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조계종 종정 혜암 성관대종사 수행이력

백련암 2012. 7. 10. 17:49

  

원당암

  

    

혜암 대종사 행적비                                                                 혜암대종사 사리탑(1920~2001년) 

 

혜암스님

 

 

 조계종 종정 혜암 성관대종사 수행이력

혜암 종정스님은 1946년 가야산 해인사에 출가한 날로부터 평생토록 눕지 않고 정진하는 장좌불와와 하루에 한끼만 먹는
일일일식을 하며 오로지 위법망구의 두타 고행정진으로 참선수행에만 몰두해온 본분종사이며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선승이다.


일생을 청정한 수행자로 올 곧게 살아온 혜암스님은 성철 방장의 뒤를 이어 해인총림의 방장을 역임하였으며,
1994년 4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1999년 4월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평소,“가야산 대쪽”이라 불릴 정도로 원칙과 소신이 뚜렷하여 당시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1994년 조계종 개혁불사와
1998년 조계종 종단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한국 불교계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이제 혜암 종정스님의 수행이력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혜암 스님은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장성읍 성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원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인근의 사찰을 자주 찾아 참배하며  동, 서양의 위인전읽기를 좋아하였던 스님은 특히 불교경전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는 배움에 뜻이 있으면 일본으로 건너가고 삶이 극도로 궁핍하면 만주로 향하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17세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구약과 신약, 유교의 사서삼경, 불교의 조사어록등을 두루 섭렵하며 동양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의 고승전집을 읽다가 「일휴선사 모친의 유언서」에 감화를 받고  발심하였으며,

또한『선관책진』을 탐독하다가

「아유일권경하니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불인지묵성이라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네)
  전개무일자호호되 (펼치면 한 글자도 없으되)
  상방대광명이로다 (항상 큰 광명을 놓도다)」

라는 대목에서 크게 발심하여 출가를 결심하고 해방이 되자 즉시 귀국하였다.


스님은 1946년(27세) 초여름,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출가하여 출가일로부터 일일일식과 장좌불와를 하며 용맹정진하였다.
초가을 무렵, 공양주를 계속하며 행자로서 당시 가야총림의 조실이신 효봉스님을 찾아 뵙고 "무"자 화두를 결택받아

생사를 뛰어넘는 용맹정진을 계속하였으니 그 정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어느 날, 밥을 푸다가 대분심이 일어나 소임을 다른 스님에게 부탁하고 백련암 뒷편 환적대로 올라갔다.
환적스님이 공부했다는 환적굴은 찾지 못했으나 다른  바위굴에서 “일주일 안에 도를 깨치지 못하면 죽어도 좋다”는
결연한 각오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장좌불와하며  일 주일 동안 삼매에 들어 단식 용맹정진하였다.

그러나, 끝내 도를 깨치지 못하고 해인사로 내려왔다.
이때, 해인사 대중들은 스님을 찾으러 가야산을 헤매고 다녔다.
이로부터, 스님은 “공부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50여년을 장좌불와하며 계속 용맹정진 하였다.

늦가을, 우연히 해인사에 들른 서웅스님께서 이와 같이 정진하고 있는 행자를 보고 퇴설당에 주석하고 계시는 인곡선사를

친견케 하였다.


인곡선사께서 행자를 보자 대뜸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행자는 "아 ───── 악" 하고 일갈을 하였다.

 
또, "네 고향이 어디냐?" 하시니

행자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또,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셨다.
행자는 즉시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일원상을 그렸다.


선사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우리집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이웃집 말이 배탈이 났다.
천하의 명의를 불러서 말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더니
아랫집 돼지의 넓적다리에 뜸을 떴다. 이 이치를 알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마자, 행자는 주먹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에 인곡선사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행자의 머리를 만져 주시고 상좌로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10월 15일(음) 인곡스님을 은사로,  효봉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여 득도하였으니,
『성관』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수계하자마자, 구참납자들의 용맹정진 도량인 퇴설당 선원에 방부를 들이려 하자 갓 계받은 사미라 하여 대중들이 반대하였다.

