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해루
삼랑성 사적 제130호
전등사
전등사 대웅보전...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목조건물로 되어있다
강화 전등사의 사랑이야기 |
전등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전통사찰이다.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 130호)내에 위치하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
이 창건해 진종사(眞宗寺)라 불렀다. 국권 잃은 ‘고려여인’ 옥등 밝히며 설움 달래
이 중 사랑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다.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은 태자로 있을 때 정비로 정화궁주를 맞이한다.
그렇지만 원나라(몽골)의 침입을 받아 고려는 부마국(임금은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으로 전락하고 말았
다. 그리고 이전까지 황제국가로 군림하며 ‘종’이나 ‘조’의 호를 사용했으나 이때부터는 ‘왕’이라는 호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충렬왕도 원나라에 볼모로 가서 충성을 맹세하고 제국공주(원나라 세조의 딸로 후에 장목왕후가 된다)와 결혼을 한다.
“나라가 속국이 된 것만 해도 억울하고 분한데 왕비의 자리까지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억울함과 분함을 참지 못한 정화궁주는 시름의 세월을 보낸다.
그 사이에 원나라 출신의 제국공주는 충렬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나아가 정화궁주를 모함하기까지 한다.
“전하. 정화궁주가 전하에게 저주를 내리기 위한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궁 안에 파다합니다.
어서 그 원인을 살펴보소서.” 급기야 충렬왕은 이성을 잃고 정화궁주를 감금하는 행동까지 했다. 임금의 정비로 책봉됐다가 왕후가 되지 못하고 귀비(貴妃),
숙비(淑妃), 현비(賢妃) 등의 아래 작호인 궁주(宮主)에 머물고 만 정화궁주는 “내 나머지 삶을 부처님 전에 기도하며 고려의 부강을 기원해야겠다”고 발원했다.
정화궁주는 시간만 나면 전등사를 찾았다.
“자비하신 부처님. 우리 고려가 하루 빨리 원나라의 속국신세를 면하게 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정화궁주는 간절한 염원을
실행하기 위해 ‘인기’라는 스님에게 부탁했다. “스님께서 바다 건너 송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인쇄해 돌아와 주세요. 그래서 이 진종사에 봉안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예, 마마의 뜻이 그러하다니 소승이 다녀오겠습니다.” 먼 바닷길을 항해해 인기스님은 대장경을 모셔왔다. 나라 잃은 설움과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정화궁주는 오로지 부처님께 의지
해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며 장인에게 부탁해 옥등(玉燈)을 만들어 함께 부처님 전에 시주해 매일 등불을 밝혔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진종사는 ‘전등사(傳燈寺)’로 불리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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