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경허선산의 삶과 깨달음 그리고 "죽음 앞에서 혼비백산..."

백련암 2012. 7. 10. 15:16

2012년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서 중생교화와 불교중흥에 이바지한 위대한 선승 경허선사가 열반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경허스님은 이제까지 명맥만 유지한 한국불교, 특히 선불교의 법통을 전승하고  그 수행가풍을 크게 진작한 대 선불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경허 큰스님은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나, 아홉살때 경기도 과천 청계사로 출가, 법호는 허<鏡虛 경허>, 법명은 성우<性牛>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님은 출가한지 스무 해 만인 1879년 이르러 동학사 밑에 살고있던 한 신심 깊은 재가 불자의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到牛無鼻孔處 = 우무비공처>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대오각성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수제자로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수월<水月>, 만공<滿空>, 선사가 있다.  

 

스님은 살아생전에   "만공<滿空>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正進力>은 수월<水月>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智慧>는 혜월<慧月>을 당할 자가 없다." 고 제자들을 평가했다.   

 

"꺼져가는 선의 등불을 밝힌 한국 선의 달마"라 이르는 경허선사

 

 

鏡虛 性牛선사

 

 

경허는 출가 초기부터 선 수행에 전념한 선사가 아니다. 그는 23세(1868)이후 34세(1879)까지 10여 년간 동학사에서 불교경학,

특히 화엄경을 강의하던 강백이었다.

 

그가 선사로서 삶의 방향을 돌리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은사였지만 지금은 환속하신 桂虛스님을 만나러 서울로 가는 길에 천안의

한 마을에서 맞닥뜨리게 된 콜레라라는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다.

 

전염병 때문에 한 마을이 통째로 폐허가 되어있고, 누구든지 걸리기만 하면 멀쩡한 사람도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모습을 보게 된

경허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죽음과 굶주림의 마을 그리고 거리들의 풍경을 통해서 경허는 눈부시게 보이는 세상이 사실 장례식의 기나긴 행렬에 지나지 않고,

사람의 목숨이 들어 마시고 내쉬는 한 호흡간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가 가르치던 경전상의 교리들이 목전에 드리워진 죽음이라는 그늘 앞에서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회심하고 스승을 만나러 가는 것을 포기한다.

 

이후 그는 “今生에 차라리 어리석고 미련한 채 문자 공부를 하지 안 하였을 것을, 祖師의 道를 찾아 참구하고, 三界를 뛰어넘는 공부를

하려는 데는 오히려 拘?가 됨이라”고 한탄하고, 그 길로 강사 생활을 그만두고 선수행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경허는 ‘나귀의 일이 가지 안 하였는데 말의 일이 당도 하였도다(驢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 가지고,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혀서 수마를 쫓으면서 필사적인 정진을 하나, 은산철벽에 부딪치는 것처럼 그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떤 사미승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곳이 없다(到牛無鼻孔處)’는 말에 안목이 움직여서 옛 부처 나기 전의 소식이 몰록

드러나 豁然히 現前에 열려져, 물건과 내가 함께 空하여 옛 사람의 곧 바로 크게 쉰 경지에 도달하여 백천 가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하고, 꽉꽉 눌러 덮였던 것이 풀려 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3) 깨친 것이다. 경허가 부르는 ‘깨침의 노래’ 가운데 일부를 들어보자.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衣鉢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리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네.

 

봄 산에 꽃이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 無生의 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일곡가를 아는 사람이 없음이여, 때가 말세더냐. 나의 운명이던가.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음의 귀로다. ‘이랴 쯔즛’ 소를 부르고 말을 부름이 곧 보현이요, 장서장 이첨지가 본래 비로자나로다.

 

…… 내가 큰 法王이 되었음이로다. ……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 이 말을 들으면 내가 헛소리를 한다하여 믿지 않고, 또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 귀 뚫린 사람이 있어 자세히 믿어 의심이 없으면 문득 안심입명처를 얻으리라. ……

 

어찌하여 내게서 무생법을 배워 인천의 대장부가 되려 하지 않는가? ……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집일레.

6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오도가에서 보이듯이 경허는 깨치고 난 이후 衣鉢을 전해 받을 사람이 없다고 토로한다.

의발을 전해 받을 스승이 없음을, 다시 말해서 그의 깨침을 알아줄 선지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마대사가 중국 땅에 들어온 이래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도를 얻어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이른 이가 한없이 많건마는

요즘에 이르러 그 도가 폐하여 전하지 않는다”라는 경허의 언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 나라 선의 법맥이 서산이후 단절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경허의 한탄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의 깨침을 인가할 눈 밝은 선지식이 한 사람도 없는 불교계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깊은 우려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경허는 또한 그가 부르는 깨침의 노래인 無生一曲歌를 아무도 몰라주는 것이 말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의 운명이기 때문인지를

한탄하면서 자기에게서 무생법을 배우면 인천의 대장부가 될 것임을 설파한다.