그러자, 효봉 조실스님께서 "공부하는데 구참, 신참이 어디 있느냐,

성관 수좌만큼  공부하는 사람이 있느냐?" 고 하시자 대중들이 아무 말을 못했다.

그리하여 가야 총림의 퇴설당 선원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일일일식과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계속하며 동안거를 성만하였다.

이 병술년 동안거는 가야총림 개설직후 첫 안거이자  혜암스님의 수계이후 수선안거였다.


1947년(28세) 봄, 첫 안거를 마치고 곧바로 오대산 상원사로 행각하여 한암스님을 모시고

사부대중과 함께 봄 안거를 하였는데 소임은 종두였다.

어느날 새벽, 화두일념에 들어 종성을 하였으나  종이 제대로 쳐지지 아니하였다.


이때 종소리를 묵묵히 듣고 계시던 한암스님께서는  "저 수좌가 참으로 공부하는 납자다"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스님은 상원사에서 봄 안거를 마치고 다시 가야총림으로 발길을 돌려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하안거 내내 용맹정진 하였다.

이때, 정진대중은 효봉 조실스님을 비롯하여 인곡, 우봉, 청담, 비룡 범용, 홍근, 구산스님과 구참납자등 60 여명이 되었으니

훗날 교단 정화운동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의 주역이 된 분들이었다.


한편, 혜암스님은 인곡은사스님으로부터 강원에서 이력을 보라는 가르침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럴 때마다
"생사가 무상한데 어느 겨를에 글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하고  참선에만 전념하였다. 얼마 후, 동산스님 회하에서
공부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인곡스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아니 하였다.

47년 가을이었다.
혜암스님은 해인사에서 성철, 우봉스님과 함께 봉암사로 향하여 자운, 보문, 도우, 보안,  일도스님등 20여 납자와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를 시작하였다.


결사 대중은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백장가풍에 따라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여 하루에 땔 나무를 두짐씩 하였으며 직접 경작을 하였다. 또한 대중적으로 탁발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금용사 금선대로 들어가 용맹정진  도중에 마음이 밝아져서 조사스님의 말씀에 걸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해인사에 주석하고 계시는 인곡 은사스님을 찾아 뵙고 일여한 공부 경계 일러 바치니
인곡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 덕산스님께서 남방으로 가는 도중 점심을 먹으러 떡집에 들어가서 노파에게 '떡 좀 주시오' 하니
노파는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이에 덕산스님은 '금강경 소초요' 하였다.


그러자, 노파가 금강경에 '과검심도 불가득,
현재심도 불가득, 미래심도 불가득' 이라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하겠오' 하고 물으니 덕산스님이
아무 대답을 못했다 한다. 그러면, 너는 어느 마음에 점을 하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혜암스님이 "저는 무조건 떡을 먹겠습니다" 하니  "오매일여가 되느냐?"
"안됩니다" 라고 대답한 즉 인곡스님께서는 "그러면 더 부지런히 용맹정진 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다시 문경 봉암사로 들어가 결사대중과 함께 용맹정진 하였다.

여름에는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9월 15일 해인사에서 상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다시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한암스님을 모시고 동안거를 하였다.


1949년(30세) 3월 15일, 금정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수지하고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하였다.
그리고, 가을부터 이듬해 겨울 안거까지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용맹정진 하였다.

6.25 사변으로 인하여 총림이 해산되자 대중은 거의 흩어졌지만  스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계속 정진하였다.
1951년(32세) 초봄, 은사이신 인곡스님께서 스님의 공부를 점검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게송과 함께 "혜암당"이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지차일단사를 (다만 이 한가지 일을)
고금전여수하니 (고금에 전해주니)
무두역무미호되 (머리도 꼬리도 없으되)
분신천백억이니라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느니라)

이 해 늦은 봄에는 해인사 주위에 공비가 자주 출몰하여 더 이상 정진하기가 어렵게 되자,
스님은 남으로 운수행각하며 금정산 범어사에 당도하여 금어선원에서 동산 조실스님을 모시고
이듬해(52년) 하안거까지 용맹정진 하였다.


