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익산 = 왕궁리 오층석탑 . 동, 서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백련암 2013. 3. 6. 10:39

◈왕궁리 오층석탑

왕궁리 유적은 사적 제 408호 = 백제 무왕 대 궁성으로 건립되어 이후에 사찰로 변모경영되어진 유적지이다.

유적지 내에는 왕궁리 유적전시관과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 289호)이 있다.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전북 익산을 천년고도라 부른다. 백제 30대 무왕이 백제의 수도를 이전하려 한 곳이다.

 

왕궁리5층석탑은 백제 왕궁의 경영이 끝나고 사찰로 변화되는 과정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왕궁리5층석탑이 사찰로 변화과정에 처음부터 조성되었는가?

아니면 목탑 이후에 재전된 건인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백제 말기로 보고 있으나 석탑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①백제 말기, ②통일신라 초기, ③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 등으로 일치된 의견접근이 어려운 상태이다.

 

석탑 건립 연대는 석탑의 양식, 석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중 사리병을 보관하던 내함의 문양과 금은제금강경판의 글자체 분석,

석탑 하부의 추정 목탑지 또는 건물지의 기초부(판축층)의 존재, 석탑의 기단부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의 양식 등에 근거해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석탑의 정확한 건립 연대가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왕궁리 오층석탑 (王宮里  五層石塔) : 국보 제 289호

미륵사지 석탑을 본 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높이가 9m인 이 석탑은 단층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 옥개 받침 등이 특징적이다.

1965년 ~ 1966년에 해체 · 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제 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에서는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같은 사리장엄구(국보 제 123호)가

석탑 밑에서는 가로 16.8m, 세로 12.7m인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 기초를 보면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는 "왕궁사(王宮寺), 관궁사(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대관궁사(大官宮寺), 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 신라시대 명문 기와가 여럿 출토되었다. 지금도 이탑의 축조 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탑의 정면  =  금당터(金堂址)

왕궁리의 사찰은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궁궐터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터의 동쪽으로 약간 기운 남북 축에 오층석탑, 금강터, 강당터가 있어 "1탑 1금당"이라는 사찰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를 모시는 금당은 사찰의 중심 건물로 정면 5칸(19.3m), 측면 4칸(14.5m)으로 된 통간 구조이다.

그 밖의 사찰 유적으로는 오층석탑 동편의 기와 가마터와 강당터 서편의 건물터 두 자리가 있다.

 

 

 

뒤태(대각선 동쪽을 향해)

 

 

정뒷면

 

 

 

 

 

부여 문화재 연구소(왕궁리 유적발굴조사단) 안에는 콘테이너박스가 있다. 아마도 연구 사무실로 쓰고 있는 것같다는 생각...

 

 

  

                                                                                                          삼족오

 

 

 

 

 

왕궁리 오층 석탑에서 발견된 유물들(王宮里五層石塔 發見遺物)

 

 

 

 

왕궁리 오층 석탑에서 발견된 유물들 중 금은제 금강경판 세부(金銀製 金剛經板 細部)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 왕궁리 유적지 한 가운데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서 있다. 인접한 익산 미륵사지와 함께 대표적인 백제유적이다.

 

신라 선화공주와의 사랑이야기 주인공 서동은 훗날 백제 무왕이 된다.

무왕은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려하면서 궁궐터와 함께 여러 사찰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를 뒷받침 할만한 유물이 곳곳에서 출토된다.

하지만 역사속의 패자인 백제의 기록을 온전히 찾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폐사지에 홀로 남아, 그날의 역사를 기억하는 오층석탑은 오늘도 말이 없다.

 

 

◈동, 서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고도리석불에 얽힌 전설 2"

예전에 넘어져 있던 불상을 조선 철종 9년(1858) 익산군수 최종석이 현재의 위치에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바로 옆에는 비석 ‘석불중건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동, 서, 북의 삼면이 산으로 가로막히고 남쪽만 터져 있는

익산 금마(석불이 있는 곳)는 물이 다 흘러나가게 생겼기에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말에는 반드시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로서의 역할을 하는 인석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익산 서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 古都里 石造如來立像) : 보물 제 46호. 시대 : 고려

이 불상은200m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는 2구의 석상(石像)으로  양감(量感)없는 사다리꼴의 석주(石柱)에

얼굴과 손, 옷 주름과 대좌(臺座)를 얇게 표현하였다.

머리에는 높은 관(冠)과 방형(方形)의 갓을 쓰고 있으며, 네모난 얼굴에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 등의 소략한 모습은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네는 이와 같이 신체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괴체화 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 역시 그러한 일련의 작품 중의 하나로 무척 친근한 인상을 주고 있다.

 

 

 

 

 

 

                              말로는 이 석상이 남자 석조여래입상이라함                                                           여자 석조여레입상

 

 

동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 보물 제 46호  시대 = 고려

 

“고도리석불에 얽힌 전설”

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2구의 석상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얼굴, 손, 대좌 등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음력 12월에 두 불상이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상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4각형의 높은 관(冠) 위에 다시 4각형의 갓을 쓰고 있다.

4각형의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간신히 표현되어 있는데,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이다.

목은 무척 짧게 표현되어서 어깨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는 셈이다.

몸은 사다리꼴의 돌기둥으로 굴곡이 없으며, 팔은 표현되지 않고 손이 간신히 배에 나타내었다. 도포자락 같은 옷은 특별한 무늬무늬없이

몇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臺座)와 불상을 같은 돌에 새겼는데, 앞면을 약간 깍아 대좌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 같은 신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마치 분묘(墳墓)의 석인상(石人像)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신체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불상.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떨어져 마주 서 있는 2구의 석불입상이다.

남녀로 보이는 이 한쌍의 불상은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얼굴, 손, 대좌 등이 표현되어 있다.

사각형의 관위에 다시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고 얼굴은 사각형이다.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토속적인 장승의 인상을 풍기고 있다.

고려시대에 신체의 표현이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 불상 또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짐작된다.

 

  

서쪽에 있는 남자석불입상                                                                                      동쪽에 있는 여자석불입상

 

옥룡천 다리

두 석불입상을 가르며 옥룡천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는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섣달 그믐날 개천이 얼어붙으면 두 불상이 만난다는 것이다.

둘이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한다.

지금은 옥룡천 위에 예쁜 다리가 놓여 언제든 양 석불 사이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