 

‘무생’은 ‘본래 천지의 만물은 생도 없고 멸도 없다’는 의미이다. 천지만물을 나타낸 대로 한정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나타나기 전까지

의 본래 상태까지를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한다.

 

하늘이 가운데도 가장자리도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의 모습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無生은 佛性 또는 空性과 같은 의미이다. 마치 뿔을 나무에 걸고 공중에 숨어 자취가 없는 영양처럼 불성은 형체도

안 보이고 말소리도 안 들린다. 짐승의 발자국을 찾는 사냥개에게 영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경허는 무생의 상태에서 세상을 본다. 그때 산빛은 문수보살의 눈이 되고, 물소리는 관음보살의 귀가 된다. 소를 부르는 아이나

말을 부르는 목동이 바로 보현보살이 되고, 장서장 이첨지가 본래 비로자나부처가 된다.

 

죽음과 삶, 사람과 부처, 큰 것과 작은 것은 무생의 눈으로 보면 만물일체가 되는 것이다.

 

.6) 경허가 무생일곡가를 몇 번이고 불러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는 것은 바로 대중이, 불법의 진리를 모르고,

자기의 깨침의 경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탄인 것이다.

 

이후 그는 방장실에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고, 심지어 그에게 교학을 가르쳤던 스승이던 萬化강사가 들어와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화가 그의 행동을 힐난하는 것에 대해서 ‘일이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하다’는 등의, 당시의 대중이나 심지어 대강백이던

만화강사 마저도 이해할 수 없었던 대답을 한 것은, 사실 계산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가 깨달은 선의 정체를 만화를 포함한 대중들이 알아차릴 것인가에 대한 시험, 선의 법통이 단절된 것에 대한 한탄과 자기가 끊어진

선의 법맥을 이은 것을 누가 알아줄 것인지에 대한 시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바로 그 중단된 선의 법맥을 다시 이을 사람이라는

강한 암시가 그 행동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의 선법을 보자.

參禪이라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네 일상 생활을 잘 返照하여 자신의 주인공을 확연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外物의 잡된 것이나 생사에 이끌리지 않으면 홀로 뛰어나 분명하고 평안하게 된다.

그리하여 얽매일 것도 없고 해탈할 것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열반도 없다.

 

8)대저 이 현묘한 문을 참구하는 이는 항상 반조에 힘써 그것을 참구하고 마음이 생생하고 세밀하여 쉼없이 그것을 참구해야 한다.

이처럼 지극히 간절하게 하여 마음으로 참구할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참구한다는 마음이 없어져 근본 생명에 이르게 되고

本地風光이 저절로 갖추어져 모자람도 남음도 없게된다.9)


경허에 의하면, 부처 되려면 우리는 자기의 몸에 있는 주인공인 마음을 찾아보아야 한다.

내 마음을 찾으려면 세상 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항상 내 마음을 궁구하되, 보고 듣고 일체 일을 생각하는 놈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가.

모양이 있는 것인가, 모양이 없는 것인가, 큰가 작은가, 누른가 푸른가, 밝은가 어두운가 의심을 내어 고양이가 쥐잡듯, 닭이 알을 안 듯,

늙은 쥐가 쌀 든 궤짝 쫓듯 하여 항상 마음을 한 군데 두어 궁구하여 잃어버리지 않고 의심하여 일을 하더라도 의심을 놓지 말고 그저

있을 때라도 의심하여 지성으로 하여가면 필경에 내 마음을 깨달을 때가 있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모기가 쇠소 등어리를 뚫는 것과 같이, 부리가 들어갈 데가 없는 곳에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11)

 

경허의 법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수행법은 간화선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허가 깨침의 경지를 체득한 것은 서산 이후 그 법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한국불교의 특징인 간화선맥을 수 백년 만에 재건한 것이 된다.

 

이덕진 님의 논문 <鏡虛禪師의 ‘法化’와 ‘行履’에 대하여>에서 발췌.

 

◈ 2. 경허선사 생사의 문 넘은 동학사

 

경허선사 생사의 문 넘은 동학사

 

"죽음 앞에서 혼비백산 내 배움이 헛됐구나"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거센 태풍의 시발이 되듯이 한 사람의 깨달음이 무너져가는 세상의 정신을 새로이 일으키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 주변에서 깨달음을 얻은 인물들이 대자유를 얻고, 영성을 밝힌 장소를 매주 찾아 소개한다. 편집자주.


“죽음앞 혼비백산 내 배움이 헛됐구나”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3일 아침 동학사 오르는 길엔 매서운 바람이 마중한다. 칼바람에 낙엽이 허공을 가르고, 나무의 잔가지는 부서져 흩어진다. 바윗장보다 두꺼운 얼음이 계곡물을 막아섰다. 산도 얼고 계곡도 얼었다.