51년, 범어사 겨울 안거 때의 일이다.
운허스님이 보제루에서 능엄경 법회를 열었다.
법회시간에는 학인뿐만 아니라 선원 대중도 모두 참석하였으나 혜암스님은 일일일식 장좌불와, 묵언하며

오직 면벽정진만 할 뿐이었다.


해재시 동산스님께서는 "이번 철에 참으로 공부한 수좌는 혜암 뿐이다." 하시며 스님에게만 안거증을 주셨다.

52년 가을, 범어사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고 성철스님이 정진중이던 통영 안정사 천제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혜암스님은 이곳에서 성철스님과 함께 동안거를 하였는데 신도들이 오지 못하도록 인법당 구들장을 파버리고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삼동 한철동안 좌복 하나만 가지고 정진하였다.

1953년(34세) 봄, 6.25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강원도 지역에 전투가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때,  혜암스님은 죽음을 무릅쓰고 위법망구의 일념으로 고행정진하기 위해서 쌀 1되와 콩 1되만을 걸망에
짊어지고 적군의 삼엄한 검문검색을 하나씩  통과하면서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설악산 오세암들어갔다.

그러나, 방에는 들어갈 수 없어서 노지 생식으로 일일일식, 장좌불와하며 가을까지
용맹정진을 하여 더 심오한 삼매지경을 얻었다


. 혜암스님이 이와 같이 두려움 없는 사지 고행정진을 하였던 것은 두타납자로서의 철저한 수행관의 발로였다고 할 것이다.

스님은 6.25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세암에서 두 차례나 더 용맹정진 하였다.


혜암스님은 설악산을 떠나 오대산 적멸보궁에 참배하고 남방으로 행각하여 다시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성철스님과 함께 동안거를 하였다.


1954년(35세), 스님은 다시 북방으로 행각하여 오대산 서대에서 일타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를 하며

하안거를 마친 뒤, 적멸 보궁에 하루 3천배씩 일주일간 예참하고 금생에 기필코 견성도생할 것을 서원하였다.

그리고, 재차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일념으로  더욱 용맹정진하여 겨울 안거를 지냈다.

1955년(36세) 늦은 봄, 스님은 태백산 각화사 동암으로 옮겨 정진하였다.


동암에서는 57년 가을까지 2년간 용맹정진 하였는데 더욱 일여한 경지를 체득하여 크게 득력하였다.
1957년(37)세 초겨울, 혜암스님은 "공부하다 죽으리라"  결심하고 오대산 사고암(영감사) 토굴에 들어갔다.
영하 20℃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추위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아니하고 오직 잣나무 생잎만을 따먹으면서
초인적인 고행정진을 하였다. 몇 달이 지나자 통변이 되지 않아 단식정진을 반복하고 나서 하루에
잣잎과 생콩 10알씩을 먹으며 용맹정진 하였다.


혜암스님은 이 때에 수마를 완전히 항복받아  4개월 동안 한 순간도 혼침에 빠지지 아니하고 수민이란 본래 없는 것임을

확연히 체험하였다.
그러고 나서, 하늘과 땅, 주야와 조석을 분간하지  못한채 며칠동안 의단이 독로하더니 몰록  심안이 열려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미즉 생멸심이요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
오래진여성이라 (깨달으니 청정법신이네)
미오구타료하니 (미혹과 깨달음 모두 쳐 부수니)
일출건곤명을 (해가 돋아 하늘과 땅이 밝도다)

1958년(39세)여름부터는 다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용맹정진 하였다.
그런데, 오세암에서 동안거 중에 은사스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고성 오천사로 내려가 문도들과 함께

인곡 은사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다.


