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파주 용미리석불입상과 득남불공

백련암 2009. 11. 11. 20:57

파주 용미리석불입상과 득남불공

마치 갓을 쓴 모습을 하고 있는 파주용미리 석불입상의 모습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8번지 용암사 옆에 우뚝 선 ‘파주용미리석불입상’.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석불은 형태가 특이

하다. 거대한 자연석을 몸통으로 하고 그 위에 머리를 얹어 놓아 반은 자연적으로 반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석불이다.

이러한 형태의 석불은 삿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미래세계를 주관하는 미륵부처님으로 부른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석불입상은 ‘용미리 쌍미륵’이라 불렀으며 마을이름도 ‘미륵뎅이’라고 불린다. 


 

고려 선종왕 셋째부인으로부터 아들을 얻다 

원신궁주 꿈에 두 스님 나타나 배고픔 호소  왕명으로 장지산 바위에 모습새기고 절 건립

이와같은 형태는 안동 제비원(연미사) 미륵불과 유사하다. 그 모습이 특이해 보물 제93호로 지정돼 있는 용미리 석불입상은

예로부터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도해서 득남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석불입상은 고구려시대에 천년암벽에 57척 2촌(18m)의 거대한 입상이 신령스런 힘에 의해 조각됐다고 하나 조각수법으로 볼때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역사가 기록돼 있지 않지만 용미리 쌍미륵부처님에 얽힌 설화는 고려 때 나라의 후사를 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13대 왕이었던 선종은 자식이 없었다. 첫째부인인 왕후에게서 아들이 없었고 둘째부인에게서도 아들이 없자 왕실에서는

셋째부인인 원신궁주를 맞이하며 후사를 잇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우려하는 걱정은 백성들에게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고려가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 됐어. 후사가 없으면 나라의 문을 닫는 것은 당연하니까.”

민심의 흉흉해짐과 더불어 선종의 걱정도 점점 깊어만 갔다.

그럴수록 셋째부인인 원신궁주의 처소를 찾는 횟수가 많아졌다. “부인은 반드시 왕자를 생산하여 이 나라의 대를 이어야 합니다.”   “예,   전하.   전하의 바람대로 소첩이 반드시 왕실의 대를 잇도록 하겠사옵니다.”

원신궁주는 궁권안에 불단을 마련해 놓고 매일 치성을 올렸다.

불심이 돈독했던 원신궁주가 기도를 하기위해 방에 들어가면 궁녀들은 연신 이상한 징후를 발견하곤 했다.

 

“저기 봐. 궁주님이 들어간 방에서 이상한 광채가 나오고 있어.”

하지만 궁주가 방을 나오면 아무일 없는 듯 멀쩡했다. 한번은 멀리서 불단을 바라본 내관들이 불이 난 줄 알고 허둥지둥한

일까지 발생했다.

이러저런한 소문은 궁 안에 퍼졌다.

 

그러던 어느날 원신궁주의 꿈에 두 명의 도력 높은 스님이 나타났다.
“소승들은 장지산 남쪽 기슭에 사는 수행승인데 너무 배가 고파요, 시주님께서 소승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서 좀 주시오.”

원신궁주는 “스님. 어디라구요?”라며 두 수행승들이 사는 거쳐를 물어보려 하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들 가셨나.” 꿈인 듯 생시인 듯 깨어난 원신궁주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필시 보통꿈은 아닌 게야. 스님들이 꿈에 나타난 것을 보면. 그것도 한 분도 아니고 도력높아 보이는 두분의 스님들이 나타난 것은 필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해 주는 걸 거야.”

급히 선종을 알현한 원신궁주는 지난밤 꿈속에 일어난 일들을 자세하게 고했다.

선종임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부인에게서 필시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인 것 같소”라며 동조했다.

선종은 이어 신하들을 파주 장지산으로 급파했다. “장지산을 샅샅히 뒤져보거라. 거기엔 필시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을 것이야. 반드시 그들을 찾아 융숭히 대접해야 한다.”

선종의 명령을 받은 신하들은 장지산으로 달려가 온 산을 샅샅히 뒤졌다. 하지만 움막 한곳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전하. 장지산을 다 찾아보았으나 개미새끼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하였사옵니다.

다만 장지산 중턱에 큰 바위 두개가 스님 모습처럼 서 있을 뿐이었사옵니다.”

선종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석공을 시켜 그 큰 바위에 스님의 모습을 새기도록 하라.”

명령이 시달되자 고려에서 내노라하는 석공장인을 차출해 원신궁주가 구술해준 모습대로 거대한 바위에 도력놓은 스님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점안법회를 봉행할 때는 임금과 원신궁주도 새롭게 태어난 모습을 친견하러 현장에 참석했다.

 

장막에 가려진 석불의 모습이 드러나자 백성들은 일제히 “저 분은 미륵부처님이야.  그것도 두 분의 미륵부처님,

그러니 쌍미륵부처님인게야”라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선종은 원신궁주에게 말했다. “이보오 부인. 그대가 본 것은 스님이 아니라 미륵부처님인가 보오.  백성들이 저렇게 미륵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 필시 부인은 미륵부처님을 선몽한 듯 하오.”

선종은 미륵부처님 옆에 사찰을 지어 혜음사(惠 陰寺)라 부르고 왕실의 원찰로 삼겠다고 공표했다.

바로 그해 원신궁주의 몸에서 태기가 감지됐고, 이 인연으로 태어난 왕자가 ‘한산후’인 ‘왕윤’이었다. 하지만 선종이 죽은 뒤

어린 헌종이 즉위하자 원신궁주의 오빠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됐으며 원신궁주도 왕자 한산후와 함께 유배된

뒤 생사여부를 알 수 없게 됐다고 한다.

 



파주=여태동 기자

 

찾아가는 길 /
1) 서울 구파발을 지나 벽제 방향으로 가다 고양시 고양동으로 들어간다.

    고양동 삼거리에서 파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이 보광사 방면이고

    좌측이 용미리(광탄)방면이다. 좌측 길로 들어오면 야산이 나오고 산을 넘으면 용미리 묘지가 보인다.

    계속 지나다보면 서울 방향과 파주 방향을 알리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파주방향으로 1km가량

    오면 우측에 큰 화강암에 용암사라고 적힌 표석이 나온다.

    용암사에 들어와 좌측 언덕을 올려다보면 용미리 석불이 보인다.

2) 대중교통은 고양동에서 용암사행 33,703번 버스가 있다. (031)942-0265

참고 및 도움: 파주문화원 홈페이지, 파주향토문화연구소 이윤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