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중국 선종 제 6조 혜능스님 방아를 찧다

백련암 2012. 7. 10. 13:34

중국 선종 제6조 혜능스님

‘머무는 바 없이 마음 낼지니’…

땔나무 배달하는 길에 들은

〈금강경〉한소절에 홀연히 깨달아

5조 홍인의 심법 이어



중국 선종 제6조는 혜능스님(慧能大師, 638∼713)이다.
스님의 속성은 노(盧)씨이고, 관향(貫鄕)은 범양(氾陽)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해(南海) 신주(新州)로 귀양 오게 되어 신주에서 태어났다.

3살 때에 아버지를 잃게 되어 어머니가 수절하며 길렀는데, 자라면서 점점 가세가 궁색해져 땔나무를 해서

편모를 봉양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24세 되던 해 어느 날 나무를 여관에 배달하는 길에 한 손님의
〈금강경〉읽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중에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경전의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맑아져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 손님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책이며, 누구에게 얻었습니까”

 

 

그 손님이 말했다. “이는〈금강경〉이라는 경전입니다.

 

 

나는 호북성 기주 황매현의 동(東) 빙무산(憑茂山)에서 5조 화상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홍인 화상으로부터 ‘한 권의〈금강경〉을 손에 든 것만으로도 곧 견성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그 말을 듣자말자 홍인스님과의 사이에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곧 늙은 어머니에게 스스로의 생각을 알려서 이해를 구하고는 황매의 빙무산으로 홍인스님을 뵙기 위해 달려간다.

스님이 홍인스님을 찾아가 뵙자,

홍인스님께서 물었다. “그대는 어디 사는 누구인가?”

 

 

스님이 대답했다. “영남(嶺南)의 백성입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오직 부처가 되기 위하여 왔습니다.”

 

 

홍인스님이 말했다.

“그대는 남방 출신의 오랑캐여서 불성(佛性)이 없거늘 어떻게 부처가 되려고 하는가?” "썩 물러가라."

 

홍인조사는 나무꾼에게 호통을 쳤지만 그가 여지껏 기다리던 큰 법기(法器)임을 알았다.

 

스님이 대답했다.

“사람에게는 남쪽과 북쪽의 차이가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스님의 대답을 들은 홍인스님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느라고,

<주위의 제자들 눈초리를 의식한 5조 홍인조사는 "가서 방아찧는 일이나 하거라." 고한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대답하느냐”라고 꾸짖으면서 방앗간으로 보내어 주야로 방아를 찧고 장작 쪼개는 일을 시켰다.

 

"예 스님"

 

새벽부터 밤까지 천명스님의 식량을 찧는 일은 여간 고달픈일이 아니다.

하찮은 시골뜨기 행자지만 그의 속에는 거룩한 道心 즉 불성이 자라고 있었다.

 

8개월이 지난 어느날 홍인조사가 들렀다.

"고생하는구나. 내 너의 불성을 인정하나 악한 무리들이 시샘하여 해칠까 염려하는 뜻을 짐작하겠느냐?"

"예. 그래서 저도 큰 스님 곁에는 가지않고 있나이다."

 

얼마후 5조 홍인조사는 그의 법통을 전해줄때가 왔음을 알고 제자를 불러 모았다.

스님이 방앗간으로 보내진지 8개월 후 홍인스님은 문하의 수행자들에게 불법의 큰 뜻을 깨달은 게송(偈頌)을 지어서 보인

사람에게 가사와 법을 전하겠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의 생사문제가 크거늘 너희는 종일토록 복전만을 구하고 생사고해에서 헤어날 생각은 없는것 같구나.

 

너희는 각기 돌아가서 게송을 지어 오너라. 만약 깨친 사람이 있으면 의발을 전하여 6조 조사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들 신수상좌가 홍인조사의 뒤를 이어
6조가 될거라고 확신하였기에 어느 스님도 게송을 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수상좌는 괴로웠다.

"게송을 지을수도 안지을수도 없구나.

 

 

내가 짓는 뜻이 법을 구함이면 옳지만 조사의 자리 를 탐한 것이라면 옳지 않은 일인데 어쩔것이냐."