1959년(40세) 1월경, 동화사 금당선원의 조실로 계시는 효봉스님께서 옥천사에 계시는 은사스님께 함께 살자는 편지를 보내 왔다.
그리하여, 해제가 되자 인곡 은사스님을 모시고 동화사로 향하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를 났다.

동화사에서 정진 할 때의 일화이다.


어느날, 길에서 우연히 금오스님을 만나뵙고 내원암 입구에서 쉬게 되었는데 이때 금오스님께서
바위에 새겨진『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라는 글을 보시고 그 뜻을 일러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스님은 금오스님의 턱 밑에  주먹을 대고 뒤로 사정없이 밀어 버렸다.
금오스님께서는 "동화사에도 사자새끼가 한 마리 있군" 하시며 좋아하셨다.
여름 안거를 마치고 오대산으로 곧바로 올라가 서대에서 동안거를 하였다.
랍월8일 을 기하여

상원사 선원에서 대중과 함께 1주일 용맹정진을 하였는데, 이때 정진대중은 활안, 진제, 월현스님 등 10여명이었다.
이듬해 봄에는 동대(관음암)로 거처를 옮겨 하안거를 지내고 겨울에는 해인사에서 정진하였다.

1961년(42)세, 혜암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해인사에서 하안거를 하였는데 해제일에 인곡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셨다.
그리하여, 해인사에서 은사스님의 사십구재를 봉행하여 마치고 난 다음, 스님은 다시 오대산으로 행각하여

북대에서 겨울 안거를 지냈다.

다음은 북대 정진중에 있었던 생사를 뛰어넘는 수행일화 한 토막이다.

이 해 겨울, 오대산에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폭설이 쏟아진 어느날 아침, 혜암스님은 보행을 나갔다가  두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 쏘아 보고 있는 호랑이를 만났다.
스님도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용맹정진해온 납자답게 두 눈을 부릅떴다.

잠시후 호랑이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이듬 해에는 남대(지장암)로 수행처를 옮겨 하안거와 동안거를 지냈다.
혜암스님이 오대산의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등 오대에서 두루 안거하며 수행하였던 것은 다생으로  오대산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3년(44세)봄에 해제가 되자 남방으로 운수행각하여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 회상에서 하안거를 하였다.
그리고, 겨울에는 해인사 선원에서 정진하였다.
이듬해 여름에는 월내 묘관음사 선원에서  향곡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으며, 해인사 선원에서 다시 동안거를 하였다.

1965년(46세), 다시 남방으로 내려가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을 모시고 하안거를 하였으며,
겨울 안거는 해인사 선원에서 지냈다.


다음 해에는,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서옹스님을 모시고 하안거를 하였는데 전 대중이 한 철동안 용맹정진 하였다.

겨울에는 다시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다.


 1967년(48세) 여름, 해인사 뒷편 산록에 위치해 있던 중봉암 토굴에서 정진하였으며, 겨울에는 10월 15일(음) 개설된
해인업림 선원에서 성철 방장 스님을 모시고 유나 소임을 보며 정진하였다.


1968년(49세) 봄에 수행처를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옮겨 동안거까지 용맹정진 하였으며 인근에 문수암을 창건하였다.
이듬해 여름에는 인천 용화사로 올라가 전강 조실스님을 모시고 선덕으로 정진하였는데 스님의 선기가 빼어남을 보고
전강스님께서는 대중들에게 "혜암 수좌는 배우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조실을 가르치러 다니는 사람" 이라고 하였다.

동안거부터는 해인총림 선원 쇄관(퇴설당)에서 현우, 일타스님등 4명의 납자와 함께 3년 결사에 들어갔다.

