이며 묘한 있음이 쌍조이니,

진공묘유를 바로 알 것 같으면 공과 있음이 서로 융통하여

진공하면 묘유요 묘유하면 진공이며,

진공 내놓고 따로 묘유 없으며 묘유 내놓고 따로 진공 없으니

이것을 차조동시(遮照同時)라 합니다.

쌍차가 즉 쌍조요 쌍조가 즉 쌍차이며 쌍차하고 쌍조해서

차조동시가 되는 것이 중도의 근본 공식입니다.

이렇게 중도에 대한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꼭 같은 것입니다.


9. 임제 (臨濟)선사의 중도사상


오가철종(五家七宗)의 선종 종파 가운데서도 임제종을 제일로 하는데

그 개조(開組)인 임제스님은 중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승이 임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참다운 부처이며 참다운 法이며 참다운 道인지 대답해 주시기를 바람니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함이요 법이란 마음이 광명함이요

   도란 곳곳에서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다」

임제대사가 불승(佛法僧) 삼보를 설명하기를 마음이 청정함이 부처요,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 법이요,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 도, 즉 승이라

하였습이니다.
(如何是眞佛眞法眞道乞垂聞示하소서. 師元 佛者心淸淨是오 法者心光明是오

道者는 處處無 淨光是이로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일체 차별 망견을 다 버리는 것을 말하니,

쌍차로써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란 망상의 구름이 다 걷히면 거기에 무한한 광명이 비칠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쌍조입니다.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은 청정할 때 광명이 나타나고 광명이 나타날 때

청정하여 청정과 광명이 서로 둘이 아님을 말하니 차조동시(遮照同時)입니다.

도(道)란 승(僧)을 말하니 승이란 본래 화합(和合)을 뜻하니

서로서로 합심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을 말하지만 근본은 청정과 광명이 걸림없음을

증득한 사람만이 승이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중도를 깨치지 못하면 승이 아니니 모든 차별변견에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선종에서도 표현은 다르지만 육조스님의 유촉하신 바대로 중도에 입각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임제스님이 설하신 근본적인 가풍(家風)으로 취급되는 사료간(四料揀)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고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有時엔 賽A不賽境이오 有時엔 葉境不幕A이오 有時엔 有時엔 A境傷풀이오 有時엔

  A境없不훌이니라)


위에서 표현을 달리하면 사람은 주관으로, 경계는 객관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주관을 버리고 객관은 버리지 않고,

어떤 때는 객관은 버리고 주관은 버리지 않는다,

어찌하기 위해서 그러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면 또 어찌 되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지 않는다,

즉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완전히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는다는 것은 쌍차이며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쌍조이니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융합 자재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임제스님의 사료간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설명하려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진실로 사료간의 법을 호호탕탕하게 쓰려면

중도사상을 알아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깨쳐 중도실상(中道相)을 알아야만 사료간을 알 수 있고

임제정법을 알 수 있고, 거기서 봉(棒)도 쓸 수 있고 할(喝)도 할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변견에 떨어져 집착하게 되면 임제스님과는 영원히 등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중도사상은 경전의 교학에서 뿐만 아니라 선종에서도 분명하게

중도원리를 천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도를 터득키 위해서는 마음을 깨쳐야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쌍차쌍조(照)하고 차조동시(遮照同時) 하는 이 중도원리는

어느 종교나 어느 철학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입장이니만큼

선과 교를 통해서 남전(南)북전(北)할 것 없이 불교의 근본진리는 중도원리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명심하여야겠습니다.

좀 쉽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얼마나 이해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이 중도원리를 깨쳐야만 이해해야만 진실한 불교도인 만큼 열심히 정진합시다.


임제대사가 불승(佛法僧) 삼보를 설명하기를 마음이 청정함이 부처요,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 법이요,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 도, 즉 승이라

하였습니다.

 

가전연경(迦전延經)의 정견(正見)


가전연경이란 근본불교에서 가장 핵심되는 경입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정등각(正等覺)한 내용, 즉 중도(中道)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가전연경에 대해서 논의가 많았습니다.

그런 만큼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고 또 중도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면

이 가전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가전연이란 부처님 신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논의제일(論議第一)이었던 가전연존자를 말합니다.

아주 의논을 잘하고 논의에 밝은 분이었습니다.

어느날 가전연이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대덕(大德0이시여 정견(正見)을 갖추어야 한다,

   정견을 갖추어야 한다 하시니 정견이란 어떤 것입니까?」


모든 세간의 학문이나 종교는 무엇이 있다(有)든가 무엇이 없다(無)든가 하는,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의두 가지 견해에 떨어져 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상대적인 대상에서 가장 기본되는 견해가 유·무라는 견해이니

이 상대적인 유·무가 완전히 해결되면 그밖의 모든 상대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와 무를 대표로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고(苦)와 낙(樂)을 가지고 말씀하셨지만 그때는 오비구(五比丘)가

고행(苦行)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고와 낙을 말씀하셨던 것이고

이 가전연경에서 정견(正見)이라는 근본문제를 가지고 깊게 설명함에 있어서

일체 세계의 대표적인 상대인 유와 무를 들은 것입니다.
변견(邊見)이란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이라는 뜻입니다.

