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개태사 창건과 석불 유래極樂大寶殿(극락대보전)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論山 開泰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 : 보물 제219호 시대 = 고려시대논산 개태사 창건과 석불 유래 |
논산 개태사 극락대보전에 봉안돼 있는 석조삼존불 모습.
개태사 창건 때 태조 왕건이 만 백성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한다.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11번지에 위치한 개태사(開泰寺). ‘하늘의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가 담긴 천호산(天護山) 자락에
자리한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에 창건한 사찰로 고려 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고려 개국조인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님의 힘을 빌어 만 백성을 평안하게 하리라’는 염원를 담아
고구려와 백제 신라땅이 교차되는 지점인 논산에 왕실 차원에서 부처님 도량을 열었다. 그래서 개태사에는 왕건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眞殿)도 있었다고 전한다.
불심(佛心)이 돈독했던 왕건은 현세 뿐 아니라 미래세에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모든 백성이 정토의 열락(悅樂)를 누릴 수 있도록
기원하며 석조삼존불입상(보물 제219호,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 보처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심)을 조성했다. 개태사의 창건 설화와 삼존불에 전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태조 왕건, 고려 세운 뒤 國泰民安 ‘발원’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하고 거찰 세워 백성 정토로 인도 위해 삼존불 ‘조성’
“대업(大業)을 완수하라.” 격전장 황산벌에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후삼국 시대의 혼탁한 정세는 전쟁을 불러왔고 곳곳에서 살육의 처참한 광경은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후삼국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했던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위한 원대한 포부를 그리며 마지막으로 황산벌(현재 천호산 아래 대평원)에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을 대적하고 있었다. 황산벌은 백제의 한이 서린 땅이기도 했다. 이미 300여 년 전 백제의 장수 계백이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5만명이 넘는 신라
연합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곳이기도 했다.
왕건이 이끄는 군사들의 사기는 오를 만큼 올라 있었고 신검의 군사들은 이미 패배를 맛본 것과 다름없이 누운 풀처럼 기력이 약했다.
전쟁의 결과는 뻔했다. 마지막 후백제군의 목숨까지 거두어 들인 왕건의 군대는 기세가 등등했다. 승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황산벌에 울려 둥둥 울렸다. “폐하! 저희 군대가 그토록 고대하던 대업을 완수했습니다.”
고려 개국조인 왕건에게 승전보를 전하는 장수들의 목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당당하고 우렁찼다.
하지만 왕건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픈 생채기가 자라고 있었다.
“그래, 그토록 원하던 삼국통일을 성취했어. 하지만 그 댓가가 너무 컸어.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희생하고 나라를 세웠으니 이 원결(怨結)을 어이할꼬….”
국호를 ‘고려’로 정한 태조 왕건은 918년에 새 나라 건국을 천하에 선포했다. 수도를 개경으로 정하고 안팎으로 흐트러진
정국을 수습했지만 민심을 완전히 수습하지는 못했다. 깊은 시름에 빠진 왕건은 굳은 결심을 했다. “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대 고려를 세웠으니 부처님의 힘을 한번 더 빌려 나라와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성취하리라.”
개경을 출발한 왕건은 자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렸던 황산벌(현재의 논산)로 향했다.
‘그래, 이곳은 그 옛날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대고 서로 다투었던 곳이지.
나 역시 이곳에서 후백제 군을 물리치고 대 고려국을 세우지 않았던가.
여기에 거찰을 세워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해야겠어.’
이렇게 마음먹은 왕건은 4년 동안 불사를 거쳐 936년에 사찰을 완공하고 ‘나라의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담아
사찰 이름을 ‘개태사(開泰寺)’라 지었다. 더불어 법당에는 석조로 석조삼존입불상을 모셨다. 개태사 낙성식 날 태조 왕건은 친히 발원문을 지어 부처님 전에 올렸다.