경허(1846~1912)의 새벽 또한 이랬을 것이다. 9살 어린 나이에 청계사로 출가한 경허는 겨우 글만 깨친 가운데 14살에 이곳 동학사로

왔다. 당시 조선 제일의 강사로 명성을 떨치던 만화 보선으로 부터 불교와 유교 경전 등을 배워 두각을 나타낸 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강사에 추대됐다.

33살이 된 그는 청계사에서 어린 동욱(경허의 속명)을 친아버지처럼 돌봐주다가 환속한 옛 스승 계허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그는 조선 제일의 강사로 어엿이 출세한 자신의 떳떳함을 내보이며 스승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콜레라 마을서 도망쳤던 33살 조선 제일의 강사
산으로 돌아와 20년 수행
“콧구멍이 없다” 말듣고 ‘본성품의 소’를 깨닫다


서울로 향하던 경허는 천안을 지나며 매서운 비바람을 만나 한 마을로 피해 들어갔다. 그러나 어느 집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린 끝에 열린 한 집 주인은 “지금 이 마을엔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해 모두 죽어 시신이 지천에 깔려 있으니

전염돼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어서 멀리 달아나라”며 문을 닫았다. 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중들이 우러러보러 가운데 법상에 올라 “생과 사는 뜬구름 같은 것, 생과 사는 둘이 아니”라고 가르치던 그가 아닌가.

 

갑자기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로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경허의 심중이 어땠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선 제일의 불교 지식이 생사의 갈림길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호랑이를 그린 그림은 그림일 뿐 호랑이가 아니었다. 부처의 글은 불경일 뿐 부처가 아니었다. 동학사에 돌아오는 길에

그의 가슴에도 칼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동학사에 돌아온 그는 20년 동안 스승 만화 보선이 일군 강원을 스승의 진노를 뒤로 한 채 폐쇄하고,

“지금까지 내가 한 소리는 모두 헛 소리”라며 학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토굴에 들어가 문을 닫아 건 채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당나라 때 영운 지근 선사의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었다.

그는 이 의심뭉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턱 밑에 송곳을 세워놓고 정진했다.


50년 전부터 비구니 사찰이 된 동학사에 들어서니 옛 자취는 없고 정갈한 산사가 학처럼 사뿐히 앉아 있다.

5분 가량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실상선원이다.

 

경허가 용맹 정진했던 토굴이 있던 자리다. 1958년 15살의 나이로 이곳에 출가한 주지 요명 스님(61)은 “허름은 토담집이던 경허 스님의 토굴터는 신도안에서 와 상투를 틀고 도를 닦던 한 가족 4명이 살았는데, 50년대 말 절에서 돈을 주고 내보내고 그 집을 헐었다”고 전해주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실상선원이 지어져 강원 4학년인 화엄반들이 살고 있다. 생명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려던 경허의 수행처에 100여년 뒤 후학들이 생명의 이치를 밝히는 화엄학을 공부하고 있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경허는 두려움에서 넘어졌다. 어려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죽음이 두려웠고,

이를 이기기 위해 불과 9살의 나이에 출가했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사랑했던 어머니와 이별하는 것도 어린 그에겐 깊은 두려움이었다.

 

이런 모든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금의환향할 때 그는 한 마을에서 최근 지진과 해일의 공포에 떨던 동남아시아의 피해자들처럼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그가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두려움을 마주하며 목숨을 건 수행을 한 지 3개월 뒤 어느 날이었다. 사미승 동은이 이미 깨달은 바가

있는 자신의 속가 아버지 이처사가 한 말을 경허의 문 밖에서 던져 물었다.

 

“소가 되어도 ‘콧 구멍이 없다(무비공·無鼻孔)’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그 때 경허는 자신의 실상을 찰나에 꿰뚫어보았다. 생사의 경계는 어디던가.

들이쉰 숨을 내뱉지 못하거나 내 쉰 숨을 다시 들이쉬지 못한 순간 생사는 갈라지고 만다. 숨구멍에 생사의 갈림길이 있다.

 

그런데 ‘콧구멍이 없다’는 것이다. 일순간 경허의 숨이 턱 막혀 버렸을 것이다.

사미승의 질문은 오직 화두 일념이던 경허의 급소를 찔렀고, 생사경계에 선 그를 백척간두에서 밀어버린 셈이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더 이상 갈래야 갈 곳 없는 곳에서 하늘은 열렸다. 그를 극한 공포로 사로잡은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이 문이었는데,

그것이 해탈의 단초가 된 것이다.

 

숨구멍이 사라져 숨조차 쉴 수 없는 곳에서 그는 허당에 빠지듯 한 생각을 여읜 순간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본성품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법명은 성우(性牛). 드디어 애타게 소를 찾던 그가 원래부터 ‘본성품의 소’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동학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니 경허를 대신해 계룡산이 생멸과 생사가 둘이 아닌 이치를 일러준다.

이 칼바람이 바로 봄이 오는 소리며, 저 계곡의 얼음이 바로 시원한 봄날 시냇물이 아닌가.


공주 동학사/글·사진 조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