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정수사 함허대사와 각시바위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우리겨레의 시조로 불리는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이 지척에 있는 산자락(고도 468m)에는 거대한 바위에 ‘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정수사를 중수한 함허스님이 와서 수행하면서 그의 당호를 써서 ‘함허동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마을이름도 ‘함허동천’으로 부르게 됐다.
출세간의 깨달음은 ‘세간의 사랑’도 ‘초월’
중원서 건너온 부인, 돌아갈 것 거절당해 바다에 몸 던지자 거대한 바위 솟아나
함허스님은 고려 말 조선초에 활동했던 고승으로 불교가 배척당한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유학자들과 당당히 맞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뛰어남을 주창했던 선지식이었다.
그는 동천계곡을 “사바세계의 때 묻지 않은 수도자가 가히 삼매에 들 수 있는 곳”이라고 극찬을 한 뒤 수도했다고 한다. 17세기에 저술된 강화의 읍지인 <강도지(江都誌)>에는 ‘고려 때 중원에서 건너온 함허대사가 수행했는데, 그의 부인이 찾아와 모국으로 돌아가길 청했으나 돌아가지 않자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각시바위(각시의 섬)가 됐다’는 내용의 애틋한 ‘순애보’가 전한다.
중원에서 도를 닦기 위해 건너 온 함허대사는 강화 땅 정수사에 도착하자 이곳이 수행하기 좋은 명당임을 직감했다. 마니산에서 내려오는 산의 기운이 정수사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계곡 역시 가히 신선이 노닐만한 곳으로 선(禪)수행을 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해가 거듭할수록 함허대사의 수행력은 높아만 갔다. 하지만 고향에서 혼인을 했던 함허대사의 부인은 고려 땅으로 공부하러 떠난 남편을 하루하루 기다리다 지쳐만 갔다.(일설에는 함허대사가 한림학사로 있다가 고려로 건너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잠시 공부하러 갔다 온다더니 왜 이리 연락이 없을까?” 하다 못한 부인은 이역만리길을 찾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강화도 정수사에 머물고 있는 함허대사 소식을 접한 부인은 만나기를 청한다. 하지만 함허대사는 이미 수행의 경계가 깊어가고 있었고, 찾아 온 부인을 만날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세상사 모든 일, 물거품 같은 것이거늘….”
마니산 계곡에서 수행에 열중하고 있던 함허대사에게 정수사의 어린 동자가 헐레벌떡 찾아와 말을 전했다. “스님, 고향에서 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서 가 보시지요.” “무엇이라고?”
함허대사는 잠시 놀라는 눈치였으나 곧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동자에게 말했다. “내가 몇 자 적어 줄 터이니 이 글을 그 부인에게 전해 주어라.” 함허대사는 부인을 만나지 않는 대신 몇글자의 편지를 썼다. “태어난자 반드시 죽고, 만나는 자 반드시 이별하게 되는 것이 세상일이요 인생이 아니겠소.
이별은 괴로운 것이요, 괴로운 이별을 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만남이 없어야 하는 것이란 걸 알았소. 또한 깨달음의 경지를 위해 정진하는 수행자가 된 이상 더 이상 부인을 만날 의미는 없어져 버렸소. 부디 야속하다 생각마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주길 바라오.”
동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편지를 받아 들고 계곡을 내려왔다. 그러나 부인의 생각은 달랐다.
“여자가 한 남자와 인연을 맺었으면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 놓을 때까지는 헤어질 수 없는 것이야.” 부인은 곧 함허대사가 수도를 하고 있는 계곡으로 향했다.
산속 골짜기 넓은 바위 위에 남편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부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접니다. 당신의 마음은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 얼굴이나 한번 보고 떠나겠으니 이쪽으로 얼굴이나 돌려 보세요.”
그러나 함허대사는 부인을 만나면 지금까지 수행한 것이 물거품처럼 무너진다는 생각에 정과 망치를 들고 계곡 넓은 바위 위로 올라가서 거기에다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계곡은 산과 물이 묘한 조화를 이룬 빼어난 경치로 사람들이 흔히 동천(洞天)이라고 부르고 있는 곳이었다. “쩡! 쩡! 쨍!” 함허대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망치질을 했고 그 소리는 계곡으로 퍼져 나갔다. 글자가 ‘함허동(涵虛洞)’자까지 새겨졌을 때였다. 뒤에서 함허대사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부인이 소리치며 애원했다.
“여보,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 부인도 몰라본답니까? 깨달음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그러십니까? 정녕 당신 뜻이 그러시다면 제가 아주 먼 길을 떠나겠습니다.” 계곡을 빠져 나온 부인은 바다로 향했다. “여보, 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하지만 영혼이나마 이곳에 남아 당신이 바라는 깨달음을 얻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부인은 정수사가 바라보이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때 갑자기 바다에서는 큰 물결이 일어나며 거대한 바위 하나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그 바위를 함허대사의 부인의 영혼이 담겨 있다고 하여 ‘각시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계곡 바위에는‘涵虛洞天(함허동천)’ 이란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함허대사가 평생 수행했던 정수사 언덕에는 함허대사의 부도가 앞 바다의 각시바위(각시바위 섬이란 의미에서 ‘각시의 서(嶼)’라고도 부름)를 바라보고 세워져 있다.
‘정수사 함허대사와 각시바위’ 설화는 중원에서 건너온 함허대사와 고려 말 조선초에 살았던 선지식 함허스님이 살았던 시기가 비슷해 혼용되고 있다.
고려말 조선초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함허스님 역시 정수사에서 수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불교를 배척했던 유학자들에게 맞서 불교가 바른 종교임을 주장한 현정론(顯正論)을 편 함허스님이란 점을 감안하면 부인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수사에 있는 이 부도 역시 역사적 기록으로 보아 당대의 선지식었던 함허스님의 부도로 보여진다.
하지만 <강도지>의 기록처럼 중원에서 건너온 함허대사의 부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설화에 대한 내용은 증명하기가 모호하다. 다만 한 수행자와 그의 여인과의 안타까운 별리(別離)의 아픔이 민초들의 가슴을 울리며 끊어질 듯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최근 정수사는 이 같은 설화를 바탕으로 오는 8월15일 연희극을 공연할 예정이다. 때마침 정수사 입구에는 노란 상사화가 매년 피어나고 있어 ‘상사화 축제’는 의미를 더할 것이라고 사찰측은 밝힌다.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의 애틋함이 세간과 출세간 사이의 거리만큼 차이가 나는 ‘연모의 마음’으로 흐르고 있는 것만 같다.
강화=여태동 기자
찾아가는 길 / 1) 김포를 거쳐 강화 초지대교를 지나 동막해수욕장 방향으로 끝까지 가면 함허동천이 나온다. 이곳에서 1km를 더 가면 우측에 정수사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1km정도를 더 들어가면 분오리 돈대가 보이고 그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면 각시바위가 보인다. 2) 강화읍내에서는 군내버스 14번을 타고 화도면으로 가면 된다. 정수사 (032)937-3611 참고및 도움: <강도의 민담과 전설>(강화문화원), 정수사 주지 진효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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