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원효스님 오도성지 평택 수도사

백련암 2009. 11. 12. 13:14

 

원효스님 오도성지 평택 수도사

“만법이 마음에 달렸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리”

 

의상스님과 당나라 유학길 오른 원효스님 해골 물 마시고 ‘일체유심조’ 도리 깨달아

 

신라의 원효스님(617~686)은 중국에 유학을 하지 않고도 신라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전한 선지식이었다.

그는 모든 불교 경전과 여러 종파를 종합하여 새로운 체계를 이룩했을 뿐 아니라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원효스님은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을 받기도 했다. 

 

선과 교에 응통했던 스님은 불교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화엄경소>를 비롯해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24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원효스님은 당시 유학파가 아니면서도 유학파 못지 않게 불교에 대해 해박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명성은 당나라까지 알려졌다.  원효스님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는 물론 중국 문헌인 <종경록(宗鏡錄)> <송고승전(宋高僧傳)> <임간록(林間錄)>등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난 원효스님은 태몽도 범상치 않았다.

스님의 어머니는 어느 날 꿈에 유성이 뱃속으로 들어와 깜짝 놀라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꾼 뒤에 아기를 잉태하여 친정집으로 가던 중 배가 아파 대나무 아래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원효스님이었다.

스님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사람은 왜 죽을까?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이런 철학적인 생각을 하며 인생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싶어했다.

어려서부터 스승에게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재주가 남달랐던 원효스님은 29세에 출가해 자기의 집을 ‘초개사’라는 절로 만든다.

 

“나는 장차 이차돈성사와 같은 훌륭한 스님이 되겠어.” 굳은 다짐을 한 원효스님은 34세대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의상스님과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  하지만 순라군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고 만다.(최치원의 <의상전>)

하지만 그의 나이 45세 되던 해에 다시 의상스님과 당나라 행을 결행한다.

 

“이번에는 반드시 당나라로 가서 드넓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배워 신라에 불법을 꽃피웁시다.”  타오르는 구도 열을 식힐

 줄 몰랐던 두 사람은 이번에는 바다를 통해 당나라로 들어가기로 작심했다.

 

“그렇다면 여기 당주를 통해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차질이 없도록 준비를 합시다.”

먼 친척지간인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바랑을 챙겨 먼 여행을 결행했다.

 

서라벌(경주)를 출발한 두 스님은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서라벌을 출발한지도 한달이 넘었다.

두 스님은 직감적으로 항구에 도착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원효스님, 여기가 봉화산이라고 하니 아마도 내일은 당항성(지금의 평택 남양만 일대)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스님도 제 생각과 같으셨네요.” “허허허…”

 

여행길에 비가 내렸다. “의상스님, 우리의 여행길을 축복해주려 비님까지 오는가 봅니다.”

“그러게 말이예요. 그런데 옷이 젖으니 좋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합니다.” 비를 피할 도구도 변변히 갖추지 않은 두 수행자는

  그저 비가 오다가 그치기를 바라고 걷고 또 걸었다.

 

벌써 가져온 짚신도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원효스님. 날이 저물어 갑니다. 더 어둡기 전에 어디 유숙할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죠. 여기는 산속이라 어디 마땅히 비를 피할 곳도 없어요.”

의상스님의 말에 원효스님의 눈에 어스름하게  보이는 동굴같은 게 보였다. “의상스님. 저기 동굴이 있어요. 마침 우리 두 사람이 하룻밤 쉬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아요.”

 

“그거 참 잘 됐습니다.” 두 스님은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잠자리를 폈다. 포구로 가기 위해 강행군한 두 스님은 몸이 축 늘어질 만큼 피곤했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동굴에 등을 대고 누웠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두 스님의 머릿속은 온통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다. “당나라까지는 며칠이 걸릴까. 뱃길이 잘 열려야 빨리 도착할 것이 아닌가. 이 모두가 부처님의 뜻대로 될 것이요….”