신수는 고민 끝에 의발을 얻지 못할까봐 결국 지어 바쳤다.


이에 700대중 중의 상좌(上座)인 신수(神秀)스님이 게송 하나를 지어
복도 벽에다 붙여놓았다.

 

 

-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라
매일 열심으로 닦아 티끌이 없게 하노라 -


 

“몸은 진리의 나무, 마음은 맑은 거울의 받침과 같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가 않지 못하게 하라.”

 

 

다른 스님들이 보았을때는 참으로 잘지은 깨친사람의 게송이라고 칭찬이 자자했지만 스승 홍인조사는

"이것은 본성을 보지 못함이니 다만 문밖까지 온것일뿐
문안으로는 못 들어 왔느니라.

 

하루 이틀 생각해서 다시 지어오너라."

이때 나무꾼은 여전히 방아만 찧고 있었는데
어느날 지나가는 사미스님이 뭐라고 중얼중얼 외는 것이었다.

"사미스님 지금 외시는게 무었입니까.?"

"오랑케여 그것도 모르는가?

신수상좌가 지은 게송인데 큰스님이 좋다고 외랬다우. 하지만 딱지 맞은 거라우."

 

신수스님의 게송을 들은 혜능스님이 말하였다.

“아름답고 아름답다. 그렇지만 깨달은 것도 있고 깨닫지 못한 것도 있다.”

 

나무꾼은 게송을 잘 지으면 의발을 전수받는다는 말을 처음 듣고 마침 그곳에 와서 머무는 관리에게 간청했다.

"나도 게송을 짓고 싶은데 글을 모르니 대신 좀 써 주십시요."

" 하 하 하 무식한 오랑케여 주제를 알라 게송을 아무나 짓는건줄 아는가?"

"무상보리를 배운다 하시면서 어찌 초행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사람을 업신 여김은 곧 죄가 되는걸 모르십니까?"

나무꾼 행자의 이말에 관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나무꾼이 읊어주는 게송을 써주었다.


관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게송을 지어 복도 벽에다 붙여 놓았다.

 

 

- 보리는 원래 나무가 없고 맑은 거울 역시 틀이 아니네
본래 한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티끌이 끼일것인가 -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맑은 거울도 원래 받침이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때가 낄 수 있겠는가.”

 

 

이 게송을 본 대중들은 감탄 감탄 깜짝 놀랐다.


이때 홍인조사가 달려와 발고 문질러 버렸다.

"이런 되지 못한 글 보겠나.
이것도 또한 견성못한 게송일 뿐이다."

제자들이 흩어진후 홍인조사는 방앗간으로 왔다.

"그래 쌀은 다 찧어졌느냐?"

"예 찧어진지는 오래이나 아직 키질을 안했습니다."

이것은 곧 자성을 익혔느냐? 는 물음에
익혔지만 보림은 못했다는 대답이 된다.


홍인조사는 지팡이로 방아를 세번 쳤다.


삼경에 찾아 오라는 암시임을 나무꾼행자는 알았다.

 

스님의 게송에서 큰 기량을 본 홍인스님은 그날 밤 스님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심법(心法)을 전수한 다음에,

주위의 시기를 꺼려, 야밤에 산을 떠나도록 하였다.

스승의 곁을 떠난 스님은 이후 15년간 산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선법을 더욱 영롱하게 닦으며, 인연을 기다린다.

의봉원년(儀鳳元年, 676년, 39세)에 마침내 때가 되었음을 알고, 산에서 내려와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 도착한다.

 

그때 마침 그곳에서는 인종(印宗) 법사가〈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때 두 학인이 뜰에 서서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 라고 논쟁하고 있었다.

 

이때 스님이 그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스님의 이와 같은 지적에 놀란 인종법사는 스님을 윗자리에 모셨다.

여기서 스님은 스승이 전해준 가사를 보여준다.
이에 인종법사는 스님이 5조 홍인스님의 전법자임을 확인하고는 스님을 삭발해준다.

이 곳에서 마침내 혜능은 정식으로 출가절차를 밟아 그의 선법을 본격적으로 펴게 된다.

불교신문 이덕진의 조사열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