「가전연아, 정혜(正慧)로써 여실(如실)히 세간의 집(集)을 관(觀) [正觀生]

하는 자(者)에게는 이 세간에 무인 것이 없다.

[非無] 가전연아, 정혜로써 여실히 세간의 멸(滅)을 하는 자에게는

이 세간에 유인 것이 없다.[非有]」

남전대장경 제13권 상응부경 가전연경

(南傳大藏經 第十三卷 相應部경 迦전延經)
집(集)이란 4성제(四聖제)의 집제(集제)이니,

집제란 연기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법(緣起法)에도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순관으로 연기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모든 것이 일어난다,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생겨나 살아가고 있고,

있음으로 하여 결국 존재해 있음을 말하니 이러한 현상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세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여 보았자 통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책상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세상 모든 것이 없다는 견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생(生)하는 법을 바로 본다(正觀生)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존재해 있고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있는 것을 바로 보면 없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없음이 아닌(非無) 것입니다.
멸(滅)이란 사성제(四聖제)의 멸제(滅제)이니 멸제란 역관(逆觀)으로
연멸법(緣滅法)을

이르는 말이니 설명하자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것으로써 책상도 나무가 썩어 버리면 없어지고

너도, 나도 촛불도 시간과 공간이 다하면 없어지기 마련이며

그러므로 모든 것은 또 다른 한편에서 관찰해 보면 소멸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없어지는(滅) 법을 바로 본다.(正觀滅)는 것이며 이런 견해로 세상을 보면

모든 존재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내가 없는 것을 바라보면 있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있다는 것이 아닌(非有)것이 됩니다.

따라서 없는 것이 아닌 있다는 견해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없어지는 것을 보고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고

다시 모든 것이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러니 유견(有見)측에서는 무견(無見)이 틀리고 무견 측에서는 유견이 틀리는 것입니다.

「가전연아, 이 세간은 다분히 방편(方便)에 취착(取着)하며 계교(計較)하며 사로잡히(囚)나니

성제자(聖弟子)는 이 마음의 의처(依處)에 취착하며 계편(計便)되어서

「나의 나」라고 사로잡히지 않으며 착(着)하지 않으며 머물지(住) 않고[囚有消滅],

고(苦)가 생(生)하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定觀亦生亦觀]

혹(惑)하지 않으며 의심(疑心)하지 않으며 타(他)에 연(緣)하는 바 없이

이에 지(智)가 생(生)하나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하는 변견에 집착하느냐

하면 그것은 사리분별 때문입니다.

아(我) 주관과 아소(我所), 객관등의 모양에 사로잡혀 사량분별하는 이것을 여기서는

방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이 생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사리분별에 의한 집착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제자, 즉 부처님의 제자는 사량분별에 의한 집착심을 버리고 모든 분별심,

생멸심을 떠나버리며 결국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닌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하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바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냥 고가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는 것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세간에서 보는 것은 분별심으로 보는 것이고 부처님의 제자는 분별심을 떠나서 보기 때문에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집착하고 계사하는 마음을 버리고 사로 잡히거나 머물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무주심(無住心), 무분별심(無分別心)에서 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변견은 분별심이 근본이 되어 있고 부처님 제자의 정견은 무분별심

근본이 되고 있는 것이니 불생불멸의 경지에서 생멸을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는 모든 분별에 사로 잡히거나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은

쌍차(雙遮)를 말하며 고(苦)의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쌍조(雙照)이니

이것이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定觀亦生亦滅)는 것입니다.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는 것은 변견이 아니며 생멸견해가 아닙니다.
생멸적인 변견은 바로 삼차원의 세계에서 보는 관점이고 생멸을 떠나서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을 묘유(妙有), 즉 사차원의 세계에서 보는 견해로서 절대적인 견해입니다.
앞의 말씀을 잘 구별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집착을 떠난다고 하고서 결국은 또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본다고 했으니,

이 생멸은 보통 생멸의 생멸이 아닌가 하고 오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생멸의 생멸이 아니고

불생불멸의 생멸, 즉 집착하지도 머물지도 아니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으니

여기서 말하는 생멸이라는 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멸,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의 생멸입니다.

생멸의 생멸이 아니라 쌍차에 의지한 쌍조의 생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마음의 의지처, 즉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머물지도 아니한다고

부정하였으므로 그것은 모든 생멸을 부정한 것입니다.

모든 생멸을 부정하고 나니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분별심이 없이 이에 지혜가 생한다는 긍정이 나옵니다.

긍정은 심광명(心光明)을 말하는 것입니다.

분별심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머물지 아니하면 심청정(心靑淨)이며 진공이며 쌍차입니다.

심청정하여 생멸을 바로보면 심광명이고 모유이며 쌍조입니다.