“병신년(丙申年) 가을 9월에 숭선성에서 백제의 군사와 대진(對陣)하여 싸우매 한번 크게 외쳐 흉악한 무리들을 무너뜨렸고
다시 북을 울리어 진격하니 역당들이 얼음 녹듯이 소멸되어 개선의 노래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기쁨에 넘치는 환호성이 땅을 진동하였나이다 …(중략)…
부처님의 성력이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령(山靈)이 도와주심에 수응(酬應)하기 위하여 책임 맡은 사국(事局)에 특별히 명하여
새 연궁(蓮宮)을 짓게 하였으니 이에 산(山)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開泰)라 하였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의 소원은 부처님의 위엄으로 보호해 주시고 하느님의 힘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이렇게 완공된 개태사는 왕실은 물론 백제와 고구려 신라인들이 찾아 죽은 영가의 넋을 기리는 고려 제일의 영가 천도도량이 됐다.
태조 왕건도 나라의 어려운 일을 결정할 때면 1주일이 넘게 걸리는 길을 마다않고 개경에서 내려와 기도를 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당연히 나라에서는 호국도량으로서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태사 삼존불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영험을 가진 돌부처님’이 되었다.
비가 오지 않은 해에는 기우제를 지내 비를 오게 했고, 가뭄이 드는 해에는 천우제를 지내 비를 오게 하기도 했다.
또한 나라의 우환(憂患)이 생길 때면 땀을 흘리는 신이(神異)한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개태사는 저마다 바라는 소원을 이루기 위한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수 많은 영험설화를 낳기도 했다. 이중 대표적인 이야기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라의 혼란한 틈을 타 왜구들은 한반도 곳곳에 출몰해 백성들을 유린했다.
그러자 고려 왕실은 개태사에서 호국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 사실을 안 왜구들은 개태사로 쳐들어왔다.
절문을 부수며 횡포를 부린 왜구들은 삼존불까지 부수려고 했다.
그런데 큰 법당 문을 여는 순간, 삼존석불이 빛을 발하면서 왜구들은 이유도 없이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밖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왜구들은 급히 도망쳐 이 사실을 자신들이 대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적장은 “믿을 수 없다”며 직접 개태사를 찾아 자신이 삼존불을 없애버리겠다며 큰 법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차고 있던 칼로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보살)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이상한 불빛이 번쩍이며 칼이 부러지고, 적장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왜구들은 개태사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부터 개태사 인근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불이 나 집과 곡식이 타 버리고 온 마을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한 할머니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부처님이 나타난 것이다.
“개태사의 불상을 원래 상태로 해 놓아라.
그리고 정성껏 공양물을 올려라.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화를 면할 수 있다.”
할머니의 꿈 이야기가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개태사를 찾아 칼로 잘린 부처님을 복구하고 공양을 올리자 불이 나지 않고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왕실에 의해 완공된 개태사는 고려의 왕실사찰로 자리를 굳건히 하면서 한때 스님들의 수가 3000여명에 달할 정도가 됐다.
그래서 스님들의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서 철로 된 큰 솥인 철확(鐵)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 솥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충남도지정 민속자료 1호로 지정돼 있다.
직경이 3m나 되고 높이가 1m, 두께가 3cm인 이 철확은 개태사가 폐허가 된 뒤 1887년 대홍수로 떠내려갔다가
일제시대 때 발견돼 연산공원에 있다가 1987년에 다시 개태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최근 개태사는 양산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사격을 일신했다.
그동안 큰 법당에 걸려 있던 ‘용화대보궁(龍華大寶宮)’이라는 현판을 떼고 ‘극락대보전(極樂大寶殿)’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양산스님은 “그동안 본존불에 대한 규명이 미흡해 막연히 미륵불로 알았던 것을 바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태조 왕건이 사찰을 건립해 현세 뿐 아니라 내세에도 모든 백성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고자 했던 고려 왕건의 대원(大願)이 서린 개태사는 현재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불사가 한창이다. 더불어 올해는 윤오월을 끼고 있어 선망부모와 조상들의 영가천도를 하려는 불자들의 기도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논산=여태동 기자 *이시영 충남지사장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 서대전 나들목을 나와 국도 4번을 타고 논산 방향으로 13km 오면 왼쪽에 개태사가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때는 우측도로를 타고 지하도를 좌측으로 돌아 나올 수 있으며 버스는 좀 더 내려가 유턴을 해야 한다.
(041)734-87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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