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지 않고 여의지 않는 영원한 진리(1)
6.불교 최고 원리는 중도(中道)
1) 교학(敎字)에서 중도(中道)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그 교리 내용이 복잡다단합니다.
다른 종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간단하지만 불교의 소의경전은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방대한 전적이 있읍니다.
그 속에서 무슨 말씀을 주로 하셨는지 또 어떤 때는 이런 방편을 어떤 때는 저런 방편을 말씀하셔서 얼핏 보면 서로서로 모순도 있는 것 같고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하신 말씀 전체를 체계화하고 가치적으로 배열하여 자기 종파(宗派)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는데
과학적으로 이것을 교판(敎判)이라고 합니다.
교판은 교상판석(敎相判釋)으로서 간단하게 판석이라고도 하며 판(判)은 부판(部判), 쪼개어 판단한다는 뜻이며 석(釋)은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불교의 이론체계를 교학적으로 정리하여 교판(敎判)을 가장 잘 세운 이가 바로 천태종의 지자대사와 화엄종의 현수대사 입니다.
지자대사는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을 오시팔교(五時八敎)로 분류하여 해석했읍니다.
오시란 부처님 일생 동안의 설법을 다섯 시기로 나눈 젓이니,
첫째는 화엄시(華嚴時)로서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하시고
둘째는 녹야원시(麗野苑時)로서 21일간 화엄경을 설하시고 교진여 등 다섯 비구들을 위해 소승교를 설하셨읍니다.
이후 12년간 주로 소승교만을 설하셨으며 이 때의 설법을 결집한 것이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하여 이 시기를 아함시(阿含時)라고도 합니다.
세째는 방등시(方等時)로서 대소승의 법을 함께 설하여 영리한 근기(根機)나 둔한 근기나 간에 고르게 이익을 주는 시기를 말합니다.
유마경·사익경·능가경·능엄삼매경·금강명경·승만경 등을 설한 년간을 말합니다.
네째 반야시(般若時)란 방등시(方等時) 후 22년간 모든 반야경을 설법하신
다섯째는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로서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시기를 말합니다.
법화경은 8년간의 설법이며 열반경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최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설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오시(五時)의 가르침을 합산해 보면 50년이 되는데 지자대사는 부처님께서 29세에 성도하시고 79세에 열반하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팔교란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의 방식을 달리하였으므로 그 교화 방법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니 합의사교(化儀四敎) 즉
돈교(頓敎), 절교(漸敎), 비밀교(秘密敎), 부정교(不定敎)이고,
부처님이 설한 설법의 내용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누니, 화법사교(化法四敎) 즉,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를 합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화법사교에 대해서 잠깐 설명할까 합니다.
장교란 경장·율장·논장의 삼장에 의해서 세운 교법으로서 소승자리교(小乘自利敎)을 말합니다. 즉, 아함경·5부율·바사론·구사론 등의 교학입니다.
통교란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의 삼승에 공통하고 삼승이 함께 받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별교(別敎)란 이승과 함께 할 수 없는 보살승의 수행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별교는 격력(隔歷)의 입장에서 설명한 교리이며 원융무애(圓融無愛)의 입장에서 설명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원교와는 틀립니다.
원교란 격력이 아닌 사(事)와 이(理)가 원융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설명하므로 대승 가운데 최고로 깊은 가르침을 말합니다.
현수대사는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을 오교로 분류하여 해석했읍니다.
오교란 첫째 소승교 둘째 대승시교, 세째 대승종교, 네째 돈교(頓敎), 다섯째 원교(圓敎)입니다.
이들의 대강만을 간추려 설명해 보겠읍니다.
소승교란 아함경·바사론·구사론 등의 말씀으로서 우법소승이라고도 합니다.
우법이란 대승보다 못하다는 뜻이니 소승의 인아(人我)가 공함은 법아(法我)의 공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승시교란 대승초문의 가르침이기에 시교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또 상시교(相始敎)와 공시교(空始敎)가 있읍니다.