 

간단하게 생쌀을 한줌씩 저녁으로 먹은 두 스님은 신비의 세계로 여행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며 잠을 청했다.

이날따라 많이 걸어서인지 눈꺼풀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면서 스르륵 감겼다.

 

한잠을 잤을까. 주변에서 짐승울음소리에 원효스님이 잠에서 깨어났다.

“산도 깊지 않는데 무슨 산짐승소리가 저리도 요란할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원효스님은 사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목이 무척 마르군. 어디 마실 물이 없을까?”

원효스님은 손으로 바랑을 더듬기 시작했다. 마침 의상스님 바랑 옆에서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손을 가만히 대 보니 물이 있었다. “아니 스님께서 나를 위해 이렇게 물을 준비해 놓았구나.

참 배려심도 많으시구나.” 원효스님은 둥글넙적한 물건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이구 시원하구나. 극락세상이 따로 없어. 이 맑고 개운한 물맛이 바로 극락일세.”

피곤한 몸을 뉘인 원효스님은 깊은 잠속으로 스며들었다. 산새 소리에 두 사람은 잠에서 깨어났다.

 

“바닥이 축축했을 텐테. 감밤에 고뿔은 들지 않으셨지요?” 의상스님이 아침인사를 건넸다.

“그럼요. 스님께서 때마침 준비해 놓은 물을 마시고 아주 단잠을 잤습니다.”

“네? 소승이 물을 떠나 놓았다구요?” 의상스님이 되물었다. 원효스님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니까요. 스님이 어제저녁 주무시기 전에 머리맡 바랑 옆에 물 한 그릇을 떠나놓지 않을셨습니까.

소승은 그것을 마셨습니다.”

 

의상스님이 물었다. “어디에 물그릇이 있었단 말입니까?”

원효스님은 고개를 돌려 자신이 둔 그릇을 향해 손가락을 폈다. 순간 원효스님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니. 저것은…” 원효스님은 자신이 꿀처럼 달게 먹었던 물그릇이 사람의 해골임을 알아챘다.

“이럴수가!”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특히 해골에 물을 먹은 원효스님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원효스님의 굳었던 얼굴이 펴지면서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간밤에 아무 것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도 물맛이 달콤하고 감미로웠는데,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자 온갖 추한

 생각과 함께 구역질이 일어나다니!”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 원효스님은 자신의 심경을 게송으로 읊었다.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감(龕)과 분(墳)이 다르지 않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한다.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의상은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하지만 원효스님은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고 조용히 선정에 들어있었다.

“원효스님. 왜 길을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십니까?”

 

“예, 저는 이제 당나라로 가지 않으렵니다. 소승은 더 이상 도를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원효스님은 자신이 머물렀던 절로 돌아와 봉화산에서 무덤에서 깨달은 법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많은 설법과 저술을 남겼다.

 

원효스님의 설화가 전해지는 수도암 자리는 해군 부대가 들어서는 바람에 사찰은 폐사됐다.

그렇지만 그 곳에 있었던 부도와 역사는 현재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산119-1로 옮겨와 그 역사를 잇고 있다. 최근에는 원효스님이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에 기초한 ‘원효샘’을 복원한 수곽을 건립했다.

 

또한 경기도와 한국불교문화사업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사찰음식체험장을 겸한 템플스테이 지정사찰로 지정돼 사찰을 찾은 발길이 잦다.  

 

 평택=여태동 기자 

 

 찾아가는 길

 1)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평택터미널에서 98번이나 80번 버스를 타고 안중터미널에서 내린다.

      이곳에서 원정리행 83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2)   혹은 98번 버스로 해군부대 아파트에서 내려 사찰에 전화하면 승합차가 나온다.

3)   승용차를 이용하면 서해고속도로를 이용, 서평택 나들목에 조암방면으로 5분여 내려와 남양대교를

      건너기 전 좌측에 ‘수도사’ 이정표를 보고 들어오면 된다. (031)682-3169

 

도움 : 평택 수도사 주지 적문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