1970년(51세) 4월, 해인총림 쇄관에서 결사 안거 중이었다.
지난 동안거 중에 발생한 소위 "구들장 사건"이 수습되지 않고  방장스님과 주지의 사퇴로 확대되었다.

이에 총림대중은 쇄관에서 3년 결사중인 혜암스님에게 이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여 줄 것을 적극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혜암스님은 8월까지 5개월간 주지직을 수행하여 사태를 해결한후, 바로 사임하고 문경 봉암사
백련암으로 들어가 이듬해 여름 안거까지 정진하였다.

그리고,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조실스님을 모시고 동안거를 하였다.
안거중에 경봉스님께서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삼단어로 물으셨다.


첫째, "로봉달도인하면 부대어묵이라 하니 이하위대야잇고" 하시니


         혜암스님은 "아 ───── 악" 하고 일갈을 하였다.


둘째, 공부에 대한 소감담을 말해보라 하시니 혜암스님은
       "언어문자는 학습하기 쉬우나 도통은 천상천하에 제일용이하고도 최상난야라.
        다만, 위법망구의 용맹정진 밖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하였다.

마지막으로,「봉통홍중공」의 운자에 맞추어  선시를 지으라 하니 혜암스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올렸다.

영산회상영축봉 (영산회상의 영축봉이여)
만리무운만리통 (구름한점 없으니 만리에 통했도다)
세존념화일지화 (세존께서 들어보이신 한송이 꽃은)
역천겁이장금홍 (미래제가 다하도록 길이 붉으리)
념화당시오견참 (꽃을 들을 때 내가 참석하여 보았다면)
일봉타살투화중 (한 방망이로 때려 죽여 불속에 던졌으리라)
본래무물망언어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언어마저 끊겼는데)
천진자성공부공 (진실한 본래의 성품은 공하되 공하지 아니하도다)
<신해년 동안거 혜암 합장>

이에 경봉스님께서는 혜암스님의 선지가 뛰어남을 보고 대중으로 하여금 혜암스님에게 절을 올리게 하였다.
1972년(53세) 봄, 해제가 되자 혜암스님은 남해 용문사로 수행처를 옮겼다.
이때의 남해도는 배를 타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큰 섬이었는데 숨어서 공부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나, 제방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청풍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당시 주지였던 대처승의 양해를 얻어 통도사 혜각스님에게 주지 소임을 맡기고 선원을 개원하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40여명의 납자를 지도하면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지냈다.

 

1973년(54세)초봄, 혜암스님은 남해도를 떠나 해인총림으로 향하였다. 해인사 소림원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태백산 각화사 동암으로 들어가 75년(56세)가을까지 2년간 두문부출하며 용맹정진하였다.
동암대중은 현우, 현기등 4, 5명 이었다.

이곳은 20여년전 용맹정진 할때 공부에 힘을 얻은 바 있어 늘 마음에 그리던 도장이었으니 오대산 서대,
지리산 상무주암과 더불어 혜암스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수행처였다.

1975년 겨울에는 조계총림 송광사 선원에서 동안거를 하고  이듬해 초봄에는 지리산 백장암을 거쳐
칠불암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하였다.

이때 정진대중은 현우, 활안, 성우, 현기, 인각, 원융스님등 20여명이었다.
혜암스님은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백장가풍에 따라 대중들에게 지게를 하나씩 지급하여 날마다 운력을 하도록 하고

오후부식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외호하느라 각처에서 탁발해온  공양물을 쌍계사 입구에서 부터는 하루에도 몇번씩 짐을 져 올렸는데,

모진 폭풍우가 내리는 날에도 한결 같았다.


해 겨울, 운상선원을 중수하며 먼지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홀연히 백의노승이 나타나 혜암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전해 주고 "념기 취모검 할 지어다" 라고 하며 문득 사라졌다.