상시교는 혜심밀경·유가론·유식론 등의 사와 이가 격력하고 오생각별로써 일체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공시교는 반야경·중론·백론·십이문론 등의 일체의 모든 것은 공(空)이라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대승종교(大乘終敎)는 대승의 종극(終極)의 말씀으로써 근기가 원숙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열반경·능가경·승만경 등의 경과 기신론·보성론 등의 논등이 이것입니다.
돈교는 수행의 계단을 세우지 아니하고 「한 생각 나지 않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특별한 경론은 없으며 경론 가운데서 이와같이 설법하는 것은 모두 돈교라고 합니다.
현수대사의 시대에는 아직 선종이 성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교에 선종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원교는 원융원만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로서 완전한 교리를 말하니 화엄종 자체를 가리킨 것입니다.
화엄종은 일승에는 동교일승과 별교일승이 있다고 주장하나, 원만한 가르침으로 말한다면 별교일승인 화엄종만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각 교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우선은 간략하게 천태종과 화엄종의 교판을 살펴 보았읍니다.
이들 교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의를 두지 않을 만큼 역사적으로 가장 잘된 교판으로 봅니다.
그 두 교판에서 불교의 최고 위치를 어디에다 두었느냐 하면 원교에 두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읍니다.
지자대사는 원교를 법화경과 화엄경이라 하고 현수대사는 법화경을 돈교에 화엄경만을 원교라고 주장하였는데, 어찌하였든간에 천태·화엄 양 종파에서
원교를 불교 최고의 원리로 삼은 것은 똑 같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원교의 근본이 무엇이며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면 불교의 최고 원리가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원교란 이 중도를 나타내니 양변을 막느니라」
(圓敎者는 此顯中道니 ?於二邊)
지자대사의 말씀입니다.
불교의 최고 원리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은 양변을 다 막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자대사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것을 인용해 봅니다.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을 다 비추느니라」
(心旣明淨에 双於二邊하고 正入中道에 双照二諦니라)
양변을 서로 다 막는다(双於二邊)는 것은 상대모순(相對矛盾)을 다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으로 되어 있으니,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입니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는 우리가 이상으로 목표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하여 살아가고 있고 그 상극 ·투쟁하는 양변의 세계에서 평화라는 것은 참으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양 세계가 서로 다 비치게(双照二諦) 되는 것입니다.
다 비친다는 것은 서로 통한다는 뜻이니 선과 악이 통하고 옳음과 그릇됨이 통하고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 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릇됨이 둘이 아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둘이 아니라고 불교 근본에 가서는 그렇게 주장합니다.
둘이 아니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 통할려면 반드시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요사이 이것이 수학적·과학적으로도 4차원의 세계라는 개념에서 증명되어 있읍니다.
논리적으로 가장 정확한 것이 수학인데 거기에 4차원 세계의 공식이라는 것이 있읍니다.
본래 4차원 세계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나온 것인데, 민코프스키라는 수학자가 「사차원 세계의 공식」을 완성하여 그 이론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놓고 첫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읍니다.
「앞으로 가까운 장래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온다」
삼차원이란, 업체 즉 공간을 말하며 시간은 일차원입니다.
그런데 차별 ·상대의 세계인 현상계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대립되어 통하지 않으나, 사차원의 세계가되면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되어 현상계의 차별·
모순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이 불교의 중도의 진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은, 그 노선은 같다고 봅니다.
양변이 융합하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중도라고 하며 현대 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사차원의 세계라고 합니다.
거기에서는 물이 물이 아니고 불이 불이 아니며, 물이 물이 아니고 불이 불이 아니기 때문에 물과 불이 서로 통하는 물이 곧 불이며 불이 곧 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걸림이 없는 세계(無碍世界)라고 합니다.
그러면 화엄종에서는 중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 인용해 봅시다.