그러므로 생함과 멸함을 바로 보아서(定觀亦生亦滅) 진공묘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혹(惑)하지 아니하며 의심(疑心)하지 아니하며 타에 의지하는 바 없이

이에 지(智)가 생하니 이것이 정관(正觀)이다」하는 것은

부처에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조사에도 의지하지 아니하는 머물음이 없는 마음,

무주심(無住心)에서 진실의 지혜가 나타나는데 이 지혜를 정견(正見)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무주심이란 진여심, 반야심을 말하니 의지함이 없는 완전한 진공이 즉 진여심이니,

의지함이 없는 진여반야에서 지혜가 생하니 이것이 정견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견의 내용은 모두 집착심, 생멸심을 다 버리고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이니

쌍차하여 쌍조한 것이며 진공묘유이며, 청정심을 얻으며 심광명이 바로 현전함을 말합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이 아직 완전한 연결을 못시키고 있습니다.
중도라 하여 양변을 여읜다, 쌍차한다 하는 부정의 면은 보통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데

다시 양변을 살린다, 쌍조한다는 부정한 후에 다시 그것을 긍정하는 이것을

지금도 학자들이 잘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일본에서 좀 많이 연구했다는 학자들의 책을 봐도 양변을 여읜다는,

쌍차라는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드러나 있으나 그걸 가지고 증거를 대는데 있어 부정한 후

그것을 다시 긍정하는 면에 대해서는 즉 양변을 살리다,

쌍조한다는데 대해서는 부처님의 밀의(密意)로서 은밀히 말했다고만 말하고

확실한 증거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만치 이것이 어려운 대목입니다.


밀의로써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쌍차, 부정(否定)하신 후에 다시
분명하게

「고(苦)가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타(他)에 의(依)하는 바 없이 이에 지(智)가 생하나니

이것이 정관이다」라고 쌍조, 다시 분명히 긍정하여 말씀하셨는데 무엇이 밀의로서

은밀하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가전연아, '일체는 있다(有)'라고 한다. 이것은 첫 번째 극단이니라.

'일체는 없다(無)'라고 한다. 이것은 두 번째 극단이니라.[ 見]

가전연아, 여래는 이 양단(兩端)을 떠나서 [離見]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하나니라」
[非有非無, 亦有亦無, 亦生亦滅]
모든 것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하나의 극단이라는 것이다.

또 모든 것이 없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어서 영원성이 없어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제 2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존재에 영원성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양 극단을 떠나서 중도에 의하여

법을 설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즉 비유비무(非有非無)며 역유역무(亦有亦無)이며,

               역유역무가 역생역멸(亦生亦滅)입니다.

앞 구절에

「마음의 의처에 취착하지 아니하고 계사되지 않아서 거기에 머물지도 아니한다」고 한 것은

양극단을 여윈 것이니 이것은 진공이요 쌍차입니다.

그리하여 「고(苦)가 생기면 생한다고 보고 고가 멸하면 멸한다고 본다」는 것이니

이것은 묘유이며 쌍조이니 비유비무이면서 역유역무가 되는 것입니다.

생(生)이 즉 유(有)이며 멸(滅)이 즉 무(無)입니다.
여래(如來)가 정등각(正等覺)하고 법을 설하는 것은 중도이니,

중도는 모든 양 극단을 떠나서 양 극단이 서로 통하며 융합하는 것입니다.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있으며 행에 연하여 식(識)이 있나니라[亦生亦有]

이러한 것이 전고온(全苦蘊)의 집(集)[非無]이니라.

무명의 멸에 의(衣)하여 행(行)의 멸이 있고, 행이 멸하는 고로 식의 멸이 있나니라.

[亦滅亦無] 이러한 것이 전고온의 멸이니라.」
처음엔 12연기(十二緣起)의 순관(順觀)을 듣고 끝에가서 전체를 들어
전고온의 집(集)이라고

하시니 이것은 사성제(四聖諦)의 집제(集諦)입니다.

앞에서 집제를 바로보는 사람은 없다는 견해가 없다고 했으니 없는 것이 아니다(非無)는 것입니다.

비무는 즉 또한 있다(亦有)는 말이니, 생(生)을 바로 본다(亦生)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 이해가 바로 서야 합니다.

집(集)을 바로 보는 사람은 없다는 견해(無見)가 없다 하니 없다는 것이 없다(非無)는 것입니다.

집을 바로보는 사람은 생을 바로 보는 사람이니, 그것은 또한 생함(亦生)이니,

그러므로 없다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내용적으로는 또한 있음이 됩니다.

생을 바로 보는 것을 집(集)을 바로 보는 것이므로 그것이 없다는 것이 없다(非無)는 것이므로

한가지 말 속에 두가지 뜻을 표현하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어째서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하는 변견에 집착하느냐 하면 그것은 사량분별 때문입니다.

아(我) 주관과 아소(我所). 모든 것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존재에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변견이니 하나의 극단이라는 것입니다.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