진철심금강마하야
조견연섭고비하라


때 묻은 뾰쪽한 마음을 금강검으로 베어내서 연꽃을 비추어 보아 자비로써 중생을 섭화하여 보살피라

칠불암에서 대중을 지도하며 정진하던 스님은 1977년 해인총림 선원에서 다시 유나 소임을 보며 정진하였다.

1978년(59세)에는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4, 5명의 납자와 하, 동안거를 지내며 용맹정진 하였다.

그리고, 1979년(60세) 다시 해인사로 돌아와  조사전(해행당)에서 3년 결사를 시작하였다.

1980년(61세)에는 해인총림 유나에 거듭 임명되었으며, 1981년(62세) 해인총림 수좌에 임명되어 총림대중의 수행풍토

확립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1982년(63세)겨울에는 지리산 청매조사 토굴터에 초암을 짓고 동안거를 하였다.
스님은 성도절 무렵에 해인사 대중의 초청을 받고 해인총림 동안거 일주일 용맹정진에 참여하여
대중을 경책하면서 함께 정진하였다.

이듬 해부터 71세가 되던 해인 1990년까지 8년동안 해인총림 선원에서 성철 방장스님을 모시고 대중과 함께 정진하였다.

1985년(66세) 에는 해인총림 부방장에 위촉되어  총림의 발전과 총림대중의 용맹정진 가풍진작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혜암스님은 선원대중들에게 항상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적게 먹어라" "안으로 부지런히 정진하고  밖으로 남을 도와라" 라고 가르치며 납자로서 철저히 수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1987년(68세)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90년(71세)에는 지리산 두솔암에서 동안거를 하였다.

혜암스님은 출가이후 가야산 해인사 선원에서  수선안거이래 오대산 상원사와 오대, 희양산 봉암사,  금정산 범어사, 설악산 오세암,

태백산 동암,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지리산 상무주암과 칠불암, 조계산 송광사 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당대 선지식인 한암, 효봉, 동산, 경봉, 전강선사를 모시고  일일일식과 오후불식,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하여
45 하안거를 성만하였으니 가히 본분납자의 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가야산 암굴 단식 용맹정진, 설악산 오세암 사지 고행정진, 오대산 사고암 단식 고행정진등은 대표적인 두타 고행정진이라

할 수 있다.

1991년(72세) 봄부터 93년 가을까지는 해인사 원당암에서 안거하며 사부대중을 지도 하였다.
혜암스님은 정법선양을 위한 교화방편으로 81년 원당암에 재가불자 선원을 개원하여 매년 하, 동안거와 매월 첫째,셋째

토요일 철야 용맹정진 법회를 20여년 동안 주관하였다.

96년에는 달마선원(시민선원, 108평)을 신축하여 이 해 가을부터는 원당암에 주석하며 매 안거마다 100여 안거대중과
200여 일주일 용맹정진 대중 그리고, 매월 500여 토요 철야법회 대중에게 참선을 적극 지도함으로써
선의 대중화, 생활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93년(74세) 11월, 당시 조계종 종정이시며 해인총림 방장이셨던 성철대종사께서 열반에 드시자

뒤를 이어 해인총림 제 6대 방장에 추대되어 퇴설당에 주석하며 500여 총림 대중을 지도하였다.

특히, 방장 재임기간 중 선원대중에게는 모두 오후불식을 여법히 지키도록 하였다.

 

1994년(75세) 4월,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어 조계종 개혁불사시 개혁회의를 출범시켜 개혁종단을 탄생케하고

그 이후에도 종단의 안정과 지속적인 개혁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98년(79세) 11월, 조계종 종단사태시에도 원로회의 의장으로서「종헌종법 준수」라는 파사현정의 기치를 높이 천명하여

사태가 합법적으로 해결되는데에 있어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다.


일생을 청정한 계행과 장좌불와, 일일일식등 철저한 두타고행으로 수행정진하신 혜암스님은 사부대중의 여망에 부응하여

1999년(80세) 4월 2일 종정추대회의에서 조계종 제 10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