「구경에 실제인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어 주처라 한다」
(窮坐實際中道床하니 舊來不動名爲佛이로다)
곧 중도를 바로 깨친 이것이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교는 중도와 같은 말이며,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는 것이므로 이것은 교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곧 비춰서 막고 곧 막아서 비치어 양변을 다 막고
양변을 다 비추어 둥글고 밝게 일관하면 화염종취에 계합하느니라」
(卽照而?하고 卽?而照하여 双照双?하야 圓明一實하면 契斯宗趣니라)
청량(淸凉)스님이 현수대사의 탑현기(探玄記)에 있는 여러 이론을 종합해서 내련 화엄종취의 최후 결론 부분입니다.
양변을 버리면서 양변이 융합하고, 양변이 융합하면서 양변을 버리는 쌍차쌍조( 双 ? 双 照)가 바로 화엄종취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천태종이나 화엄종이나 서로 다 막고 서로 다 비추는 쌍차쌍조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가 바로 불교 최고 원리라고 함에는 틀림없읍니다.
당의 현장법사가 인도에 유학가서 유식론을 배워 중국에 와서 법상종을 세웠는데 그 교판을 살펴볼까 합니다.
법상종은 부처님 일생의 가르침을 삼시로 나누어서 낮은 가르침으로 부터 점차로 깊은 가르침으로 나아갔다고 봅니다.
제일시는 유교(有敎)를 설하신 때로서 아집은 부수었으나 법집은 부수지 못한 소승부파불교를 말합니다.
제이시는 공교(空敎)를 설하신 때로서 대승에 나아가고자 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법은 모두 공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신 반야부의 시기로 봅니다.
제삼시는 중도교를 설하신 때로서 유(有)와 공(空)을 비판하고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중도의 뜻을 분명히 하신 시기로서 해심밀경을 설하신 때로 봅니다.
이상으로 간단히 법상종의 교판을 살펴 보았읍니다만,
현장법사의 제자되는 규기법사가 말한 법상종의 근본종취를 인용해 봅니다.
「해심밀경은 일체를 설명하여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떠나 중도에 바로 자리하니, 이것이 제삼시의 중도의 가르침이니라」
(解深密經은 슴說一切하야 離有無?하고 正處中道하니 第三時中道之敎也니라)
여기서도 중도를 근본 종취로 한다고 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천태종이나 화엄종 만큼 완벽하지는 못합니다.
어쨌든 당나라 삼대종파에서 모두 한결같이 중도를 근본 표준으로 삼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2) 선(禪)에서의 중도(中道)
그러면 선종(禪宗)은 또 어떠했던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입적(入寂)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최후 유촉으로써 누가 묻지 아니하는데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無問自說)
「너희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니 내가 멸하고 난 뒤에도 각각 한 곳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법문하는 방법을 가르쳐 선종의 근본 종지를 잃지 않게 하겠노라.
모름지기 삼과법문(三科法門)과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対)를 들어서 말하리니 나고 들에 양변을 떠나고 일체 법을 설할 때에 자성을 여의지 말라.
혹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하되,
모두 쌍(双)으로 하여 다 대법(対法)을 취하고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 마침내는 두 법을 모두 없애어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나오든지 들어가든지 간에 양변을 떠나라」 하신 그 근본 뜻은 「무슨 법문을 하든지 양변을 떠나서 법문을 해야지 양변에
머물러서 법문해서는 안된다」고 하신 말씀이며 그렇게 하면 불법(佛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말씀하시되 「쌍(双)으로 하여 다 대법(對法)을 취한다」고 하신 것은 누가 법을 물어오면 예컨대, 누가 있음(有)을 물으면 없음(無)을 들어 쌍(双)으로
대답하여 언제든지 대대(對對)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가고 옴에 서로 원인이 되게 하라」 하신 뜻은 있음(有)이란 없음(無)이 있기 때문에 있음(有)이 있고, 없음(無)이란 있음(有)이 있기 때문에 없음(無)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세간의 법은 모두가 상대법이어서 독립적으로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상대법이란 결국은 생멸법입니다.
