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경봉스님의 산은 산이요... 효봉스님의 무문관 토굴 수행기

백련암 2012. 7. 11. 01:02

 

경봉스님

 

삼십년 전엔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고 천성산에 들어오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십년 전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천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더라’

 

오늘 마음과 부처엔 관심없이 떡과 밥을 배불리 먹고 천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 셋 가운데 정말 어떤 것이 옳은가? 비로소 주장자를 한 번 치다. (경봉 스님)

 

 

<명정 스님 설명>

천성산은 지금 양산군 하북면 용원리에 있는 내원사에 있는 산 이름이다.

원래는 원적산이라 하였는데 원효스님이 원적산의 너른 나무 판을 중국의 담운사에 날려 보내자 무너진 절 때문에

죽을 뻔한 천 명의 대중을 구원했다하여 천성산으로 불렀다.

 

경봉스님은 삼십년 전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생각으로 천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임을 깨달았으나

한때는 부처도 마음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산을 바라보니 ‘산도 산이 아니고 물도 물이 아님’을 괴로워했다.

그러나 마음과 부처조차 버리고 산을 바라보니 ‘산은 정말 산이고 물은 물’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마음을 비우면 부처가 보이고 부처를 버리면 마음이 보인다’ 라는

이 기막힌 화두를 마침내 경봉스님은 깨달았던 것이다.

 

 

(명정/정성욱 편집, 〔꽃은 져도 향기는 그대로 일세〕, 예문, 2002) 중에서

 

 

 

효봉스님

 

▣ 효봉 스님의 무문관 토굴 수행기

 

서른 여덟에 스님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늦깍이 이다."

효봉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자각하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자지 않고 분발하여

오로지 정진에만 애썼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우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제방의 선지식

친견하기 위해 걸망 하나를 메고 행각의 길에 나섰다.

남과 북으로 두루 다녀 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결국 참선 공부는 남의 말에 팔릴게  아니라, 스스로가 실참 실오해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듬해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얽힌 세정을 끊고 뛰쳐나온 스님에겐 생사의 고뇌에서 해탈하는 일만이 지상의 과제였다.

용맹심을 일으켜 화두를 타파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화두란 옛 조사들의 말에서 이뤄진 것으로, 참선하는 이가 참구해야 할 과제를 말한다.

스님은 "조주 無字"로 서 평생 화두를 삼았다. 그리고 남들에게 화두를 일러줄 때도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이 無字 화두를 일러주곤 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통해서 이 無字 화두만큼 공부하는 이의 눈을 많이 띄워준 화두가 없다고 하였다.

1927년 여름, 신계사 미륵암에서 안거에 들어갈 때 스님은 미리 대중에게 알렸다.

 

"저는 반야에 인연이 엷은 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가 없습니다.

입선, 방선도 경행<徑行>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서 배기겠습니다."

 

이렇게 대중에게 통고하고 나서 스님은 꼬박 한철<석달>동안을 아랫목 뜨거운 자리에 앉아 정진했다. 

한번은 공양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엉덩이게 무언가 달라 붙은 게 있어 돌아보니 엉덩이 살이 헐어서 진물이 흘러

가사와 방석이 달라 붙어 있었다.

살이 허무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에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히  위법망구의 정진이었다. 

목욕할 때면 그때의 흉터가 커다랗게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님은 그 뒤부터 더운 방을 싫어하였다. 스님과 함께 방을 쓰면 제자들은 늘 추워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효봉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선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용맹스럽게 수행을 계속했다. 밤에는 눕지 않고  앉은 채 공부하고,

오후엔 먹지도 않았다.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해서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라고 별명이 생겼다.

 

출가한지 다섯해,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스님은 초조했다.  자신의 두터운 숙세의 업장과 무능을 한탄했다.

대중이 여럿이 거쳐하는 처소에서는 마음껏 정진하기가 어려웠다. 스님은 고심 끝에  토굴을 짓기로 결심했다.

금강산 법기암 뒤에 단칸방의 토굴을 짓고, 한 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밥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만을 내었다. 그리고 스님이 방에 들어  앉은 뒤 밖에서 벽을 발라버리도록 일렀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세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다시는 토굴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갔다.

그것은 결사적인 각오였다, 그 때 가지고 들어간 것은 입은 옷에 방석 석 장뿐, 하루 한끼 공양을 들여보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제 스님에겐 기쁨도 슬픔도, 현하고 괴로움도, 먹고 입고 자는 일도 다 아랑곳 없었다. 

오로지 무자 화두를 타파하기 위한 용맹정진이 있을 뿐이었다. 일체 인간의 풍속 권 밖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암자와 토굴과의 움직임은 하루 한끼씩 공양을 토굴 안으로 들여주는 일, 그날 빈 그릇을 챙기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주는 일뿐이었다. 인기척 없는  토굴안, 그 전날 밥그릇이 비어 있는 걸 보고 살아있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 밖에서는 토굴 안의 동정<動靜>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지나갔다.

그리고 새봄, 하루는 시자가 공양을 가지고 가니 그 전날 놓아둔 공양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님, 왜 공양을 안 드셨습니까?

이 소리에 스님은 비로소 어제의 공양이 창문 입구에 있는 것을 의식했다.

 

1년 반 만에 걷는 걸음이라 어린애처럼 비틀비틀 걸음마를 해서 나왔다. 머리와 수염은 덥수룩하고 손톱과 발톱은 길대로 길었다. 

그새 세수 한번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만은 환하게 빛이났었다고 전한다.

 

그때의 심경을 노래한 오도송은 이러했다.

 

海底燕巢鹿抱卵<해저연소록포란> :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火中蛛室魚煎茶<화중주실어전차>  :     타는 불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차가소식수능식> :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白雲西飛月東走<백운서비월동주> :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효봉스님 법어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