생멸법은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구경에 가서는 두 법(二法)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곧, 양변을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 하신 뜻은 그래서 상대법이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을 완전히 버릴 것 같으면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서 중도(中道)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중도이므로 양변에 머문다면, 있음에 머물든지 없음에 머물든지 간에 한쪽으로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을 변견이라고 합니다.
변견이란 세간의 생멸법이지 불법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은 양변을 떠나 중도를 성취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설법을 할 때에도 중도에 의거해서 설법을 해야지 중도를 벗어난 설법을 하면 불법의 종지(宗旨)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육조단경 가운데서도 돈황본(燉煌本)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글자는 몇자 틀리는 것이 있어도 그 뜻은 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의 최후 유촉이 중도에 있다는 것은 어느 학자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가지 더 생각하여 볼 것은 내가 지금까지 선(禪)과 교(敎)를 나누어서 많이 설명했는데
교(敎)에서도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고, 교(敎) 밖에 따로 전했다고 하는 선(禪)에서도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선과 교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근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敎)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하여(교(敎)는 부처님의 말씀) 말로써 말을
선(禪)이란 선시불섬(禪是佛心)이라 하여(선(禪)은 부처님의 마음)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다는〔以心伝心〕것이 다른 것이지 부처님의 근본 진리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가에서도 선가에서도 불교의 근본을 중도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선가에서도 역사가 흘러 오가철종(五家七宗)으로 나뉘어져, 조사스님네가 많이 나오고 깊은 법문이 많았지만 그 표현방법은 틀려도
육조스님의 유촉과 같이 중도라는 근본 종지를 벗어나서 설법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육조스님의 유촉을 충실히 실천한 사람들 입니다.
조동종의 개초(開租)인 동산(洞山)선사가 지은 오위송(五位頌)이 있는데 그 끝머리에 있는 말을 인용합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누가 감히 화답하리오」(不落有無誰敢和)
「도무지 일체의 있음(有)과 없음(無) 등의 견해가 없고 또한 없다는 견해도 없는 것이 불법을 바로 보는 견해라고 한다」
(都無一切有無等見 亦無無見 名正見)있다(有), 없다(無)고 하니 있다 없다는 한쌍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말하는 것이니 변견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왜 하필이면 있음과 없음을 말하느냐 하면 이 있음과 없음이라는 것은 모든 일체의 견해가 이 두 가지에 귀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견을 말할 때 대표적으로 있음과 없음을 예로 많이 드는 것입니다.
또 일체의 있음과 없음의 두 견해 등이 없다고 하면 또 없다는 것에 집착하게 되니 없다는 그 생각이 있으면 그것도 변견이므로 없다(無)는 견해도 또한
굳이 고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의 제자되는 대주(大珠)스님의 말씀입니다.
「있음(有)과 없음(無)을 보지 아니하면 곧 바로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느니라」(不見有無 郞時見佛質身)
「마음에 이미 양변이 없으면 가운데(中)도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다만 이렇게 얻은 것을 중도(中道)라 이름하니 참으로 여래의 길이니라.
(心旣無二 辺 中亦何有龍 但得如是者 卽名中道 眞如求道)
내가 법문할 때마다 중도, 중도하니 어디 말뚝 박힌 조동종에서도 양변을 떠난 것으로 구경법을 삼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육조대사 •백장선사 •대주선사 •동산선사 등 선종의 대표스님들의 어구를 인용했는데, 이런 큰스님들도 불법(佛法)의 근본을 말할 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를 밝히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선(禪)과 교(敎)를 통해서 중도(中道)가 불교의 최고 원리라고 함에는 일치하나 중도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선과 교가 틀린다는 것에 의아심을
가질런지 모르겠습니다.
천태종은 양변을 다 막고 두법을 다 버친다(双遮二辺 双照二諸)고 하고, 청량스님은 쌍차쌍조(双遮双照)라고 했는데,
선문(禪門)에서는 양변을 떠나는 것만 얘기하고 있으니 쌍차(双遮)만 말하고 쌍조는 말하지 아니한 것이 아닌가?
중도를 반만 표현한 것이지 전체를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쌍차(双遮), 양변을 막는다는 것을 양변을 떠나는 것을 말하며, 쌍조(双照), 양변을 비춘다는 것은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양변이란 모두 변견인데 변견을 버리면 중도(中道)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에 해가 그대로 드러나고,
해가 완전히 드러나 있으면 구름이 완전히 걷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며,
해가 드러냈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말과 같습니다.
쌍차(双遮)란 양변을 완전히 떠나니 구름이 걷혔다는 말이고,
쌍조(双照)란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말이니 결국엔 해가 드러나 비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즉 해가 드러난 것이며, 해가 드러났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가 쌍조며 쌍조가 즉 쌍차입니다. 부처님이나 예전 조사스님들이 쌍차로서만 얘기할 때도 있고, 쌍조로서만 얘기할 때도 있어
그때 그때의 입장에 따라 그 표현방법이 전혀 틀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쌍차라 하면 쌍조의 뜻이 내포되어 있고, 쌍조라 하면 또한 쌍차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쪽으로 집착하여 쌍차만 말한다고 해서 쌍조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쌍조만 말한다고 해서 쌍차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면 내 법문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쌍차보다는 쌍조에 대한 이해가 더 어렵습니다.
현수대사는 쌍차쌍조(双遮双照)를 쌍민쌍존(双泯双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쌍민(双泯)이란 쌍차(双遮)로써 양변이 다 없어지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쌍존(双存)이란 쌍조(双照)로서 양변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양변이 완전히 없어지면 양변이 완전히 있다는 것이며, 생멸하는 양변이 다 없어질 것 같으면 불생불멸하는 절대적인 양변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표현을 달리해 보면 전체를 부정(否定)하면 전체를 긍정(肯定)하는 것입니다.
쌍존(双存)이란 생멸 변견의 견해와는 틀립니다.
생멸의 생존은 있음(有)과 없음(無)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상극모순된 현상 그대로이니 있는 것은 영원히 있고 없는 것은 영원히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은 영원히 불이고 물은 영원히 물이므로 서로서로 통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부정된 후의 긍정으로서의 쌍존(双存)이란 양쪽이 다 있으면서 서로 융통한다는 것입니다.
있음이 즉 없음이며 없음이 즉, 있음이어서 완전히 서로서로 상통하여 원융무애함므로 서로 융합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도 물을 불로 쓸수 있고 불을 물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서로서로 각기 상극된 변견을 고집하면 서로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든지 내가 옳다 하고 저는 언제든지 제가 옳다고 하므로 융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도의 입장에서 서로서로 시비를 다 버린다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사회적으로도 모든 상극모순의 투쟁은 영원히 없어지고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실현될 것입니다.
※주
1) 삼과법문(三科法門) : 삼과법문이란 「음(陰)」과 「계 (界)」와「입(入)」을 말한다.
음(陰)이라 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음(五陰)과 입(入)이라 함은
밖으로 육진(六塵)인 색(色), 생(生), 향(香), 미(味), 촉(觸), 법(法)과
안으로 육문(六門)인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합하여
십이입 (十二入)이라 하며, 계(界)라 함은 십팔계(十八界)니 육진과 육문과 육식을 말한다.
2) 동용삽십육대(動用三十六対) : 법문을 함에 있어 설흔 여섯가지의 상대되는 법을 들어 양변을 여의어 설법하라고 하신 것이다.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
'깨침과 영혼의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에서 꼭 필요한 5가지 "끈" (0) | 2009.09.07 |
---|---|
깨어있음의 중요성 (0) | 2009.09.07 |
성철스님: [불교의 근본사상] 영원한 진리(2) (0) | 2009.09.05 |
[불교의 근본사상] 영원한 진리(3) (0) | 2009.09.01 |
깨어있음의 중요성 = 마음이 머무는... (0) | 2009.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